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식스 센스 ❹

‘식스 센스’의 시작은 마지막의 반전만큼이나 강렬하다. 성공한 아동심리학자인 말컴 박사가 필라델피아 시장이 수여하는 ‘공로상’을 받고 돌아와 아내와 함께 와인을 곁들여 자축한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영화 속에서 지나치게 행복한 장면은 왠지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난데없이 치명적인 ‘대마大魔’가 등장한다.

내 주변의 누군가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면 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내 주변의 누군가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면 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대마는 과거에 말컴 박사가 상담치료를 맡았던 그레이라는 소년이다. 청년으로 성장한 그레이가 말컴 박사의 화장실에서 벌거벗은 채 울부짖는 표정으로 덜덜 떨며 총을 겨누고 있다. 말컴 박사가 심리상담 전문가답게 ‘진정하라’고 달래며 다가가지만, 그레이는 말컴 박사를 원망하고 저주하며 총을 발사한 후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레이를 치료하지 못한 게 말컴 박사의 역량이 부족해서였는지, 혹은 그가 의사로서 불성실해서였는지, 아니면 그레이의 정신질환이 ‘신도 고치지 못할 병’이었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레이는 자신의 모든 고통과 불행의 원인을 말컴 박사에게 돌려버린다. 신도 고치지 못할 ‘불치병’이었다면 의사가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말컴 박사가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역량이 미치지 못했다면 이 역시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혹시 말컴 박사가 불성실했거나 진단과 처방에 오류가 있었다 하더라도 쫓아가서 총으로 쏘아죽여도 좋을 만큼 비난받을 일은 아니겠다.

그레이가 왜 그토록 원망과 분노, 좌절감에 사로잡혔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자신의 문제는 해결해 주지 못한 말컴 박사가 아동심리학자로서 승승장구하자 원망과 분노가 달아오른 듯하다. 그렇기에 말컴 박사가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다’는 공로상을 받는 날 분노와 원망이 정점에 달해 폭발했을 것이다. 

그레이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총을 겨누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레이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총을 겨누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처럼 ‘상대적 박탈감(Relative Depri vation)’은 무척 고통스럽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저명한 역사사회학자인 월터 런시먼(Walter Runcimun)은 ‘상대적 박탈감’을 명료하게 설명한다. 첫째, 나는 ‘그것’이 없다. 둘째, 내가 아는 누구는 ‘그것’이 있다. 셋째, 나도 ‘그것’을 원한다. 넷째, 나도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 이 네 조건이 갖춰지면 나는 고통스럽고 분노하고, 세상과 누군가를 원망하게 된다.

누구나 행복하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레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이 역시 상대적이다. 혹여 행복하지 못하고 남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손 치더라도 내가 아는 사람 모두가 그렇다면 별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내가 잘 아는’ 말컴 박사는 아내와 더불어 와인 잔을 부딪치며 너무 행복하고, 아내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

말컴 박사는 ‘내가 겪어봐서 잘 아는데’ 그렇게 인정받을 만한 탁월한 의사도 아니다. 내 병도 못 고친 ‘돌팔이’에 지나지 않는다. 말컴 박사 정도가 행복하고 인정받는다면 나도 충분히 행복하고 인정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그런데 나만 불행하다. 이건 뭐가 잘못된 것이다. 참을 수 없다.

짐작건대, 그레이의 심리치료에 실패한 말컴 박사가 아동심리학자로 승승장구하지 못하고, 병원도 폐업하고, 사회의 한구석으로 밀려난 삶을 살고 있었다면 그레이가 그토록 분노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그레이가 말컴 박사의 집에 침입한 날 밤, 말컴 박사 부부가 그렇게 소파에서 그윽한 눈빛으로 와인잔을 부딪치며 포옹하고 있지 않고 소리소리 지르며 부부싸움이라도 하고 있었다면, 그레이의 분노 게이지가 내려가면서 슬그머니 사라졌을 수도 있다. 말컴 박사의 아내가 부부싸움 중에 혹시라도 부엌칼을 쥐고 말컴 박사를 찌르려고 했다면 오히려 그레이가 나서서 말컴 박사를 구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행복하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기준은 ‘상대적’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누구나 행복하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기준은 ‘상대적’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의 화려하고 행복해 죽을 것 같은 근황과 사진들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에 고통스러운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다. 소위 사회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을 향한 ‘미투’나 ‘빚투’, ‘학교폭력’에 대한 문제가 끊이질 않고 있다. 마치 말컴 박사의 집에 총 들고 쳐들어가는 그레이의 기세 같다. 하지만 문제 발단의 주인공인 ‘잘나가는’ 그들 대부분은 너무 까마득한 옛날 일이라 기억조차 희미하다고 말한다. 

내 주변의 누군가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곧 나에게 위험 신호가 울린 것이다. 이 세상 모두, 혹은 최소한 내가 아는 모두가 행복해지기 전까지는 내가 누리는 풍요와 행복은 항상 불안하다. 나의 행복을 남에게 알리지 마라. 잊고 있던 그레이가 찾아올 수도 있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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