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일의 길, 빛과 그림자

소재‧부품‧장비의 공급안정성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사진=연합뉴스]
소재‧부품‧장비의 공급안정성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사진=연합뉴스]

지난해 7월, 일본이 우리나라를 겨냥해 수출규제 정책을 꺼냈다. 한국 경제의 고질적 약점인 소재ㆍ부품ㆍ장비(소부장)의 공급로를 틀어막으면 우리나라가 백기투항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1년, 우리는 ‘국난’으로 불리던 위기를 생각보다 쉽게 극복해 냈다.

일본이 정조준한 3대 규제 품목(고순도 불화수소ㆍ포토레지스트ㆍ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대일對日 의존도를 낮추는 데도 성공했다. 
특히 일본산을 대체하기 힘들 거라 여겨졌던 고순도 불화수소의 대일 수입 비중을 50%선에서 11.4%(2020년 5월)까지 떨어뜨린 건 놀라운 실적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대기업들은 저마다 국산화ㆍ다변화를 통해 안정을 찾았다며 자신감을 내비치지만, 중소기업의 상황은 전혀 알 수가 없다. 

일본 수출규제의 여파를 극복했는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기술개발에 힘쓰고 있는지, 정부도 기업도 전문가들도 잘 모른다. 우리의 소부장, 어디쯤 와있는 걸까. 더스쿠프(The SCOOP)가 일본 수출규제 1년을 기록해 봤다.

흔히 제조업을 ‘한국 경제의 허리’라고 말한다. 한국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신경망이 제조업에 몰려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제조업을 떠받치는 허리는 무엇일까. 소재ㆍ부품ㆍ장비(소부장)다. 소부장이 탄탄하지 않으면 생산물이 뛰어날 수 없다. 장인은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지만 제조업에선 소재 탓, 부품 탓, 장비 탓이 중요하다. 소부장의 기술력이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고 혁신을 꾀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일본은 제조업의 허리가 취약한 한국 경제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우리나라는 주력 제조업에 비해 소부장 분야 원천기술이 유독 떨어진다는 고질적 문제를 안고 있다. 그렇다 보니 국내에서 자체 조달하는 것보다 해외에서 들여오는 소부장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일본은 예민한 시기에 이를 겨냥했다. 우리나라 대법원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한 데 따른 정치적 보복 조치였다. 일본의 레이더망에 처음 포착된 건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 반도체였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7월 반도체ㆍ디스플레이 분야 핵심 소재인 고순도 불화수소ㆍ포토레지스트ㆍ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대한對韓 수출을 제한했다.

일정 기간 한번만 허가를 받으면 되는 기존의 포괄허가에서 매번 승인을 받아야 하는 개별허가로 바꾼 건데, 수출 절차를 엄격하게 통제하겠다는 게 일본의 속셈이었다. 3개 품목 모두 대일對日 수입 비중이 적게는 40%에서 많게는 90%에 달하는 품목들이라 적잖은 파장이 예상됐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본은 8월 우리나라를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명단에서 제외했다. 백색국가에서 제외되면 일본 제품을 수입해올 때 승인 절차를 간소화해주는 혜택을 받지 못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백색국가 제외로 931개 품목이 영향을 받는데, 그중에서도 당장 큰 피해를 받는 품목이 159개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일본이 수출규제 정책을 꺼내든지 1년이 지났지만 우리나라는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사진=연합뉴스]
일본이 수출규제 정책을 꺼내든지 1년이 지났지만 우리나라는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사진=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일본의 수출규제를 ‘국가적 위기’로 규정했다. 수출규제로 공급이 막히면 한국 경제의 중추인 제조업이 입을 피해가 막대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를 막을 해답은 간단명료했다. 소부장 산업을 키워 자립도를 높이면 일본 의존도는 자연스럽게 낮아질 문제였다. 하지만 소부장 분야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우려였다.

그로부터 1년, 국가적 위기까지 거론됐던 것을 감안하면 업계 분위기는 예상외로 차분하다. 코로나19라는 거대 이슈에 묻힌 탓도 있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코로나19로 전체적인 생산량과 수요가 줄어들긴 했지만 이를 감안해도 일본 수출규제로 인해 지장을 받진 않았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가장 우려가 컸던 반도체ㆍ디스플레이 업계에서도 소재를 공급받지 못해 생산에 차질이 생긴 일은 없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SK하이닉스, LG디스플레이, 삼성디스플레이 등 업계를 대표하는 기업들은 “지속적인 국산화와 다변화를 통해 안정적인 공급로를 확보해 일본 수출규제로 인한 타격은 크지 않은 상황”이라고 입을 모았다.

위기의식이 고질병을 치료하는 묘약이라도 된 걸까.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일본 수출규제에 대응하고 대외 의존도가 높은 산업구조를 근본적으로 탈피하기 위해 ‘소부장 경쟁력 강화대책’을 내놨다. 앞서 규제 대상에 오른 3개 품목과 함께 6대 산업(반도체ㆍ디스플레이ㆍ자동차ㆍ전기전자ㆍ기계금속ㆍ기초화학)의 100개 품목을 선정해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공급안정성을 확보하겠다는 게 골자였다.

그중에서도 안보상 수급위험이 크고 주력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20개 품목은 1년 이내, 자립화까지는 시간이 소요되지만 전략적으로 기술개발이 필요한 80개 품목은 5년 내에 공급안정화를 꾀하겠다는 게 산자부의 플랜이었다. 여전히 일본으로부터 적지 않은 양의 제품을 수입하고 있다고 해도 1년 만에 핵심 소재의 수급 우려를 불식시켰으니 소기의 성과를 달성한 셈이다. 
 

산자부 역시 지난 5월 소부장 자립화 성과 발표에서 “지난 9개월간 기업과 정부가 긴밀하게 협력한 덕에 수출규제 3대 품목을 중심으로 공급안정화에 진전이 있었다”면서 “미국ㆍ중국ㆍ유럽 등으로 수입처를 다변화하고 국내 기업의 생산량을 늘려 3대 품목의 공급을 안정시켰고, 100대 핵심품목은 재고보유 수준을 2배 이상 높여 수급 불확실성을 낮췄다”고 평가했다.

국산화율을 높이겠다는 전략에서도 성과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솔브레인ㆍSKCㆍ코오롱인더스트리 등 일본산 제품을 대체하기 위해 힘을 쏟아온 기존 기업 외에 최근엔 SK머티리얼즈가 국내 최초로 기체형 고순도 불화수소의 양산 소식을 전했다. 


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검증을 거치고 수율을 높이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대체가 어려울 것으로 보였던 고순도 불화수소 가스를 양산했다는 점에서 소부장 산업의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우려와 달리 국내 소부장 산업의 자립화 과정이 순조롭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둘러 소부장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쉬운 지름길을 택한 게 아닌지 되짚어봐야 한다는 얘기다. 지난해 산자부가 소부장 경쟁력 강화 대책을 내놨을 때, 일부 전문가들은 “소부장 산업을 육성하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기업 간 불균형을 키우는 건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자칫 중소기업과 신규 진입 기업들은 배제되고 기존에 이권을 가지고 있던 기업들에만 지원과 혜택이 몰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도 그럴 게 국내에선 대기업들이 수요를 독점하고 있어 직접 컨트롤할 수 있는 전속거래 기업 위주로 배타적인 생태계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지난 1년간 소부장 분야에서 성과를 낸 곳은 대부분 대기업에 국한돼 있다. 중소기업들이 어떻게 참여하고 얼마큼 지원을 받고 있는지는 확인이 어렵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연구위원도 이 점을 우려했다. “우리나라는 대기업 중심의 수직계열 통합구조다. 이런 구조에서 중소기업은 스스로 연구ㆍ개발(R&D)하기가 어렵다. 대기업이 지시하는 것만 개발하거나, 대기업이 직접 개발해서 설계도를 주는 시스템이 대다수다. 전속거래를 해온 기업이 아니면 스스로 기술을 개발해도 대기업이 써주질 않는다. 양극화가 심화하고 소부장 산업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기적으로 공급안정성을 높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소부장 산업이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건강한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최종재를 만드는 산업은 발전한 반면, 소부장 산업은 왜 발전하지 못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모른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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