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그램짜리 머리끈 인생만큼 무거웠다
1그램짜리 머리끈 인생만큼 무거웠다
  • 이윤찬 기자, 오상민 사진작가
  • 호수 388
  • 승인 2020.05.18 10:43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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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상인 변성호 사장

‘값싼’ 중국산 액세서리가 남대문을 덮친 건 2010년 이후다. ‘가성비’에서 밀려난 남대문 가게들은 줄줄이 쓰러졌고, 그중 일부는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 중국으로 떠났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던 그때, 패션머리끈의 원조 ‘아현사’ 변성호(48) 사장은 남대문에 남았다. ‘수십년 호흡을 맞춘 직원들과 우리만의 제품을 만드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곳곳에서 “싸게 만들면 그만인데 왜 그러냐” “고작 머리끈 만드는 주제에 애국하려는 건가”란 조롱 섞인 핀잔이 쏟아졌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변 사장의 선택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더스쿠프(The SCOOP)와 천막사진관이 변 사장을 만났다. 19번째 주인공이다. [※ 참고: 천막사진관은 코로나19 수칙을 지키면서 촬영했습니다.]

변성호 사장은 웃을 때 주름살이 깊게 잡힌다. 남대문 상인의 굴곡진 삶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변성호 사장은 웃을 때 주름살이 깊게 잡힌다. 남대문 상인의 굴곡진 삶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1장. 싸게 준다카대

“무슨 일이세요? 이 시간에.” 국제시장 김 사장의 전화가 걸려온 건 늦은 오후였다. 어지간해선 전화를 먼저 거는 법이 없는 이였다. 급한 용무가 있는 듯했다.

“변성호 사장, 아래께 보낸 샘플 함 봤나?” 하루에도 몇개씩 오는 샘플. 성호처럼 잔뼈가 굵은 장사꾼의 흥미를 끌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한번 볼게요.”
 
건조한 눈빛을 머금은 성호는 조잡하게 포장된 상자를 열었다. 머리끈 4종류가 담겨 있었다. 엄지와 검지를 비벼 질감을 확인한 성호는 ‘늘였다 놨다’를 반복했다. 나쁘지 않았다. 질감은 부드럽고, 끈은 팽팽했다.


“어느 집 물건이지?” 성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머리끈을 만든 지 15년. 촉감만으로 생산처를 알아맞히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하물며 중국산 제품을 솎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이번엔 달랐다. 어느 가게에서 만들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김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샘플, 괜찮은데요. 어느 집 거예요?” “그기 이따아이가….” 김 사장의 사투리가 진해졌다. “중간 유통상에게 받았는데 중국끼다. 정말 싸게 준다카대. 어떻노?”
 
중국산이라…. 성호가 담배 끝을 눌러 씹었다. 고민이 깊어질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후~’. 매캐한 담배 연기가 눈을 가렸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2013년 2월, 남대문 시장에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변성호 사장은 하루에도 수백개의 머리끈을 정리하고 진열한다. 그래서 머리끈만 만져봐도 어디 제품인지 알 수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변성호 사장은 하루에도 수백개의 머리끈을 정리하고 진열한다. 그래서 머리끈만 만져봐도 어디 제품인지 알 수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남대문의 하루는 새벽에 시작된다. 아직 동이 트기 전, 변성호 사장이 가게로 제품을 옮기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남대문의 하루는 새벽에 시작된다. 아직 동이 트기 전, 변성호 사장이 가게로 제품을 옮기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2장. 남대문과 먹구름

2010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산 머리끈의 질은 형편없었다. 질감은 거칠고, 색은 선명하지 않았다. 탄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한번 세게 당기면 너덜너덜해졌다. 하지만 그날 만져본 중국산은 달랐다. 마무리가 조잡한 것 빼곤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더 무서운 건 원가였다. 남대문의 20% 수준이었다. 성호는 떨칠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러다 다 죽을 수도 있겠는데….’ 
가뜩이나 며칠 전 들었던 옆집 사장의 말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변 사장 혹시 들었어? 최 사장도 중국으로 넘어간대. 인건비 때문에 고민하더니, 그냥 중국산 팔 건가 봐.”

성호가 이런 흐름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그도 중국행을 고민했었다. 2011~2012년 중국에 세차례나 다녀왔다. 그때마다 성호에게 밀려든 건 ‘섬뜩함’이었다. 칭다오靑島‧이우義烏의 장대한 액세서리 시장은 남대문의 ‘끝’을 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성호는 머뭇거렸다. 여러 갈피로 흩어진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러다 타이밍을 놓친다’며 답답해했다. 값싸게 만들어 쉽게 내다 팔 수 있는데, 그걸 왜 마다하느냐는 거였다. 술자리에선 ‘주제넘게 애국하려는 거냐’는 핀잔도 들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원가를 낮추는 건 장사의 기본이었다. 애국, 이 역시 장사꾼이 품기엔 거창한 말이었다. “변 사장, 내 말 듣꼬있나. 어허 참.”

고민에 빠진 성호의 귀에 김 사장의 사투리가 사납게 꽂혔다. “나도 인자 중국산 받을라칸다. 니한테 미안해서 우짜노.” 성호의 미간이 구겨졌다. 두려움과 짜증이 눈가에 잡힌 주름살을 파고들었다.   

남대문 액세서리는 값싼 중국산이 등장한 이후 입지를 잃었다. 변성호 사장은 그래서 더 바쁜 하루를 보낸다.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다. 어두운 차 안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변 사장의 지금 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다. [사진=오상민 작가]
남대문 액세서리는 값싼 중국산이 등장한 이후 입지를 잃었다. 변성호 사장은 그래서 더 바쁜 하루를 보낸다.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다. 어두운 차 안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변 사장의 지금 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다. [사진=오상민 작가]

#3장. 걷다 보니 가시밭이었다 

아현사. 남대문에서 가장 오래된 머리끈 가게 중 한 곳이다. 1985년에 설립했으니, 햇수로 35년이 넘었다. 전통의 가게답게 원조도 많다. 머리끈에 ‘무늬’를 처음 넣은 집이 바로 아현사다. 머리끈을 ‘종이판’이 아닌 ‘둥근 통’에 넣어 유통한 곳도 여기다. 

아현사의 사장은 변성호씨다. 아버지에 이어 2대째다. 사장은 ‘대代’가 바뀌었지만 제품은 그대로다. 35년째 머리끈만 제조‧유통하고 있다. 해외에 수출도 한다. 이젠 남대문에서도 희귀해진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들이다. 

숱한 가게들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줄줄이 중국으로 넘어갈 때, 아현사는 남대문에 남았다. 변 사장은 ‘중국으로 가는 것보단 수십년 함께 일했던 공장 직원들과 손을 맞추는 게 훨씬 낫다’고 판단했다. 

거창한 포부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메이드 인 코리아, 애국, 작은 수출 일꾼….  그런 거 아니에요. 전 장사꾼이에요. 10원짜리든 20원짜리든 ‘내 제품’을 만들어 손님에게 주고 싶은 장사꾼이요.” 

변성호 사장이 남대문 아현사 가게 문을 열고 있다. 아현사는 35년째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사진 위]. 주문 들어온 물량을 정리하고 있는 변성호 사장. [사진=오상민 작가]
변성호 사장이 남대문 아현사 가게 문을 열고 있다. 아현사는 35년째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사진 위]. 주문 들어온 물량을 정리하고 있는 변성호 사장. [사진=오상민 작가]

하지만 남대문에 남은 결과는 초라하다. ‘가성비’로 무장한 중국산이 남대문을 덮치면서 매출이 고꾸라졌고, 거래처는 쪼그라들었다. 솜씨 좋은 직원들도 공장을 떠나야 했다.
 
비난의 화살은 변 사장에게 쏠린다. “남들 다 갈 때 중국으로 떠났어야지” “그놈의 고집 때문에 제명을 재촉했다” 등등이다. 어쩔 땐 “머리끈 만들면서 얼어 죽을 내 제품이고 국산인가”라는 조롱을 듣기도 한다.

변 사장은 왜 가시밭길을 선택한 걸까. 한참 뜸을 들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가시밭길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저 걷다 보니 가시밭길에 들어선 거죠. 왜 하찮은 제품에 목숨 거냐고요? 별것 아니에요. ‘내 제품’을 만들 때 짜릿함은 장사꾼이 아니면 몰라요. 그건 값의 문제가 아니에요. 자존심의 문제죠.”
 
변 사장이 낡은 의자에 앉았다. 5㎡(약 1.5평) 남대문 가게에 고요함이 깔렸다. 저 멀리 창문에서 포근한 햇빛이 감겨들었다. 순간, 클래식 기타를 치고 있는 26살 성호가 오버랩됐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다. 1998년 봄, 어느 날이었다.

#4장. 잔혹한 대물림
 
“어~ 나 왜 이러지.” 어머니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건 찰나였다. 뇌출혈이었다. 1995년 가을. 성호가 군에서 제대한 직후였다. 예후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몸을 가누지 못했다.

간호는 성호의 몫이었다. 말도, 행동도 서툴러진 어머니와의 3개월, 텅 빈 집에서 성호는 취미였던 ‘클래식 기타’를 쳤다. 무료해서가 아니었다. 아픈 어머니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고 싶었다.
 
어머니는 조금씩 반응했다. 선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소를 품는 일이 잦아졌다. 성호는 낯선 설렘을 느꼈다. 기타로 누군가를 보듬을 수 있다는 걸 깨쳤기 때문이었다.
 
한참이나 ‘꿈이 없었던’ 성호에겐 신기한 경험이었다. 남몰래 클래식 기타를 배웠다. 자신처럼 희망을 찾지 못한 청춘을 위해 ‘악사樂士’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타고난 재주도 있었다. 손이 빠르고, 곡 해석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2년여. 성호는 ‘하던 일(유통업)’을 그만뒀다. 클래식 기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때마침 독일 음악원에 유학 갈 수 있는 길도 열렸다. 20대 중반에 어렵게 찾아온 기회였다.

성호는 절박했고, 망설이지 않았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술집 대리운전, 막노동 등 거친 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새벽까지 대리운전을 뛰어도 ‘레슨’만은 빼먹지 않았다.
 
1998년 3월. 그날 오후에도 성호는 기타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번 여름에 독일로 떠나기로 했다. 새벽녘까지 운전대를 붙잡았지만 쉴 겨를이 없었다. “따르릉! 따르릉!” 기타 학원의 전화벨이 울린 건 그때였다.

클래식 기타리스트의 꿈은 현실에 묻혔지만 변 사장은 여전히 음악을 좋아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클래식 기타리스트의 꿈은 현실에 묻혔지만 변 사장은 여전히 음악을 좋아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성호씨, 전화받아봐. 형이래.” 남대문 아현사에서 근무하는 세 살 터울의 형이었다. “오늘 소주 한잔할까.” 원체 말이 없는 형이었다. 그런 그가 전화를 걸었다는 건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날 밤 선술집에서 만난 형은 낙담한 듯 보였다. 소주만 거푸 마셔댔다. “네가 일을 도와줘야 할 것 같아.” 예상하지 못했던 말, 성호는 당황스러웠다. “형, 내 꿈이 뭔지 알잖아.”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소주 한 잔을 더 들이켠 형이 정적을 깼다. “공장장이 나간대.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돈을 맞추기 힘들어. 빚이 너무 많아. 네가 필요해.”

아픈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 꼭 3년 전이었다. 형도 어쩔 수 없이 꿈을 버리고 아현사를 맡았다. 아버지가 벌였던 사업이 문제를 일으킨 탓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가 쓰러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성호가 소주 한잔을 마셨다. 독한 기운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잔혹한 대물림’이 속을 태우고 있었다.

#5장. 꿈이 묻혔다
 
아버지는 속칭 ‘나까마(仲間)’였다. 일본 말로는 동료란 뜻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중간 상인’이란 의미로 썼다. 도매상에서 물건을 떼다 소매상에 연결하는 일이었다.

1970년대 나까마들의 꿈은 버젓한 가게를 얻는 거였다. 
아버지는 쉼 없이 일했다. 더 좋은 물건을 떼기 위해 정신없이 발품을 팔았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마련한 가게가 아현사였다. 1985년 성호가 열세살 때였다. 

아현사는 구멍가게가 아니었다. 당시 아현사처럼 로고와 심벌이 있는 가게는 남대문서도 드물었다. 아버지가 한 우물을 팠더라면 성호네 가족은 곡절曲折을 겪지 않았을지 모른다. 

변 사장은 아현사를 혼자 이끈다. 남대문 가게와 수유리 공장을 혼자 오가야 하기 때문에 하루가 짧다. [사진(위)=오상민 작가] 주문 들어온 제품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것도 변 사장의 몫이다. 그래서인지 변 사장은 습관처럼 메모한다.[사진=오상민 작가]
변 사장은 아현사를 혼자 이끈다. 남대문 가게와 수유리 공장을 혼자 오가야 하기 때문에 하루가 짧다. [사진(위)=오상민 작가] 주문 들어온 제품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것도 변 사장의 몫이다. 그래서인지 변 사장은 습관처럼 메모한다.[사진=오상민 작가]

하지만 호황기였던 1980년대엔 벌이는 게 능사였다. 아버지도 남들처럼 욕심을 부렸다. 건설업‧유통업으로 일을 벌였다. 그러자 돈 냄새를 맡은 이들이 불나방처럼 꼬여 들었고, 아버지는 재산을 잃었다. 1990년대 들어선 아현사의 기둥뿌리마저 휘청였다.

그때 가게를 맡겠다고 나선 이가 형이었다. 어릴 때부터 기계만 좋아했던 그였다. “기계를 바닥부터 배우겠다”며 대학을 중퇴하고 철공소에 취업했을 정도였다. 그랬던 형이 체질에도 안 맞는 장사꾼이 된 건 ‘운명의 장난’이었다.
 
선술집에서 헤어진 그날, 형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성호의 속도 시끄러웠다. 다음날 중요한 레슨이 있었지만 기타를 잡지 못했다. 형의 검은 낯빛과 아현사의 초라한 현실이 번갈아 떠올랐다. 
이젠 결정해야 했다. 성호가 불을 껐다. 빛이 사라진 방을 어둠이 채웠다. 기타가 어둠에 묻혔다. 꿈이 따라 묻혔다.

변 사장은 클래식 기타리스트란 꿈을 접었지만 희망까지 놓친 않았다. [사진=오상민 작가]
변 사장은 클래식 기타리스트란 꿈을 접었지만 희망까지 놓친 않았다. [사진=오상민 작가]

#6장. 빚의 질긴 사슬
 
꿈을 연주하던 그곳과 현실을 거래하는 시장은 달랐다. 새벽 5시면 시장밥만 수십년 먹은 도매상들과 흥정해야 했다. 공장은 공장대로 바빴다. 납품‧수출‧재고물량이 뒤섞여 돌아가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매출이 나쁘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문제는 빚이었다. 벌어들인 만큼 빚으로 빠져나갔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면서 사업을 또 벌였지만 그때마다 빚이 불어났다. 지독한 악순환이었다.
 
그렇게 5년여, 유학을 함께 준비했던 친구는 클래식 기타리스트가 됐고, 성호는 장사꾼이 됐다. 얄궂은 운명의 사슬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왜 억울하지 않았겠어요. 그래도 현실이 먼저였어요. 선택했으니 꿈을 짓눌러야 했죠.”    

현실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빚은 야속하게 형의 건강까지 잡아먹었다. ‘간경화’였다. 빚을 갚아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이 ‘격무激務’를 불렀고, 끝내 몸이 부서졌다.
 
모든 짐은 성호의 어깨로 넘어왔다. 형을 대신해 아현사를 맡아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황까지 썩 좋지 않았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문제가 터졌다. 말 많던 중동 상인들이 분쟁을 일으킨 것도 하필 그때였다.

“변 사장, 큰일 났어. 중동 녀석들이 우리 브랜드로 장난을 치고 있어.” 무역상 박 대표가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온 건 2004년 7월, 유난히 후텁지근한 날이었다.

머리끈을 붙여 유통하던 종이판. 하단에 아현사의 초기 로고와 심벌과 함께 MADE IN KOREA란 글씨가 적혀 있다. 지금은 남대문에서도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은 희귀해졌다. 변 사장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머리끈을 붙여 유통하던 종이판. 하단에 아현사의 초기 로고와 심벌과 함께 MADE IN KOREA란 글씨가 적혀 있다. 지금은 남대문에서도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은 희귀해졌다. 변 사장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7장. “왜 무늬가 없나요”

먹구름이 내려앉은 하늘에선 어제도 ‘실비’만 내렸다. 소나기라도 한바탕 쏟아지면 좋으련만…, 성호는 여름의 습함이 싫었다. 가뜩이나 할 일이 태산인데, 진이 더 빠지는 것 같았다. 무역상 박 대표의 전화를 받은 건 찬물로 세수를 한 직후였다. “현지 근무자한테 연락이 와서 가봤어. 그랬더니 말이야.”

박 대표는 씩씩거렸다. 분이 풀리지 않는 듯했다. 
“그놈들이 중국산에 아현사 로고를 떡하니 붙여놓고 팔고 있더라고. 중국 애들과 거래를 텄던 모양이야. 계약 위반이라고 따졌더니 배짱을 부리더라고. 거래를 끊겠다면서.”

하~. 성호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방금 전 세수를 했지만 얼굴은 어느새 달아올라 있었다. 큰일이었다. 중동 수출 물량만 월 2000만~3000만원어치였다. 이 정도 물량이 빠지면 아현사로선 ‘축대’ 하나를 잃는 셈이었다. 계산이 빠른 중동 상인이 마음을 쉽게 돌릴 것 같지도 않았다. 중국이란 뒷배가 있으니 배짱을 부리는 게 분명했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머리끈 하나에 딸린 식구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성호는 그날부터 아현사의 낡은 샘플북을 샅샅이 뒤졌다. 아버지와 형이 미처 제품으로 만들지 못했던 아이디어가 있는지도 살폈다.  

그러길 두달여, 그날도 샘플북을 뒤적이던 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소한 질문이 문득 떠오른 탓이었다. 직원들에게 물었다. “머리끈엔 왜 무늬가 없나요?”  

직원들은 서로를 멀뚱하게 쳐다봤다. 경력 20년 차 직원도 답을 하지 못했다. 이유는 어쩌면 간단했다. 그들에게 머리끈은 처음부터 ‘그냥 민짜’였기 때문이었다. 고정관념, 거기에 답이 있었다. 

혁신은 때론 사소한 곳에서 시작된다. 고정관념을 버리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혁신은 때론 사소한 곳에서 시작된다. 고정관념을 버리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8장. 깨알 같은 혁신들

“사소한 것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 조나단 티슈-
  

모든 혁신이 파괴적일 필요는 없다. 혁신은 때론 하찮은 데서 싹트고, 승부는 작은 데서 갈린다. ‘사소함’이 세상을 바꾼 사례도 많다. 
만년필을 시장 외곽으로 밀어낸 ‘모나미153’의 구조는 헤드‧몸체‧노크(버튼)‧스프링‧볼펜심 다섯개에 불과했다.

의류업체 폴로(POLO)는 ‘1인치에 반드시 여덟땀의 바느질을 떠야 한다’는 사소한 규정 하나로 세계를 평정했다. 
무게가 1그램(g)에 불과한 머리끈에도 작은 혁신이 숨어 있다. 머리끈의 강도를 결정하는 ‘깡(매듭장치)’은 단 1㎜ 차이로 품질이 달라진다.

초기 중국산 머리끈의 ‘깡’이 쉽게 풀렸던 건 ‘1㎜의 비밀’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접착제로 머리끈의 끝과 끝을 붙이는 기술도 마찬가지다. 한때 특허였던 이 기술의 비밀은 접착물질의 ‘사소한 배합’에 있었다.

아현사는 머리끈을 국내 최초로 투명한 통에 넣어 유통했다. 상인들은 이를 통고무줄이라고 불렀다(사진 위). 머리끈은 원단의 끝과 끝을 붙여 동그랗게 만든다. 이를 접착하는 기술은 한때 특허였다(사진 아래 왼쪽). 머리끈을 매듭지어주는 장치를 상인들은 ‘깡(금색)’이라고 부른다. 깡의 품질은 1㎜ 차이로 결정된다. [사진=오상민 작가]
아현사는 머리끈을 국내 최초로 투명한 통에 넣어 유통했다. 상인들은 이를 통고무줄이라고 불렀다(사진 위). 머리끈은 원단의 끝과 끝을 붙여 동그랗게 만든다. 이를 접착하는 기술은 한때 특허였다(사진 아래 왼쪽). 머리끈을 매듭지어주는 장치를 상인들은 ‘깡(금색)’이라고 부른다. 깡의 품질은 1㎜ 차이로 결정된다. [사진=오상민 작가]

성호도 작은 데서 해법을 찾았다. ‘무늬’였다. ‘머리끈=민짜’란 고정관념을 깨니 혁신 제품이 탄생했다. 밋밋한 머리끈에 무늬를 프린팅한 ‘패션머리끈(2005년)’이었다. 대박이었다. 남대문을 넘어 중국 시장까지 흔들었다.

혁신은 또 다른 혁신을 불렀다. 아현사는 예쁜 무늬를 강조하기 위해 패션머리끈을 ‘투명한 통’에 넣어 유통했는데, 빅히트를 쳤다. 상인들은 이를 ‘통고무줄(2006년)’이라 불렀고, 아현사의 시그니처가 됐다.

패션머리끈과 통고무줄은 중동에서 빠진 물량을 메꾸는 데 큰 몫을 했다. 전국 재래시장에 ‘아현사가 만들면 다르다’는 인식이 퍼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아현사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숱한 카피 제품이 금세 원조를 밀어낸 탓이었다. 아현사의 밑단을 흔드는 더 무서운 바람도 있었다. 값싼 중국 제품이었다. 위기는 2010년께 시작됐다.

#9장. 눈물도 미안했다

원가는 턱없이 쌌다. 아현사의 5분의 1밖에 안 됐다. 품질도 썩 괜찮았다. 살짝만 힘을 줘도 맥없이 끊어지던 그때 그 중국산이 아니었다. 2010년 이후 5년여, 아현사는 바짝 쪼그라들었다. 중국산의 물량 공세를 이겨내지 못했다.

때마침 등장한 ‘온라인몰’도 아현사를 벼랑으로 밀어냈다. 5년 새 일곱명을 해고했다. 이제 남은 직원은 두명. 그마저도 일감이 없어 ‘순환 근무’를 해야 했다. 

남대문의 위기가 시작된 건 값싼 중국산이 본격 유통된 2010년께였다[사진 위]. 아현사가 처음 내놓은 통고무줄은 ‘머리끈’의 디스플레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소한 아이디어였지만 남대문 시장에선 혁신으로 불렸다. [사진=오상민 작가]
남대문의 위기가 시작된 건 값싼 중국산이 본격 유통된 2010년께였다[사진 위]. 아현사가 처음 내놓은 통고무줄은 ‘머리끈’의 디스플레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소한 아이디어였지만 남대문 시장에선 혁신으로 불렸다. [사진=오상민 작가]

“변 사장, 오늘 저녁 어때?” 남은 직원 중 한명인 김 반장이 저녁 식사를 청한 건 2015년 1월이었다. 그간 무심했다. 식사를 함께한 게 어느덧 두어달 전이었다. 내심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해답을 찾지 못하는 무능한 사장 같아 창피했다. 성호는 멋쩍게 답했다. “날씨가 춥네요, 매운탕 어때요?”  

식사가 끝날 무렵, 김 반장이 말을 건넸다. “변 사장 요즘 힘들지?” “그렇죠, 뭐….” 성호의 답을 들은 김 반장은 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놨다. 

“일감이 줄었는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영 그래. 바깥양반 도울 일도 있고. 내가 나가는 게 맞는 것 같아.”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속도 깊었다. 아무리 고돼도 인상 한번 찌푸리는 법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그랬다.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낸 그날도 김 반장은 성호의 등을 토닥였다. 욕이라도 한 바가지 먹었으면 마음이라도 편했을지 모른다. 

성호는 견딜 수 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혔다. 벌써 여덟명째였다. 남은 직원은 1명뿐이었다. ‘솜씨 좋은 직원들과 호흡을 맞추겠다’면서 남대문에 남았지만 돌아온 건 ‘잔혹한 실패’였다.
 
성호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유행에 뒤처졌고, 젊은 사람들의 감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중국 제품과 온라인 유통몰의 힘을 얕잡아 본 것도 패착이었다.
 
그날 밤 성호는 공장에 홀로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왁자지껄했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전구의 약한 불빛이 낡은 가위를 비췄다. 
손잡이를 칭칭 감아놓은 헝겊에 손때가 묻어있었다. 직원들이 쓰던 가위였다. 성호는 입을 막은 채 눈물을 흘렸다. 울음소리를 내는 것도 미안했다.    

아현사의 직원들이 사용하던 도구들. 가위는 변 사장의 아버지 때부터 사용해온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아현사의 직원들이 사용하던 도구들. 가위는 변 사장의 아버지 때부터 사용해온 것이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10장. 끝날지 모를 봄꿈

100개가 넘던 아현사의 거래처는 20여개로 줄었다. 흥겨운 웃음이 넘실대던 공장엔 ‘적막’이 가득하다. 머리끈을 자르던 가위엔 야속한 세월이 묻어있다. 

국산을 고집하던 변 사장도 조금 달라졌다. 어쩔 수 없이 타협점을 찾았다. “값싼 중국산을 보내주면 거래를 유지하겠다”는 몇몇 중간상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제 10%쯤 중국산을 취급한다.

그렇다고 한 줄기 희망마저 사라진 건 아니다. ‘아현사 제품은 믿고 산다’는 상인들은 여전히 많다. 개중엔 ‘가격 신경 쓰지 말고 이전처럼 제품 잘 보내달라’며 응원하는 이들도 있다. ‘내 제품을 만들겠다’는 변 사장의 고집이 세대를 잇는 ‘헤리티지’를 만들어낸 거다. 

어두운 골목길을 한줄기 햇살이 비친다. 어둠 속에 빛이 존재하듯 변성호 사장은 오늘도 아현사의 희망을 찾는다. [사진=오상민 작가]
어두운 골목길을 한줄기 햇살이 비친다. 어둠 속에 빛이 존재하듯 변성호 사장은 오늘도 아현사의 희망을 찾는다. [사진=오상민 작가]

신제품도 계속 내놓고 있다. 지난해 출시한 ‘진주방울 머리끈’은 재래시장에서 반응이 좋다. 기존보다 2㎜ 이상 두꺼운 끈을 사용해 ‘착용감’을 개선했다. 이번엔 중국산과 맞서기 위해 높은 제작 단가에도 ‘도매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지금도 애써 만들지 말고 중국산 팔라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럼 편하긴 하겠죠. 하지만 더 물러설 순 없어요. 아무리 별것 아닌 제품이라도 만드는 사람까지 하찮게 다뤄선 안 되니까요. 가벼운 머리끈이 제겐 인생만큼 무거운 이유예요.” 

변 사장이 머리끈을 손가락에 걸었다. 1g짜리 머리끈에 ‘희망’이란 녀석이 힘겹게 매달렸다. 성호가 웃었다. 주름살이 잡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봄꿈’이 펼쳐지고 있었다.  

글=이윤찬 더스쿠프 기자
chan4877@thescoop.co.kr

사진=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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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2020-05-29 16:00:18
소매도 하시나요? 인터넷몰이 있으면 구매할텐데, 네이버에 '아현사'로 검색해도 이 기사밖에 나오지 않네요.

이선주 2020-05-21 14:45:20
글 잘 읽었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오늘도 힘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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