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아성 흔드는 와인

‘비싼 술’ ‘특별한 날에 마시는 술’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와인은 이제 마트나 편의점에서 손쉽게 구하는 술이 됐다. 가격대도 4800원대까지 내려가 부담스럽지 않다. 이 덕분인지 국내 주류시장서 와인 매출은 빠르게 늘고 있다. 그러나 와인이 국내 주류시장서 맥주와 견줄 대중적인 술로 자리 잡을지는 의문이다.
 

대형 유통업체가 와인 판매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5000원 미만의 와인까지 등장했다. [사진=이마트 제공]
대형 유통업체가 와인 판매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5000원 미만의 와인까지 등장했다. [사진=이마트 제공]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술은 무얼까. 단연 맥주다. 글로벌 주류시장(2조 달러)의 33.2%를 맥주가 차지했다. 시장조사에서 집계하는 주류가 10종이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맥주 소비량은 가히 압도적이다. 그런데 최근 맥주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FIS식품산업통계정보에 따르면 세계 주류 시장서 맥주의 연평균(2019~ 2024년) 예상 성장률은 3.4%에 머물렀다. 시장점유율 2위인 증류주(예상 성장률 4.1%)보다 0.7%포인트 낮은 수치다. 맥주의 아성을 위협하는 술은 시장점유율 3위 주류인 와인(예상 성장률 6.0%)이다. [※ 참고: 성장률 1위 무알코올 음료(23.1%), 2위 혼성주(12.0%).]

국내 주류 시장에서도 와인은 성장세다. 시장조사전문업체 스태티스타는 한국 와인시장이 매년 12.4%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2020~2023년). 독일의 유명 와인박람회 업체 프로바인(Prowein)은 2018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2021년까지 와인시장이 빠르게 성장할 국가 2위에 한국을 올렸다. [※ 참고: 1위 중국, 3위 폴란드, 4위 러시아, 5위 홍콩]. 한국 와인시장의 성장성을 해외에서 더 주목하고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국내서 와인이 뜨는 이유는 뭘까. 먼저 와인 구매의 접근성이 좋아졌다. 2~3년 전부터 국내 유통 대기업은 와인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그 결과 대형마트나 편의점에서도 와인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됐다. 이마트·롯데마트·홈플러스 등 대형마트 3사는 현재 5000원 미만의 와인을 판매하고 있다. 편의점 4사(GS25·CU·세븐일레븐·이마트24) 모두 와인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 편의점의 경우 할인 프로모션을 통해 가격을 낮추거나, 접근성을 활용해 예약·픽업 서비스를 제공한다. 비싸다는 편견을 깨고 커피 한잔보다 저렴한 와인을 내놓은 건데, 이는 와인의 인기를 더 끌어올리는 ‘선순환의 고리’가 됐다. 

지난해 4900원짜리 저가 와인 ‘도스코파스’를 출시한 이마트의 경우, 주류 카테고리 내 와인 매출 비중이 2018년 17.8%에서 올해 26.3%(4월 기준)로 상승했다. 주류 매출의 4분의 1을 와인이 차지하게 된 셈이다. 초저가 와인의 등장이 중저가 와인을 향한 소비로 이어지기도 했다. 대형마트의 한 관계자는 “중저가 와인은 예전에도 판매하고 있었다”며 “다만 마케팅용으로 내세운 초저가 와인이 인기를 끌면서 원래 있었던 1만~2만원대의 중저가 제품이 주목 받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와인의 인기가 몰라보게 많아진 건 주52시간제 덕도 있다. 주52시간제 도입 이후 집에서 혼술을 즐기는 이들이 늘면서 와인 소비자도 동반 증가했다. 올해는 코로나19 수혜도 입었다. 코로나로 집에서 혼술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게 와인 판매량도 끌어올렸다. CU는 1~5월 와인 매출이 지난해 동기 대비 45.8% 늘었고, 이마트24의 와인 매출은 같은 기간 228.2% 증가했다. 

 

그렇다면 와인은 맥주의 인기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아직은 쉽지 않다는 분석이 많다. 와인 매출이 늘곤 있지만 맥주 입지가 아직은 탄탄해서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와인 성장세를 무시하기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맥주는 가장 쉽게 접하는 술인 데다 호불호가 적어 계속 팔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마트24의 와인 매출 비중은 2017년 0~1%에서 지난해 4%대까지 상승했지만 같은 기간 맥주 비중은 꾸준히 70%대를 유지했다. 그만큼 맥주의 아성이 견고하단 얘기다. 와인의 가격 경쟁력이 아직 충분하지도 않다. 특히 마니아층이 찾는 중고가 와인은 가격 거품이 심하다는 지적이 숱하다. 같은 제품인데도 판매처마다 가격이 수만원씩 다르거나 입고가와 판매가의 차이가 큰 경우도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와인을 즐기는 소비자 중엔 커뮤니티를 만들어 와인 가격 정보를 공유하거나, 해외 가격비교 사이트를 이용하는 이들이 많다.  

와인 시장 다양성 사라질 수 있어

이뿐만이 아니다. 와인 시장을 대형 유통업체가 키우는 것도 장기적으론 좋지 않은 흐름이란 우려도 나온다. 박정진 한국와인소비자협동조합 이사장은 “유통 채널의 경쟁력과 구매력을 가진 대기업이 와인 판매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면서 중소업체들은 고사 위기에 처했다”고 강조했다. 현지 업체가 기존의 중소 판매업체와 거래하는 대신, 구매력이 좋고 판매 채널이 다양한 대형 유통업체와 직접 거래하는 일이 늘어나서다. 

박 이사장은 “대형 유통업체가 와인을 판매하면 당장은 접근성이 좋아져 소비자에게도 이득 같지만 장기적으론 그렇지 않다”며 “저가형 와인이 입맛의 기준이 되는데다, 대형 유통업체가 이윤을 남기기 좋은 제품만 들여오면 결국 소비자는 다채로운 와인을 접할 기회를 잃게 된다”고 꼬집었다. 중소업체가 사라지면 시장 다양성 자체가 사라진단 얘기다. 과연 국내 주류시장서 와인이 맥주를 따돌리고 ‘국민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까. 

심지영 더스쿠프 기자
jeeyeong.shim@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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