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 공세가 제7회

전쟁은 지구전으로 되었다. 산중의 승군들은 양식이 끊어지고 백설이 내려덮어 굶주림과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 돌연히 장군 족리의소가 진중에 들어와 천정장정 등 모든 장수들을 불러내어 강화를 붙인다.

 

미농 지방에 금천씨의 잔당이 토호의 무리와 연락하여 항상 청주성1)을 엿보는 우환이 있다. 직전신장이 다시 출병하여 부하 명장인 시전승가柴田勝家(시바타 가츠이에) 좌구간신성佐久間信盛(사쿠마 노부모리)의 무리가 나갔다가 주고2)라는 요해처에서 참패를 당하고 쫓겨 온다.

신장이 제장을 모아놓고 주고를 격파할 계책을 물은 즉 다 묵묵하여 별다른 양책良策을 진언하는 이가 없었다. 말석에 있던 키 작은 등길랑이 나와 신장을 올려보며 말한다.

“주고를 친다는 것은 칼로 물 베기입니다. 미농 지방에 흩어져 있는 토호들이 벌떼 같으니 금일에 깨뜨리면 내일 모여들 것인즉 차라리 성을 쌓아서 막는 것이 상책일까 합니다.”

직전신장도 다만 주고를 깨뜨릴 생각뿐이요, 방어할 의사는 없던 터이다. 등길랑의 말을 듣고 미처 생각이 돌지를 못하여 이날은 주고에서 쫓겨 온 제장들만 질책하다가 이튿날 등길랑을 조용히 불렀다.

등길랑은 말하기를 “미농국 내에 있는 토호들의 세력은 여간한 시일로는 금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고에다가 성을 쌓아 둘러막고 그들에게 목전의 이해득실로써 달래고 성패成敗의 수로써 설명하여 저희가 스스로 오게 해야 됩니다. 성을 쌓는 것은 그 지방의 백성과 양곡과 목석으로 할 것이니 실제는 우리에게 손실이 없습니다” 하였다.

신장이 크게 기뻐하여 황금 10냥을 하사하고 등길랑에게 명하여 가서 성을 쌓으라 하였다.
등길랑은 자기 부하를 이끌고 주고로 향하더니 그 지방 민중을 이용하여 몇 달이 다 못되어 높은 성이 가로 놓이게 되어 튼튼한 철옹성이 일어났다.

등길랑의 힘으로 주고에 성을 쌓아서 청주성의 방어선이 완전하게 되니 직전신장은 등길랑에게 5백관의 녹을 주고 그 성명을 고쳐 목하수길木下秀吉(기노시타 히데요시)이라 하였다. 미농에는 소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목하수길의 주밀한 계획에 다 몰락이 되고 말았다. 손쉽게 미농 일대를 평정한 것은 수길의 노력이었다. 직전신장은 수길의 보수로 3천관을 주고 신장의 본영을 기부岐阜(기후)로 이동하였다.

직전씨의 영토가 미장과 미농을 합하여 1백 20만석이나 되었다. 인근의 소국 영주들이 두려워하여 속속 귀속하였다.

장곡長谷(하세) 성주 적택赤澤(아카자와)씨가, 신장이 매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관동산關東産 좋은 매를 구하여 보냈더니 신장은 매를 가지고 온 사자를 불러들여 하는 말이 “지금 천하가 소란하니 매 사냥을 할 수 있느냐. 나중에 내가 경도에 기를 꽂고 천하를 평정한 뒤에 매 같은 것은 찾을 때가 있을 것이다” 하고 매를 공중에 날려 보냈다.

영록 8년 1565년에 경도에서 내란이 일어나 장군 족리의휘와 원로 재상인 송영구수松永久秀(마쓰나가 히사히데)의 세력경쟁으로 장군의 신하 70여인이 살육을 당하고 장군 족리의휘도 죽었다. 이는 송영구수가 수리대부修理大夫 삼호의계三好義繼(미요시 요시쓰구)를 움직여 장군을 죽인 뒤에 실권을 잡으려 함이었다.

장군의 막내 동생 족리의소足利義昭(아시카가 요시아키)는 화를 피하여 시도3)지방의 화전유정和田惟政(와다 고레마사)의 집으로 망명하여 장군의 집을 부흥할 일을 도모하려 하는 판국이었다.

경도에 내란이 일어나 제후들이 소란하다는 소식을 들은 직전신장은 민활하게도 대군을 이끌고 올라가려 하는데 수길이 진언하되 “사방에 강적을 두고 영토를 떠나는 것은 대낮에 나서는 도깨비 셈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신장은 “그렇다면 싸워서 꺾어버려야 할까?” 하며 주저한다. 수길은 “아닙니다. 싸움을 피하고 교우하는 방책을 강구함만 못합니다” 하였다.

신장은 수길의 계획대로 갑주의 무전신현과 혼인을 맺어 월후越後(에치고)국4)의 상삼겸신上杉謙信(우에스기 겐신)을 제어하게 하였다. 무전신현의 서자와 신장의 딸이 결혼하였다. 그해 10월에 천황의 칙사가 비밀조칙을 전하고 은사전포5)를 하사하였다.

▲ 직전산장이 황목촌중과 화친한 뒤에 수길에게 명하여 모여든 제후의 군사를 치라 하였다. 사진은 나고야성에 전시돼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
그 칙서는 아래와 같다.

정이대장군 족리의휘가 화를 입어 사망한 뒤로 황실이 더욱 외롭고 위태한즉 경 직전신장은 충성을 다하여 황실을 호위하게 하라.

직전신장이 조칙을 받은 뒤로 경도로 상경할 뜻이 더욱 바빴다. 인근의 나라와는 거의 강화를 맺었으나 이세伊勢(이세)국6) 영주 북전?_(기타바타케)씨를 누르지 아니하고는 떠날 수 없었다. 부하 농천일익瀧川一益(다키가와 이치마스)으로 선봉을 삼고 북전씨를 토벌하였다. 북전씨는 신호7)의 용장 산로탄정山路彈正(야마지 단조)을 내세워 직전신장의 뒤를 견제한다.

신장이 수길에게 5천 군사를 주어 산로탄정의 영지인 고원성高原城을 에워싸니 성내의 산로탄정의 군사가 맹렬히 저항하여 6일간이나 혈전이 계속되었다.

하루는 수길이 갑주를 벗고 예복을 차리고 군사 3인만 데리고 성 아래에 이르러 사신이 왔다고 하였다.
산로씨는 성문을 열고 받아들이니 수길이 성내에 들어가 전쟁의 이해득실을 말하고 천하대세를 침착하게 설명하다가 직전신장이 조칙을 받고 상경하게 된 말을 한 뒤에, 북전씨에게 강화를 붙이라고 권고하였다.
산로탄정은 수길의 말에 고개가 숙여져서 화의가 성립되었다. “이세 지역 여덟 군은 영원히 북전씨의 영지로 정하고 직전씨의 국경에는 출병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약으로 결정하였다.

수길은 다시 주변국과 화친하는 방책으로써 직전신장에게 권고하여 강주江州(고슈)8)의 천정장정淺井長政(아자이 나가마사)에게 신장의 누이를 결혼시켰다.

천정장정은 근강近江(오미) 북방 다섯 군의 영주였다. 세세로 화목하자는 맹약을 맺었다.
이만하면 별로 염려가 없을 것 같아서 직전신장은 상경할 준비를 하는 중에 족리 장군의 아우 족리의소가 찾아왔다.

이는 신장의 부하 명지광수明智光秀(아케치 미쓰히데)의 계책이었다. 신장은 장군의 집 변란을 위문하고 족리의소의 관사를 성내에 있는 입정사立正寺로 정하여 주었다. 9월에9) 직전신장이 3만 군사를 거느리고 경도로 출발하였다. 군대의 위세가 실로 장관이었다. 떠난 지 7일만에 관음사觀音寺에 이르렀다.

경도의 원로재상 송영구수는 직전신장이 자기와 정적이 되는 장군의 집을 부흥시키려 함을 알고 육각六角(롯카쿠)씨를 매수하여 신장이 오는 길목에서 족리의소를 죽이기로 하여 화전산和田山 속에 매복을 하고 일야성10) 밑에 진을 펼쳤으나 수길의 솜씨에 전멸이 되었다. 도중에 이러한 일이 생긴 뒤로 수길이 선봉이 되어 경도에 들어왔다.

▲ 일본 텐도시의 인간장기는 옛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요토미 히데쯔구와 벚꽃이 만발한 후시미성에서 하인들을 장기 말로 세워 장기를 즐겼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1956년부터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전통행사다.
신장은 칙령으로 황궁에 들어갈 때에 은사전포를 입었다. 직전신장은 동복사東福寺에 주둔하고 족리의소는 청수사淸水寺에 들었다. 경도 주위에는 삼면 팔방으로 벌떼같이 제후의 군사가 모여드니 이는 원로대신 송영구수의 일파가 관음사에서 실패하고 각처 제후에게 격문을 날려 징병한 까닭이었다. 혹 1천기 혹 2천기, 많아야 3천기의 제후가 합 10여인이었다.

직전신장이 일일이 조사해보고는 그 중에 이기尼崎(아마가사키) 영주 황목촌중荒木村重(아라키 무라시게)의 병력이 가장 강하다는 말을 듣고 수길을 보내 강화하기를 청하였다. 황목씨는 수길의 조리 밝은 말에 복종하여 수길을 따라 경도에 들어왔다. 직전신장이 황목촌중을 환영하여 연회를 열어 대접하였다.
신장이 칼끝에 떡을 찍어내어 밀었다. 황목촌중은 놀라는 기색이 없이 입을 벌리고 칼끝의 떡을 받아먹었다. 모두가 그 담대함에 놀랐다.

칼에 찍힌 떡을 어찌 입으로 받느냐고 사람들이 묻자 촌중은 답하되 “내가 만일에 입으로 받지 않고 손으로 받았다면 신장의 칼이 내 목을 찔렀으리라” 하였다.

직전신장이 황목촌중과 화친한 뒤에 수길에게 명하여 모여든 제후의 군사를 치라 하였다. 수길이 경도 밖으로 출병하여 싸움을 시작하니 제후들은 강풍에 먼지 날듯 다 달아나고 말았다. 족리의소는 그 형 족리의휘의 뒤를 이어 정이대장군이 되었고, 족리의소는 직전신장의 공을 천거하여 신장은 정이부장군이 되었다. 수길이 비밀히 직전신장에게 말했다.

“전일에 경도로 모여들었던 제후들이 흩어졌으나 우리가 만일 기부로 돌아가고 보면 새로 또 모여들 것입니다. 이는 쥐를 잡지 않고 쥐구멍에 몰아넣은 셈이니 혹시나 틈만 있으면 또 나올 것이 뻔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경도를 떠났다가 제후들이 또 모여들거든 그 때에는 아주 잡아서 후환을 근절시켜야 합니다.” 신장이 수길의 말을 따라 일단 기부로 돌아갔다.

그러자 경도에서는 과연 송영구수의 일파가 근기 지방의 제후를 불러들여 족리의소의 관저를 침범하였다. 족리의소는 황목촌중의 도움으로 제후의 군사를 물리쳤다. 직전신장이 다시 경도에 올라와 금번에 출병한 제후들에게 벌금을 징수하여 황궁과 장군의 관사를 중수하고 기부 근방의 십여 소국을 병탄한 뒤에 준하의 덕천가강과 갑주의 무전신현을 불러 올려 장군의 관사에서 군사회의를 열고 수백년 동안에 황실을 잊어버린 제후들을 토벌문죄하자 하니 덕천가강은 순종하고 무전신현은 불응한다.

신장은 남이야 듣든 말든 지방에도 출병하기로 주장을 세웠다.직전신장이 자기의 군사를 10만이라 칭하고 목하수길을 선봉을 삼고 명지광수를 길잡이 삼아 조창朝倉(아사쿠라)을 향하여 월전越前(에치젠)국11)을 정벌하였다.

신장이 후목朽木(구치키) 계곡의 좁은 길목에서 복병을 만나 곤경을 당하고 수길은 고도高島(다카시마) 산중에서 일규一揆(잇키)12)의 승군에게 포위되었다가 덕천가강의 구원으로 벗어났다. 신장과 합하여 경도로 회군하는 길에 대기大寄(오요세)산 아래에 머물러 밤을 지내더니 돌연히 산속에서 화광이 충천한다.

직전신장이 제장을 모아 산불을 가리키며 “저 산속에 적군이 있는 것이 분명하니 내일에는 전쟁할 준비를

 

 해야지” 한다. 덕천가강은 “내일 새벽에 일찍 출발해야 되겠소” 하고, 다른 제장은 모두들 “싸우러 갈 것이 아니라 여기 있으면 저희들이 올 것이오” 하는 것을, 수길은 “아니오. 아까 화광이 일 때에 적군이 그곳에서 도망하였으니 지금 곧 추격해야만 하오!” 말하고 강청하여 야반에 행군하여 과연 (((자천 ??))) (아네가와)에서 적군을 추급하여 대전쟁이 일어나서 크게 승전하였다.

강주의 천정장정과 갑주의 무전신현의 무리가 다 혼인관계로 맺어진 우의를 집어던지고 신장을 대항하며 사국四國(시코쿠)의 장종아부원친長宗我部元親(초소카베 모토치카)과 구주九州(규슈)의 대우大友(오토모)씨와 도진島津(시마즈)씨를 비롯하여 동쪽의 북조北條(호조)씨와 서쪽의 모리毛利(모리)씨와 북쪽의 상삼上杉(우에스기)씨가 모두 신장에 반항하는 기를 들고 일어섰다.

또 경도의 송영松永(마쓰나가)씨와 삼호三好(미요시)씨의 무리가 합세하여 대판大阪(오사카) 본원사本願寺(혼간지)에 본영을 두었다. 본원사의 승군은 외부로 각처 제후의 응원이 있고 내부로 장군 족리의소까지 가담되어 있었다. 신장은 본원사의 승군을 치는 것이 각처 제후를 한목에 치는 셈이라 하여 신장의 대군이 대판에 이르러 야전野田(노다)성, 복도福島(후쿠시마)성을 공략하고 예산叡山(에이잔)13)을 에워쌌다. 아까운 삼천 암자가 일조에 전쟁으로 인하여 잿더미가 될 모양이다.

전쟁은 지구전으로 되었다. 산중의 승군들은 양식이 끊어지고 백설이 내려덮어 굶주림과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 돌연히 장군 족리의소가 진중에 들어와 천정장정 등 모든 장수들을 불러내어 강화를 붙인다. 신장은 장군의 권고를 어기지 못하여 화해하기를 허락하고 수길에게 뒷일이 어찌 될 형편인지를 물었다.
수길은 말하되 “장군 족리의소가 승군과 내응이 된 것이 후환이 적지 않을 것이니, 방비할 대책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하였다.

강화한 이듬해14)봄에 산중에 눈이 풀리니 승군의 형세가 다시 일어나 전쟁을 시작한다.
오기칠도15)에서 응하는 승군이 실로 10만이었다. 일규에 가담한 승군 7만은 직전신장의 본영인 기부로 향하는데 승군의 용장 금강방金剛坊(곤고바)16)은 신장 7척이요 활쏘기로 이름났으며 20인의 역량을 겸한 역사이다.

신장과 수길은 방어하기에 골몰하다가 결국에는 승군을 대파하고 예산을 불질러 3만 승군과 3천 암자를 모조리 태워버렸다. 직전신장은 수길에게 각처 제후를 대적할 방책을 물었다. 수길은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하여 승군에게 내응하고 제후들을 충동하는 장군 족리의소를 먼저 처치하십시오” 하였다.

족리의소는 신장의 힘으로 장군의 집을 회복했으나 장군이 된 뒤로는 도리어 신장의 세력을 시기하여 승군을 이용하다가 승군이 패망한 뒤로는 각처 제후에게 연락하여 기부의 세력을 꺾으려 드는 것이었다.
갑주의 무전신현은 신장의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신현을 죽인 뒤에 장군의 관사를 포위하고 족리씨 일족을 살육하는 때에 수길이 진언하되 “우리가 장군을 시역하였다는 죄명을 쓰게 되면 아무 일도 못할 것이니 족리의소만은 죽이지 말고 쫓아 보내십시오” 하였다. 신장은 무릎을 쳐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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