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여인의 향기 ❸

시력을 잃고 홀로 살아가는 슬레이드 중령은 남은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의 백악관 파티에까지 초대받았던 이력을 보면 군인으로서 꽤나 화려한 ‘왕년’이 있었던 모양이다. ‘왕년’이 화려하면 할수록 초라한 현실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고 고통스럽다. 마침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하고 자살여행을 떠난다.

‘포기’는 해서는 안 될 것이고, ‘체념’은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포기’는 해서는 안 될 것이고, ‘체념’은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충동적인 자살이 아니라 말기암 환자처럼 소위 ‘버킷 리스트(bucket list)’까지 마련한 것을 보면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었던 모양이다. 슬레이드 중령의 버킷 리스트는 ‘잘나가던’ 시절 화려한 경험을 했던 뉴욕시를 여행하는 것과 절연한 채 살았던 형님 댁에 방문하는 것이다. 

비행기 일등석을 타고 미국 최고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스위트룸에 묵으면서, 최고 재단사를 불러 최고의 양복을 맞추고, 리무진 서비스를 받고, 플라자 호텔의 최고급 사교클럽 오크룸에서 술을 한잔하고, 럭셔리 페라리를 몰아보는 것도 그의 버킷 리스트다. 그다지 어마어마한 소망이 아니어서 어렵지 않게 버킷 리스트를 지워나간다. 그러나 버킷 리스트를 모두 지운 슬레이드 중령의 표정은 공허하고 참담하기 짝이 없다.

심스는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믿고 자살을 기도하는 슬레이드 중령에게 그에게 ‘없는 것’보다 그에게 아직도 ‘있는 것’을 일깨워준다. 첫째, 당신은 시각장애인이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이 호감을 느낄 만큼 미남이다. 둘째, 당신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탱고를 멋지게 출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셋째, 당신처럼 멋지게 페라리를 몰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슬레이드 중령은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 영감처럼 개과천선해 뉴햄프셔 사촌조카의 집으로 귀환한다. 집 마당으로 들어서며 평생 안 하던 짓도 한다. 마당에서 놀고 있던 조카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살가운 말을 건넨다. ‘자살여행’ 전까지만 해도 조카손녀가 창문 밖에서 방안을 들여다보는 느낌만 들어도 쿠션을 냅다 집어던지던 그였다. 그 기세가 사냥총이라도 발사할 듯 자못 살벌했다. 그랬던 우리 슬레이드가 달라졌다. 대체 뉴욕 ‘자살여행’에서 무얼 깨달았기에 슬레이드 중령은 다시 태어난 걸까. 

 

심스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믿는 슬레이드 중령에게 깨달음을 줬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심스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믿는 슬레이드 중령에게 깨달음을 줬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세상의 모든 고통과 고민을 혼자 짊어지고 사는 것처럼 미간에 내 천川자를 파고 살았던 ‘비관’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철학자 쇼펜하우어. 그는 “삶이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불행은 항상 자신이 ‘가진 것’은 잊은 채 ‘못 가진 것’에 집착하는 데서 시작되는 모양이다. 어찌 보면 ‘불행’이란 범사凡事에 감사함을 잊은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악마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슬레이드 중령의 깨달음은 ‘포기抛棄’해야 할 것과 ‘체념諦念’해야 할 것에 대한 분별이었을 수도 있겠다. ‘포기’와 ‘체념’은 다른 것이지만 분간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포기’는 해서는 안 될 것이고, ‘체념’은 해야만 하는 것이다. 포기란 자신이 가진 소중한 모든 것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반면에 체념이란 삶의 불완전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신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한’ 미련을 내려놓고 그 대상을 버리는 것이다. 

 

불행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집착하는 데서 시작된다. [사진=뉴시스]
불행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집착하는 데서 시작된다. [사진=뉴시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스펠링의 이름을 가진 듯한 헝가리 출신 ‘긍정의 심리학자’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는 ‘순결에 대한 집착이 우리의 순결을 지켜주지 못하고 죄의식만 키우듯, 행복에 대한 집착은 오히려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고 충고한다. 우리는 가끔 슬레이드 중령처럼 버려야 할 것은 버리지 못하고, 버려서는 안 될 것을 버리고 불행해진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하루에 30~40명이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자살대국이다. ‘이번 생’은 어차피 망했다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버려야 할 건 목숨이나 꿈이 아니라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이나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이 아닐까. 기화요초琪花瑤草를 찾으러 숲속을 헤매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것처럼 말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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