LG전자 휴대전화 브랜드 흑역사

LG전자만큼 브랜드 이름을 자주 바꾼 휴대전화 제조사가 또 있을까. 1995년 화통이라는 이름으로 휴대전화 사업을 시작한 LG전자는 위기를 맞을 때마다 프리웨이→CION→CYON→옵티머스→GㆍV로 브랜드명을 바꿔왔다. 지난 12일엔 또다시 기존 브랜드를 버리고 새 브랜드(벨벳폰)를 쓰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렇다면 LG전자 휴대전화의 부진은 마냥 ‘브랜드’ 때문일까. 더스쿠프(The SCOOP)가 LG전자 휴대전화 브랜드의 흑역사와 LG벨벳폰의 가능성을 살펴봤다. 

LG전자는 오는 5월 출시하는 스마트폰에 벨벳이라는 새 브랜드명을 붙였다. GㆍV시리즈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사진=LG전자 제공]
LG전자는 오는 5월 출시하는 스마트폰에 벨벳이라는 새 브랜드명을 붙였다. GㆍV시리즈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사진=LG전자 제공]

2000년대 중후반 피처폰 시절, LG전자는 잘나가는 휴대전화 제조사였다.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이 팔리는 휴대전화 브랜드 이름에 LG전자의 ‘싸이언’이 있었다. 싸이언이 삼성전자 애니콜의 견고한 아성까지 넘볼 수 있을 거란 평가도 받았다.

‘초콜릿폰’으로 시작해 ‘샤인폰’ ‘프라다폰’ ‘롤리팝’ 등 내놓는 제품마다 흥행몰이에 성공했다. 최고 전성기였던 2008~2009년엔 LG전자 매출의 절반을 휴대전화 사업부(MCㆍMobile Communications)가 책임질 정도였다. 심지어 2008년엔 MC사업부의 영업이익(1조4242억원)이 LG전자 전체 영업이익(1조2269억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하지만 LG전자 MC사업부의 화려했던 영광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던 휴대전화가 LG전자의 골칫덩이로 전락한 지 오래다. 그렇게 잘나갔던 MC사업부는 2015년 이후 5년 연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분기로 범위를 좁히면 19분기 내리 적자다. 그동안 누적된 영업손실만 4조원에 이른다. 

기세등등하던 LG전자의 날개가 꺾인 건 시류를 읽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시장의 패러다임이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LG전자는 피처폰만 고집했다. 2010년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를 탑재한 첫 스마트폰 ‘안드로-1’을 내놨지만 이미 두서너발 늦은 뒤였다. 

그렇다고 LG전자가 스마트폰을 뒷전으로 밀어놓은 것도 아니다. 듀얼코어ㆍ듀얼카메라ㆍ모듈폰ㆍ듀얼스크린 등 ‘최초’ 타이틀이 붙은 혁신제품을 잇따라 선보일 정도로 공을 들였다.

2012년엔 오너 일가(구본준 전 LG전자 부회장)까지 전면에 내세우면서 ‘회장님 폰’이란 파격적 아이템까지 선보였다. 10여년간 MC사업부 수장의 얼굴을 5번이나 갈아치우는 등 채찍질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반전은 없었다. 

 

고심하던 LG전자는 지난 12일 또 한번 극약처방을 내렸다. 이번엔 ‘브랜드 네이밍’을 바꾸는 ‘수’를 던졌다. 그동안 LG전자 스마트폰을 대표했던 플래그십 브랜드 ‘G’와 ‘V’시리즈를 버리고 제품별 특성에 맞춰 별도의 이름을 붙이겠다는 강수를 뒀다. 초콜릿폰ㆍ프라다폰 등이 연상되는 ‘펫네임(별칭) 전략’을 통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계획으로 풀이된다. 당장 오는 5월 출시하는 제품엔 ‘벨벳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름만 바꾼 것도 아니다. 벨벳폰은 플래그십 모델이 아닌 가격과 성능을 조금 낮춘 매스 프리미엄 모델로 출시될 예정이다. 애플과 삼성전자가 버티고 있는 플래그십 시장에서의 직접적인 경쟁을 피하겠다는 복안이다. [※참고 : 플래그십 모델은 제조사가 주력으로 내세운 최상위 모델이다. 매스 프리미엄 모델은 플래그십 모델에서 성능과 가격을 하향조정해 진입 장벽을 낮춘 준프리미엄 모델을 뜻한다.] 

김지산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플래그십 모델이 아닌 이상 기존 브랜드 이름을 따를 필요는 없다”면서 “새로운 포지션 전략은 일부 수요를 잡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장도 관심을 보였다. LG전자가 공개한 렌더링(renderingㆍ3차원 화상을 만드는 과정) 이미지엔 긍정적인 반응이 잇따랐다. 외신도 “과감한 시도”라며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준영 상명대(소비자학) 교수는 이번 LG전자의 전략을 두고 “후발주자인 LG전자가 선도적인 브랜드로 이미지를 탈바꿈하려는 것”이라면서 “새로운 네이밍과 포지셔닝을 통해 새 브랜드 카테고리를 만들어내려는 건데, 후발주자로선 보수적인 전략보단 이런 공격적인 방법도 시도해볼 만하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우려도 없지 않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쌓아온 브랜드를 버린다는 건 상당한 리스크다. 소비자들에게 새 브랜드를 각인시키기 위해선 그만큼 많은 비용과 노력,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런 리스크를 감수하고 브랜드명을 바꾼다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용구 숙명여대(경영학) 교수는 “LG전자 ‘벨벳’은 좋은 시도”라고 말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브랜드명은 기업의 이미지, 아이덴티티와도 잘 맞아야 한다. 이런 조건에 부합한다고 해도 소비자가 어떻게 평가할지는 예측할 수 없다.” 

실제로 LG전자는 휴대전화의 브랜드명을 수차례 바꿨지만 대부분 쓴맛을 봤고, 그 원인은 ‘조급함’이었다. 예를 들어보자. 1995년 ‘화통’이란 이름으로 휴대전화 시장에 첫발을 내디딘 LG전자는 1년 만에 프리웨이로 이름을 바꿨다. 이듬해엔 다시 ‘싸이언(CION)’으로, 2000년엔 ‘싸이언(CYON)’으로 변경했다.

스마트폰으로 넘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2010년 ‘옵티머스’라는 이름을 꺼내들었지만 2년 후엔 ‘G’시리즈로 노선을 바꿨다. 이마저 성에 차지 않았는지 2015년엔 5G 플래그십 브랜드 ‘V’시리즈를 추가했다. 이중 싸이언은 LG전자 수뇌부의 ‘조급함’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사례다.

익명을 원한 브랜드 전문가의 말을 들어보자. “2000년대 중반 싸이언은 삼성전자 애니콜을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몇몇 브랜딩 업체는 싸이언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LG전자는 싸이언을 버렸다. 당연히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LG전자 벨벳폰을 둘러싼 우려는 또 있다. 펫네임 전략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초콜릿폰ㆍ프라다폰이 성공을 거뒀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당시엔 싸이언이라는 탄탄한 브랜드가 기반이 됐지만 지금의 LG전자엔 그런 기반이 없다. 더구나 LG전자가 왜 벨벳폰이란 펫네임을 붙여야 했는지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소비자들이 LG전자가 주장하는 혁신성과 차별성에 수긍하지 않으면 브랜드의 진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

2018년 10월 황정환 LG전자 MC사업본부장(당시)은 “과거엔 싸이언이 있었지만 현재 LG전자엔 그런 브랜드가 없다”면서 애플의 아이폰, 삼성전자의 갤럭시처럼 LG전자 스마트폰을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로부터 1년 반, LG전자가 꺼내든 브랜드 전략은 결이 완전히 다르다. ‘LG전자가 뚜렷한 장기계획 없이 과거의 영광만 좇고 있다’는 비아냥이 쏟아지는 이유다. LG전자의 새 브랜드 전략, 묘수일까 자충수일까. 심판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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