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회동에 숨은 긍정적 가치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잇따라 만났다. 그러자 업계에선 흥미로운 전망들이 쏟아져 나왔다. “배터리 동맹이 시작됐다.”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 업체가 어벤저스 팀을 만들었다.” 한국경제가 그동안 ‘독식’을 위해 출혈경쟁을 빚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배터리 회동은 긍정적 함의를 갖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과 전기차 배터리 제조3사 총수들과의 회동은 ‘협업과 시너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사진=SK그룹 제공]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과 전기차 배터리 제조3사 총수들과의 회동은 ‘협업과 시너지’에 초점을 두고 있다.[사진=SK그룹 제공]

“배터리 동맹이 시작됐다.”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 업체가 어벤저스 팀을 만들었다.” 지난 7일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만나 ‘전기차 배터리 회동’을 가진 후 이런 분석들이 쏟아졌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이 없어 말하기 조심스럽다”면서도 “배터리 3사가 경쟁 우위로 밀고 있는 분야들이 조금씩 다르고, 배터리는 향후 수소전기차나 개인용 비행체 등 다양한 모빌리티에 적용될 것이기 때문에 현대차그룹의 미래를 고려한 협력이라고 보면 될 것”이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그럼에도 ‘어벤저스급 배터리 동맹’이란 분석이 나오는 덴 나름의 이유가 있다. 현대차그룹은 2025년까지 23개의 전기차 차종을 시장에 내놓고,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 세계 3위(수소전기차 포함)로 도약하겠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전기차의 핵심이 배터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배터리의 안정적인 공급이 관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 수석부회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5월), 구광모 LG그룹 회장(6월), 최태원 회장 등 업계 총수들과 만났으니 ‘배터리 동맹’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현대차그룹이 현재 전기차를 연간 10만대 정도 생산하는데, 2025년까지 90만대를 생산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늘어나는 배터리 수요를 안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데, 2곳으로는 유사 시 빠른 대체가 어려우니까 3곳과 협력하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분석했다. 그는 “현대차그룹 입장에선 이것저것 써보면서 검증도 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배터리 수요가 공급 앞설까

‘안정적인 공급선’ 확보는 현대차그룹만의 이슈가 아니다. 아직은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공급이 수요보다 많지만, 몇년 후엔 수요가 공급을 앞지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있어서다. 전기차 관련 시장조사업체인 SNE리서치에 따르면 2023년 전기차 배터리 예상 수요량은 916GWh, 예상 공급량은 776GWh다. 공급량이 140GWh 모자랄 거라는 얘기다. 특히 SNE리서치는 2030년 예상 수요량이 2023년의 3배 이상(3147GWh)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인지 국내 배터리 업계에선 ‘아쉽다’는 반응도 나온다. ‘배터리 제조사들이 너무나 쉽게 현대차그룹에 시장 주도권을 빼앗긴 게 아니냐’는 거다. 수요가 공급을 훌쩍 뛰어넘으면, 배터리 제조사가 ‘갑’이 될 텐데, 다소 섣불렀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배터리 제조사들은 가까운 미래에 ‘갑甲’이 될 수 있을까. 

테슬라는 자체 전기차 배터리를 선보일 예정이다.[사진=연합뉴스]
테슬라는 자체 전기차 배터리를 선보일 예정이다.[사진=연합뉴스]

쉽지 않다. 우선 ‘공급량 부족 예측’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시장조사기관의 예측이 항상 들어맞았던 건 아니다. 더구나 배터리 제조사들은 지속적으로 생산설비를 늘리고 있다. 이 때문에 섣불리 공급이 부족해질 거라 예상하기는 어렵다.”

부족하면 그만큼 배터리 제조사들이 생산설비를 더 늘려갈 것이라는 얘기다. 일례로 중국의 CATL은 지난해 공급량 부족 전망이 나오자 2023년까지 연간 52GWh의 전기차 배터리를 생산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려놓겠다며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완성차 업계의 자체 생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미 테슬라는 이런 사실을 공식화했다. 최근 테슬라의 CEO인 일론 머스크는 오는 9월 배터리셀 생산시설을 외부에 전격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일명 ‘배터리데이’인데, 이날 테슬라는 수명이 160만㎞(일반 배터리의 5배)인 배터리를 공개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현대차 역시 배터리를 제조ㆍ생산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완성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현재 내연기관이 없어지면 일자리가 부족해질 것이라는 이유에서 현대차 노조에서 먼저 배터리 자체 생산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내부에서부터 그런 주장이 나온다면 현대차도 자체 생산을 고려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글로벌 완성차 업계 분위기도 비슷하다. 독일의 폭스바겐은 자체생산은 아니지만, 차세대 배터리라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는 기업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현대차그룹과 삼성ㆍLGㆍ SK의 ‘배터리 동맹’은 첫 단추를 잘 끼웠다는 평가가 많다. 시장 장악이 아닌 시장 형성에 초점이 있어서다. 익명을 원한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경제는 기업들이 ‘독식’을 하려는 성향 때문에 고꾸라지곤 했다. ‘배터리 동맹’의 미래가 어떨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독식하겠다’는 탐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긍정적인 결과를 맺을 것 같다.” 

실제로 국내 대기업들은 그동안 ‘독식’을 위해 출혈경쟁을 벌여왔다. 가장 대표적인 게 조선업이다. 조선업은 2000년대 이후 국내 ‘빅3(현대중공업ㆍ삼성중공업ㆍ대우조선해양)’는 기술력으로나 수주량으로나 전세계 1~3위를 싹쓸이했다. 하지만 2010년대에 들어 조선사들은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나서겠다면서 해양플랜트에 집중했고, 그 경쟁 과정에서 저가수주가 판을 쳤다. 그로부터 몇년 후 ‘빅3’ 조선사들은 수조원의 영업손실을 내면서 그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 했다. 

조선업뿐만이 아니다. 건설업도 비슷한 전례가 있다. 건설업은 2000년대 중반 제2의 ‘중동 붐’을 맞았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연평균 500억 달러 이상의 해외공사를 수주했다. 특히 중동에서 한국 건설사들의 입지는 남달랐다. 1970~1980년대에 다져놓은 경험치가 있었던 덕분이다. 

경쟁 과열 배제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건설사들은 독식을 위해 출혈경쟁을 벌였고, 저가수주의 늪에 빠져 큰 손실을 봤다. 2013년 삼성엔지니어링, GS건설, SK건설 등 대형 건설사들이 적게는 수천억원, 많게는 1조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본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런 맥락에서 이항구 선임연구위원의 지적은 새겨들을 만하다. 그는 “그동안 자동차 산업에서 완성차 업체가 갑의 입장이었던 것도, 전기차 시장의 성장과 함께 배터리 제조사의 입김이 커질 가능성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라면서 이렇게 꼬집었다. “미래차 시장에선 누구든 ‘독식’을 통해 갑으로 올라서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출혈경쟁이 시작되고 그로 인해 모두가 힘들어진다. 이제는 완성차 업체가 모든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할 수도 없고, 하려 해서도 안 된다. 배터리 제조사 역시 완성차 업체를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미래차 시장에선 공존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부품과 기술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 탓에 완성차 업체든 배터리 제조사든 혼자서 감당할 수 없어서다. 현대차그룹과 배터리 3사의 만남에서 시장이 협력을 통한 시너지를 기대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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