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식스 센스 ❸

샤말란 감독이 보여주는 ‘반전反轉’이 극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선과 악, 좋고 싫음의 반전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반전이기 때문은 아닐까. 삶과 죽음처럼 극적이고 본질적인 변화는 달리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샤말란은 죽었는데도 죽었는지 모르는 말컴 박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죽은 자가 죽기를 거부하면 참 딱하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죽은 자가 죽기를 거부하면 참 딱하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관객들은 주인공 말컴 박사를 ‘산 사람’으로 생각하고 그의 동선을 따라 함께 움직이고 그의 언행을 분석하고 또 공감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샤말란 감독은 말컴 박사가 산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인데 ‘몰랐냐?’며 관객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한다. 지금까지 죽은 사람을 따라다니고, 죽은 사람과 공감했다는 것이 문득 당황스럽다. 그를 따라다닌 관객 역시 죽었다가 깨어난 듯한 느낌이다.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는 우울한 꼬마 콜은 자신을 상담하는 말컴 박사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자신에게는 죽은 사람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말컴 박사는 콜의 고민을 정신분열증 환자의 병세로 간주하고 ‘진지한 척’ 받아준다. 콜은 자신이 관찰한 ‘죽은 사람들의 특성’을 들려준다. 첫째, 죽은 사람은 자신이 죽은 줄 모른다. 둘째, 죽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셋째, 죽은 사람들끼리는 서로 보지 못한다.

죽은 사람을 만나면 자신도 죽었다는 것을 눈치챌 텐데 그러지도 못한다. 아마도 콜의 말을 믿었다면 일찌감치 혹시 자신도 죽은 것이 아닌지 의심해 보았을 법하지만, 말컴 박사는 그런 ‘가설’을 설정해 볼 생각도 않는다. 대개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의사인 말컴 박사는 특히나 환자의 상태만 의심할 뿐, 자신의 상태엔 추호의 의심조차 없다.

말컴 박사가 ‘산 사람’이었다면 자신에게 말 한마디는커녕 눈길조차 안 주고 돌아누워 계속 눈물만 흘리는 아내에게 말이라도 걸었을 것이다. 결혼기념식 날 식당에서도 말 한마디, 눈길 한번 없이 혼자 계산하고 나가버리는 아내를 향해선 ‘왜 그러느냐’고 물어봤을 게 분명하다. 

 

말컴 박사는 ‘죽었지만’ 자신이 ‘죽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한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말컴 박사는 ‘죽었지만’ 자신이 ‘죽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한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러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죽은 사람인 말컴 박사는 그저 아내가 아직도 자신이 환자의 원한을 사서 총격을 당한 충격과 실망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한다. 콜의 집을 방문했을 때, 콜의 엄마가 아들을 돌보는 자신을 본체만체하는 기이한 상황도 그저 콜의 엄마가 상심이 깊어서 그런다고 생각한다.

콜이 들려주는 ‘죽은 사람’의 특성은 꿈속의 상황과 유사하다. 꿈속에서는 결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또한 아무리 황당하고 기이한 상황이라도 의심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믿고, 생각하는 대로 믿는다.

생각해 보면 말컴 박사만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우리 주변에도 수많은 말컴 박사가 있다.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4·15 총선 이후 상황은 ‘식스 센스급’ 반전을 보여준다. 유권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미 죽은 정치인들과 정당들이 죽은 이념, 죽은 가치를 안고 자신들이 아직 살아있는 양 돌아다니고 열변을 토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신들이 살아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개표 부정, 총선 무효를 외치는 세력이 등장했다. [사진=뉴시스]
개표 부정, 총선 무효를 외치는 세력이 등장했다. [사진=뉴시스]

죽은 사람이 눈에 보이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콜처럼, 통찰력 있는 학자나 비평가들이 ‘너 이제 죽을 때가 됐거나, 아니면 이미 죽은 것 같다’고 완곡하게 말해줘도 당황하거나 ‘혹시 내가 이미 죽은 것 아닌지’ 한번이라도 스스로를 돌아보는 걸 거부한다. 영화 속 말컴 박사는 그래도 콜의 조언에 따라 아내와 대화를 시도하고, 그제야 자신이 죽은 것을 확인한다. 그후 아내에게 ‘사랑했다’는 말을 남기고 섬광과 함께 순순히 ‘저승’으로 떠난다. 그러나 우리네 정치에서 몇몇은 여전히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다. 

자신이 이미 죽은 줄 몰랐던 우리네 몇몇 정치인들도 총선에서 자신들의 죽음을 확인했으면, 말컴 박사처럼 ‘정말 국민을 사랑했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나는 것이 아름다울 텐데, 이들은 떠나기를 거부하고 개표 부정, 총선 무효를 외친다. 팔십 노정객들도 은퇴를 선언하지 않는다. 죽은 자가 죽기를 거부하면 참 딱하다.

영화 속에서 말컴 박사에게 총격을 가한 소년 환자 그레이의 음성 녹음 속에, 그레이의 주변을 떠도는 죽은 자들의 어지러운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왜 하필이면 스페인어를 쓰는 귀신인지는 모르겠다.  “Yo no quiero morir… Yo no quiero morir… (나 죽기 싫어… 죽기 싫어…).” 산 사람이 죽기 싫다고 하는 것은 그러려니 하겠지만, 죽은 사람들이 죽기 싫다고 울부짖으면 섬뜩해진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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