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의 ‘좌절 경영학’

▲ 일요일이면 월요일을 기다린 유상옥 회장. 그는 일만 열심히 했던 게 아니다. 맡은 일은 반드시 성과를 냈다.
한 사내가 있다. 중소 제약회사를 키워 사장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했다.
뜻하지 않게 한직으로 밀려났다. 이대로 무너질 수 없었다. 쉰다섯에 창업을 결심했다. 이름을 코리아나화장품이라고 지었다.

첫 출근 날. 누구나 당찬 포부와 결심을 하기 마련이다. 이 사내도 그랬다. 동아제약 공채 1기 신입사원(1959년)이었던 유상옥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은 ‘생명수 본포本鋪 동아제약’이라고 쓰인 공장 굴뚝을 올려다보며 다짐했다. “이 회사를 국내에서 제일 큰 제약회사로 만들어 사장이 되겠다.” 회사를 키우겠다는 결심은 자신도 같이 성장하겠다는 다짐이었다. 유 회장은 첫 직장 동아제약에서 19년 동안 박카스와 함께 현장을 누볐다.

신입사원 시절 그는 워커홀릭이었다. 아침에 일찍 집을 나서면 밤늦게 들어왔다. 휴가를 제대로 가본 적도 없다. 일요일이면 월요일이 되기를 기다렸다. 동아제약 동료들은 그를 ‘출근을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일만 열심히 한 건 아니다. 맡은 일은 반드시 성과를 냈다. 그래야 직성이 풀렸다. 덕분에 동기들보다 진급이 빨라 35세에 기획관리(영업담당) 이사가 됐다. 기업의 꽃이라는 임원을 달았지만 그의 앞길엔 가시밭이 깔려 있었다. 부지런한 그에게도 영업은 생소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영업 분야를 한직으로 치부했던 것도 내심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보란 듯이 실적을 올려보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두 번째 도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유 회장은 기획관리 이사에 오른 직후 전국 200여명의 영업사원과 개별면담을 가졌다. 사원의 능력과 장기를 파악하고 애로사항을 확인했다. 사원들 사이에서 ‘우리 얘기 들어주는 사람’이란 평이 나왔다. 채찍도 썼다. 대기발령제를 도입해 영업실적이 부진한 사원 6명에게 대기발령을 내렸다. 불명예 퇴진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는지 모두 열심이었다. 그렇다고 채찍만 내리친 건 아니다. 당근도 줬다. 매달 실적을 평가해 3명은 3개월 후에, 3명은 5개월 후에 원상 복귀됐다. 2년마다 서울과 지방 사원을 교대시켰다. 지방 근무자의 불만을 줄이고 서울 근무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승진은 철저하게 영업실적과 시험성적으로 따졌다. 높아진 직원들의 사기는 매출 증대로 이어졌다. 기획관리 이사에 오른지 3년 만에 127억원에서 345억원으로 매출이 뛰었다. 동아제약은 이를 발판으로 세勢를 불렸다. 유 회장은 ‘영업의 신’으로 불렸다.

그러던 1977년. 뜻밖의 발령이 떨어졌다. 라미화장품이었다. 동아제약이 1976년 인수한 이 회사는 부실기업이었다. 내심 서운했지만 그는 군소리 내지 않았다. 회사가 왜 만성적자에 시달리는 이유부터 찾았다. 무엇보다 직원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회사가 적자에 시달리니 월급을 제대로 받을리 없었기 때문이다.

비즈니스의 꽃 ‘영업’ 접하다

▲ 1989년, 유 회장은 55세의 나이로 코리아나화장품을 창업했다.
그는 독특한 사기앙양법을 썼다. 먼저 애국가를 개사해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희망을 노래하자 꽁꽁 얼어붙었던 직원들의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면 “할 수 있다”는 구호를 외치게 했다. 아울러 품질개선작업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품질 좋은 화장품을 출시하면 적자를 면할 수 있다는 것을 직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동아제약의 오랜 의학적 연구경험과 노하우를 피부에 접목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세계적인 검정공인기관 미국 식품의약품국(FDA)으로부터 라미화장품의 안정성을 입증받았다. 품질이 좋으니 물건도 잘 팔렸다. 라미화장품은 1978년 매출 22억원을 기록했다. 예년에 비해 14억원이나 증가했다. 유 회장에게 찬사가 쏟아졌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일은 하루아침에 터졌다. 1987년 6•29선언이 발표되면서 전국의 노동현장에서 분규가 터졌다. 라미화장품의 현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행히 하루 만에 노조와 협상이 타결됐다.

그러나 책임론을 피할 순 없었다. 노사분규 후유증으로 유 회장은 다른 계열사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박카스 병을 만드는 동아유리주식회사였다. 경영자로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병을 만들어 고정 판매처에 납품하는 게 업무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일을 낙으로 삼고 살던 유 회장에게 가혹한 형벌이었다.

타고난 일꾼인 유 회장은 결심했다. 30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 창업을 하기로 했다. 업종은 화장품으로 정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수중에 있는 거라곤 퇴직금 1억원이 전부. 마침 반가운 손님이 손을 내밀었다. 화장품 유통업 진출을 모색 중이던 중견기업 회장이 13억원을 출자하겠다고 나섰다. 유 회장은 어렵게 모은 10억원을 합쳐 자본금 23억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사명은 코리아나화장품으로 정했다. 1989년, 그의 나이 55세 때였다.

 
유 회장은 코리아나화장품을 창업하면서 원칙을 세웠다. ‘명품주의’와 ‘기업가정신’이다. 국내에서 사랑받고 세계시장에서도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명품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전략이었다. 코리아나화장품이 고가의 원료와 최신 기기를 사용해 화장품을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은 상품이 ‘머드팩’이다. 이 제품은 업계의 광고판도까지 바꿨다. 코리아나화장품은 채시라를 내세워 15년 간 모델로 기용했다. ‘빅 모델 내세워 롱런하라’는 전략이었다. 광고하는 제품을 톱클래스로 만들고자 한다면 모델도 톱클래스로 매치해야 한다는 게 유 회장의 생각이었다.

기존 머드팩 제품광고와는 컨셉트부터 달랐다. 기존 제품의 광고모델은 예쁘게만 나왔다. 코리아화장품의 모델은 달랐다. 얼굴과 몸에 진흙을 바르고 등장했다. 화장품 광고의 고정관념을 깬 파격 컨셉트가 소비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는 곧 판매로 이어졌다. 코리아나 영업이 시작된 1989년 매출 14억원에서 1992년 134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4년만의 성과였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코리아나화장품은 2002년부터 성장세가 둔화됐다. 수많은 경쟁자가 출현해 시장을 잠식했기 때문이다. 특히 3000원대 저가 화장품이 돌풍을 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카드대란까지 터져 화장품 등 소비재 업체가 타격을 입었다.

유 회장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럴수록 원칙을 확고히 했다. 최고의 제품을 만들고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 1997년 도입한 오픈 프라이스 시스템(판매가격표시제)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대한화장품공업협회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보건사회부와 공정거래위원회와 협의해 판매가격표시제의 도입을 이끌었다. 공장도가•권장소비자가•판매가 등으로 나뉘어진 가격표시체계가 하나로 통일해 소비자를 보호하자는 취지였다. 실제로 유 회장이 도입한 이 제도는 화장품 정가제의 초석을 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 회장이 평소 강조한 ‘정도경영’이 발휘된 것이다.

한직 발령이 창업의 계기로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한 사례는 또 있다. 서울 신사동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C’다. 아름다운 기업 코리아나(Coreana), 전통•현대문화의 조화를 통한 새로운 문화 창초(Culture), 함께하는 문화 공동체 구축(Community)의 공통된 머리글자 ‘C’를 따서 지었다.

그는 공부하는 경영인이었다. 동아제약 입사 후 2년 만에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 고려대 경영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도 땄다. 올해 그의 나이 81세. 배움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다. 유 회장은 올해 10월 자신의 여섯번째 경영에세이를 펴냈다. ‘공부해야 살아남는다’는 자신의 철학을 담은 에세이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유 회장의 바탕이자 정신이다. 코리아나화장품을 떠받치고 있는 초석이기도 하다.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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