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퍼브 제품 전성시대

‘B급 상품’의 반란이 시작됐다. 그동안 흠집이 있어서 폐기되던 ‘못난이 감자’가 대형마트 매대에 오르는가 하면, 반품상품·재고상품·이월상품 등을 손질해서 판매하는 ‘리퍼브 전문점’이 프리미엄 아울렛에 둥지를 튼다. 최근 달라진 유통가의 모습이다.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실속’을 챙기는 소비자가 증가한 데다 ‘착한 소비’ 트렌드가 확산한 게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스쿠프(The SCOOP)가 B급 상품의 반란기를 취재했다. 

‘B급 상품’으로 여겨지던 ‘리퍼브 제품’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사진=롯데쇼핑 제공]
‘B급 상품’으로 여겨지던 ‘리퍼브 제품’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사진=롯데쇼핑 제공]

“잘 찾으면 중고보다 훨씬 나은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득템’할 수 있어요.” 주부 이성경(36)씨는 리퍼브(refurbished) 제품을 종종 구입한다. 잠깐 사용하는 유아용품이나 필수기능만 있으면 되는 소형가전은 굳이 새 제품을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다. 

최근엔 리퍼브 매장의 접근성도 좋아졌다. 쾌적한 대형 쇼핑몰에 리퍼브 매장이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기능상 문제가 없다면 리퍼브 제품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면서 “정상가격보다 40~50% 저렴하니 절약하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고 말했다. 

리퍼브 제품이란 소비자가 단순 변심으로 반품한 제품, 판매 시기가 지난 이월 상품, 제조ㆍ유통 과정에서 외관상 문제가 생긴 제품 등을 손질한 것을 의미한다. 사용하지 않은 제품이라는 점에서 중고와 구별된다. 가격은 정상가격 대비 40~50%, 최대 70% 이상 저렴하다. 특히 최근엔 온라인 쇼핑의 증가로 제품 교환·환불이 빈번해지면서 리퍼브 제품의 종류가 더욱 다양해졌다. 

리퍼브 제품에 손을 뻗는 소비자가 많아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리퍼브 가구ㆍ가전 전문업체 ‘올랜드 아울렛’의 경우, 매출액이 매년 10~20%씩 증가하고 있다. 전국에 20여개 매장을 운영하는 올랜드 아울렛의 지난해 매출액은 309억원을 기록했다. 회사 관계자는 “리퍼브 제품을 찾는 고객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면서 “자체 검수팀을 거쳐 품질이 검증된 제품만 판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리퍼브 제품이 인기를 끌자 대형 유통업체도 리퍼브 매장을 유치하고 있다. ‘B급 상품’으로 여겨졌던 리퍼브 제품이 유통가의 중심을 파고든 셈이다. 대표적인 곳이 롯데쇼핑이다. 롯데쇼핑은 지난해 10월부터 롯데아울렛 광교점과 롯데프리미엄아울렛 파주점에 리퍼브 생활용품 전문점 ‘프라이스 홀릭’을 잇따라 개점했다. 지난 5일에는 롯데프리미엄아울렛 이천점에 올랜드 아울렛을 입점시켰다. 

이천점 올랜드 아울렛은 역대 가장 큰 규모(1157㎡·약 350평)로, 삼성전자ㆍLG전자ㆍ캐리어ㆍ필립스가 생산한 가전제품과 한샘ㆍ삼익ㆍ핀란디아 등의 가구제품을 30~70% 할인 판매한다. 예컨대 삼성전자의 50인치 FULL HD LCD TV는 51% 할인된 59만원에, LG전자의 60인치 UHD TV는 48% 할인된 99만원에 판매한다. 두제품 모두 모델하우스에 전시됐던 제품으로 박스가 없는 리퍼브 상품이다.

롯데쇼핑 관계자는 “필요한 성능을 갖췄다면 리퍼브 제품도 망설임 없이 구매하는 소비자가 증가하고 있다”면서 “프라이스 홀릭 광교점과 파주점의 경우 월평균 매출액이 각각 7000만원, 1억원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리퍼브 제품을 판매하는 데 적극적인 유통채널은 또 있다. 

이커머스 업체다. 티몬은 지난해 4월부터 매달 24일을 ‘리퍼데이’로 정하고 관련 제품을 기획·판매하고 있다. 아울러 3000여개 리퍼브 제품을 상시 구입할 수 있는 ‘리퍼창고’도 운영 중이다. 그 결과, 티몬에선 올해 1~5월 리퍼브 제품 판매액이 전년 동기 대비 52%가량 증가했다. 품목별로는 안마의자(건강가전), 노트북·데스크탑(PC), 주방가전, TV(생활가전) 순으로 인기가 높았다. 

 

장기화한 불황, 착한 소비 트렌드 등이 리퍼브 제품의 인기를 부채질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장기화한 불황, 착한 소비 트렌드 등이 리퍼브 제품의 인기를 부채질하고 있다.[사진=뉴시스]

가전이나 가구뿐만이 아니다. 농산물도 ‘리퍼브 제품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 그동안 ‘못생겨서’ ‘흠집이 있어서’ 상품성이 없다고 여겨지던 농산물이 대형마트 매대에 오르고 있다. 이마트에선 ‘보조개 사과(3월)’ ‘해남 못난이 왕고구마(4월)’ ‘고창 못난이 왕고구마(5월)’ 등이 인기리에 판매됐다. 수요가 감소하면서 농가에 재고로 쌓여 있었거나, 태풍ㆍ우박 등의 피해로 흠집ㆍ반점이 생긴 제품들이다.  

맛엔 전혀 문제가 없는 데다 가격은 일반 제품 대비 30~40% 저렴해 소비자 선호도가 높았다. 이마트 관계자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농가를 돕기 위해 이들 제품을 판매했다”면서 “취지가 좋은 데다 가격적 메리트가 있어 소비자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고 설명했다.

롯데마트도 ‘농산물 리퍼브’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롯데마트는 11일부터 ‘농가돕기 성주 참외’를 판매를 시작했다. 맛과 당도는 일반 성주 참외와 동일하지만 표면에 흠집이 있는 제품이다. 1봉(20개입)에 1만1980원으로 일반 성주 참외보다 20%가량 저렴하다. 

리퍼브 농산물이 각광받기 시작한 데는 미디어의 역할도 한몫했다. 대표적인 게 지난해 12월 방송된 SBS TV프로그램 ‘맛남의 광장’이다. 당시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에게 상품성이 떨어져 판매하지 못하는 ‘폐품 감자(못난이 감자)’ 판매를 부탁했다.

정 부회장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못난이 감자 30톤(t)이 이마트 등에서 판매됐다. 이슈몰이를 톡톡히 한 못난이 감자는 삽시간에 팔려 나갔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못난이 감자 판매를 계기로 리퍼브 농산물에 관심을 갖는 소비자가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리퍼브 제품의 반란은 계속될까. 가능성은 충분하다. 무엇보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불황의 골이 깊어지고 있어서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경기가 워낙 악화하다 보니 가성비를 고려한 합리적인 소비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리퍼브 제품을 이전과 다르게 보는 소비자도 부쩍 늘어났다. 양세정 상명대(소비자경제학)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리퍼브 제품은 근래의 착한 소비 트렌드와도 맞아떨어진다. 리퍼브 제품을 구입하는 게 민망하기보단 바른 소비 생활로 여겨지기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리퍼브 제품이 품질 경쟁력을 갖추는 게 전제조건이란 지적도 나온다. 양세정 교수는 “리퍼브 제품이 그저 그런 재고 상품과 명확한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면 하나의 소비 트렌드에 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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