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현의 컴플라이언스 경영 | 사외이사의 씁쓸한 민낯

사외이사제도는 기업의 지배주주와 경영진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제도가 변질됐다. 우리나라에선 견제는커녕 기업에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이 사외이사가 된다. 그러다보니 사외이사가 고관대작들의 노후를 보장해주는 안식처로 전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국형 사외이사제도의 씁쓸한 민낯이다.

권력기관에서 은퇴 후 기업 사외이사 자리에 앉는 건 한국 사외이사제도의 고질적 병폐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권력기관에서 은퇴 후 기업 사외이사 자리에 앉는 건 한국 사외이사제도의 고질적 병폐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필자의 첫 직장은 대기업 상장회사였다. 주담株擔이라 불리는 주식업무와 공시업무를 담당했다. 회사 중요사항을 공시할 때 근거 서류로 이사회의사록이 필요해 이사회 업무도 겸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사회가 열리는 일은 드물었다. 대부분 서면결의였는데, 필자가 이사들의 도장을 보관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의사록에 찍었다. 

#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상법이 개정되면서 국내에 ‘사외이사제도’가 도입됐다. 이에 따라 각 기업은 사외이사를 선임해야 했다. 필자는 당시 을지로에 있는 호텔 커피숍에서 한 사외이사 후보를 만났다. 공공기관에서 임원으로 있다가 정년퇴직한 분이었다. 퇴직 이후 생활이 걱정됐는데, 사외이사를 맡게 돼 다행이라고 했다. 사외이사에겐 거마비 명목으로 매달 급여가 지급됐다. 벌써 20년도 더 된 얘기다.

사외이사제도가 시행된 지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외이사는 지배주주나 경영진으로부터 독립된 이사를 말한다. 이사회를 통해 경영진을 감시ㆍ감독하는 게 사외이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사외이사제도는 미국에서 처음 발달해 우리나라로 넘어왔다. 하지만 23년 역사에도 국내에선 사외이사제도가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다. 그동안 기업에서 선임한 사외이사는 대부분 오너들을 위해 기여했거나, 앞으로 기여할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이었다. 보은報恩이거나 보험保險의 성격이 강했다. 당연히 경영진을 감시ㆍ감독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반면 사외이사제도의 발상지인 미국은 이사회 내에 각종 위원회를 설치해 그 기능을 활성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감사위원회ㆍ보수위원회ㆍ집행위원회ㆍ지명위원회ㆍ재무위원회 등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이런 위원회 대다수가 사외이사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사외이사들도 명확한 역할이 주어졌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미국에선 사외이사를 ‘independent director’라고 표기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독립이사’다. 단어에서부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사외이사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1월 29일 시행된 상법 시행령 개정안이 단적인 예다. 이번 개정안에서는 사외이사의 결격사유를 확대해 독립성을 강화했다. 특히 눈여겨봐야 할 건 한 회사에서 사외이사로 오래 재직하지 못하도록 연임을 제한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사외이사는 한 회사에서 ‘무한정’ 재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유명 식품업체 N사에서는 21년간 활동한 최장수 사외이사가 있었을 정도다.

개정법에선 한 회사에서 최대 6년, 계열회사까지 포함하면 최대 9년까지 재직을 허용했다. 또한 계열회사 퇴직임원이 사외이사를 맡을 수 없는 ‘냉각기간’도 퇴직 후 2년에서 3년으로 늘렸다. 이제 한 사외이사가 터줏대감 노릇을 하긴 어려워진 셈이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개정법 시행 이후 30대 그룹 상장회사의 사외이사는 네명 중 한명이 새로운 인물로 교체됐다. 하지만 허점도 적지 않았다. 퇴임한 사외이사들은 대부분 다른 기업 사외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일종의 이직을 한 셈이다. ‘물갈이’를 기대했건만 ‘돌려막기’가 된 꼴이다. 일부에선 사외이사 임기를 제한한 게 되레 몸값만 더 올리는 역효과를 나을 거란 지적도 잇따랐다. 

더구나 이번 개정법도 기업과 권력기관과의 유착을 막진 못했다. 최근 대신기업지배구조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 ‘2020년 주주총회 트렌드’에 따르면 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선임된 30대 그룹 상장회사 사외이사의 28%는 3대 권력기관(감독기관ㆍ사법기관ㆍ청와대) 출신이었다. 고관대작들이 사외이사 자리로 옮겨가는 관행이 여전하다는 얘기다.

일부에선 사정기관 출신들이 감시ㆍ감독을 더 잘할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사정기관 관료 출신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게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사외이사를 방패막이로 삼으려 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기업에서 고위층 네트워크를 유지하기 위해 사외이사를 활용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 1월 29일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상법 개정안이 시행됐다. 하지만 실효성은 적었다.[사진=뉴시스]
지난 1월 29일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상법 개정안이 시행됐다. 하지만 실효성은 적었다.[사진=뉴시스]

물론 법무법인이나 회계법인 소속 전문가를 무턱대고 사외이사로 낙점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기업의 법률 자문이나 경영 자문을 하는 법인 소속 전문가가 고객사의 사외이사로 진출한다면 독립성이 훼손되기는 마찬가지다. 

사외이사는 독립성에 방점을 둬야 한다.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선 사외이사 선임과정을 철저하게 주주에게 알려야 한다. 사외이사들의 이사회 출결과 발언, 의결권 행사 내용 등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거수기로 전락한 사외이사

10대 그룹 소속 상장회사 102곳 중 71곳은 사외이사 1인당 평균연봉이 5000만원을 넘는다(금융감독원 2019년 기준). 대부분의 사외이사가 본업이 따로 있다고 감안하면 일종의 ‘부업’으로 벌어들이는 사외이사 수입은 절대 적지 않다. 

또한, 공정거래위원회가 공시대상 대기업집단의 250개 상장회사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2018년 5월부터 1년간 상정된 이사회 안건 6722건 중 부결된 안건은 단 3건에 불과했다. 99% 이상이 원안대로 가결된 것이다. 사외이사들이 거의 찬성표를 던졌다는 얘기다. 

사외이사 제도의 문제점은 쉽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많은 보수를 받으면서 이사회에서 찬성표만 던지는 사외이사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사외이사가 고관대작들의 노후를 위한 ‘유한有閑이사’가 돼서는 안 될 것이다. 

장대현 한국컴플라이언스아카데미㈜ 대표
changandcompany@gmail.com | 더스쿠프

정리=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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