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 사업서 잡음 끊이지 않는 이유

대한적십자사는 11번의 면역검사장비 입찰공고를 내놓고도 장비 구입에 실패했다.[사진=연합뉴스]
대한적십자사는 11번의 면역검사장비 입찰공고를 내놓고도 장비 구입에 실패했다.[사진=연합뉴스]

허가도 안 받은 의료기기를 팔겠다며 입찰에 참여한다. 하지도 않은 실험을 했다고 서류를 내기도 한다. 수주를 독점하던 업체는 가격 담합을 벌이다 적발됐다. 돈이 되는 사업이라면서 국회를 동원해 사업 민영화 추진도 압박한다. 이런 탐욕스러운 업체가 판치는 곳이 바로 혈액 시장이다. 이 시장의 근간은 국민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내준 숭고한 피다. 철저히 공공성을 좇아야 하는 데도 이해관계자들은 돈을 갈구하고 있다.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다. 더스쿠프(The SCOOP)가 혈액사업서 잡음이 끊이지 않는 이유를 취재했다. 

대한적십자사가 4년간 11차에 이르는 입찰공고를 올리고도 구입하는 데 실패한 장비가 있다. ‘면역검사장비’다. 이는 국민들이 매년 2800만여 건의 헌혈로 내어준 혈액의 적격성을 검사하는 장비다. 수혈에 치명적인 바이러스 4개 항목(에이즈ㆍB형간염 ㆍC형간염ㆍ인간T세포백혈병 등)의 감염 여부를 체크하는 만큼 가장 중요한 장비 중 하나로 꼽힌다. 

대한적십자사는 2016년부터 ‘면역검사장비 일원화 추진 사업계획’을 통해 이 장비를 새롭게 구입하려고 했다. 운용 중이던 장비가 너무 낡았기 때문이었다. 총 29대의 장비 중 2006년과 2007년 도입된 장비는 각각 4대, 22대였다. 장비 종류가 두개뿐이어서 바이러스 4개 항목을 나눠 검사하는 것도 불편했다. 기왕이면 4개 항목을 한꺼번에 검사할 수 있는 단일장비로 교체해 효율화도 꾀하자는 게 ‘면역검사장비 일원화 추진 사업계획’의 목적이었다. 

대한적십자사는 2016년 9월 첫 구매 입찰공고를 냈지만 상황은 예측하지 못한 쪽으로 흘러갔다. 언급했듯 총 11차례의 입찰공고가 나왔고, 지금도 면역검사장비를 교체하지 못했다. 갖가지 구설도 쉼 없이 흘러나왔다. 보건복지부는 2016년 특별감사를 통해 입찰 과정의 미비점을 밝혀냈다. 당시 복지부는 ‘총재 결재가 아닌 본부장 전결 처리’ ‘계약 업무 소홀’ ‘사전규격공개 지연’ ‘외부전문가 참여 부족’ 등을 꼬집었다. 

2018년 2월엔 하지도 않은 실험을 실제로 한 것처럼 꾸며 문서를 제출한 업체가 입찰에 참여했다. 국내 의료기기업체인 PCL이었다. 대한적십자사는 이 회사를 사문서 위조 및 입찰 방해 등의 이유로 고발조치했다. 입찰에 6개월간 참여할 수 없는 부정당업자 제재 징계도 내렸다. 

그런데 최근엔 허가조차 받지 않은 제품으로 대한적십자사 입찰의 서류심사를 통과하는 황당한 사건까지 터졌다. 대한적십자사는 지난해 5월 올린 11차 입찰공고마저 ‘무응찰 유찰’로 무산되자 한국애보트와 수의시담(경쟁입찰이 아닌 상대방을 미리 정하고 진행하는 형식)으로 계약을 진행했다. 면역검사장비와 장비에 투입할 시약을 동시에 구매하는 계약이었고, 한국애보트가 제출한 서류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통과됐다. [※ 참고: 한국애보트는 미국에 본사를 둔 헬스케어 업체다. 현재 대한적십자사가 교체를 준비하고 있는 노후 면역검사장비의 제조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애보트는 ‘프리즘넥스트’란 이름의 장비로 입찰에 참여해놓고, 정작 장비에 넣는 시약은 프리즘넥스트의 구형장비인 ‘프리즘’으로 사용허가를 받은 제품을 제출했다. 시약은 어떤 검사장비에 넣느냐에 따라 결과값이 달라진다. 

이 때문에 각각의 장비마다 식약처로부터 품목허가를 받아야 한다. 당연히 한국애보트가 제출한 시약은 ‘무허가’였다. 이 회사는 2016년ㆍ2018년 진행된 입찰에서도 ‘무허가 시약’으로 참여했었다. 

문제는 대한적십자사가 서류 검토 등 심사과정을 마칠 때까지 이를 까맣게 몰랐다는 점이다. 내부 공익제보로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지만 뒤처리도 느렸다. 내부감사청구가 지난해 8월 접수됐는데도 대한적십자사는 7개월이나 지난 올해 3월에야 한국애보트를 6개월간 입찰참가 자격제한 처분을 받는 부정당업체로 지정했다. 한국애보트를 의료기기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소한 것도 최근의 일이었다.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는 “식약처에 조사를 의뢰하고 결과를 받아내는 과정에서 시간이 조금 걸렸다”면서 “현재 경찰에서 사건을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이 입찰 사건의 경과만 놓고 보면 촌극이 따로 없다. 장비를 사겠다고 4년간 11건이나 공고를 올려놓고 정작 구매에는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에 고발된 업체가 두곳이다. 한쪽은 서류부정, 다른 쪽은 무허가 의료기기 입찰로 도덕적 해이가 심각하다. 

무허가 시약으로 입찰

문제는 이런 사태가 혈액 사업 전반에서 또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혈액업계 관계자의 한탄을 들어보자. “혈액 사업은 국민 생명과 직결돼 있다. 수혈이 필요한 환자와 병원 등은 늘 혈액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서다. 이 때문에 정부는 헌혈을 증진하는 데 목적을 둔 사업이라면 관련 예산을 아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혈액 사업은 철저히 공익을 추구해야 한다. 혈액 사업의 근간은 아무 대가 없이 자신의 혈액을 내준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막대한 예산을 두고 이해관계자끼리 돈 싸움을 벌이기 일쑤란 거다.” 

혈액 사업은 대체로 몸집이 크다. 이번 면역검사장비 교체 사업에 책정된 예산만 5년간 677억원이다. 불법과 편법이 난무하는 ‘전錢의 전쟁’이 벌어질 만하다. 실제로 이런 사태는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대한적십자사는 헌혈에 필요한 혈액백을 1~2년 단위로 입찰을 내고 민간업체에 맡겨왔다. 1970년대 최초로 폴리염화비닐(PVC) 혈액백을 개발한 녹십자MS가 이 사업을 꾸준히 수주했다. 매년 150억원가량의 예산이 책정되는 큰 사업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사업자가 바뀔 전망이다. 녹십자MS가 부정당업자 제재를 받으면서 2년간 대한적십자사의 입찰공고에 참여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사유는 입찰 담합이다. 녹십자MS는 하도급업체였던 태창산업과 공급물량과 입찰가격을 담합했다는 혐의로 공정위로부터 과징금 처분을 받았다. 혈액백 사업은 녹십자MS의 대표적인 캐시카우였다. 

정부 예산 155억원이 애꿎게 소모될 뻔하기도 했었다. 지난해 국회 국방위원회는 2020년 국방부 예산안에 ‘진료지원(입영신체검사 민간위탁)’ 사업을 추가했다. 대한적십자사가 하던 군인 혈액검사사업을 민영화하자는 게 이 사업의 골자였는데, 사업자 교체에 따른 비용으로 155억원이 책정됐다. 

추가로 예산을 책정해 군 혈액검사를 민간의료기관에 맡겨야 하는 이유가 뚜렷하지 않았는데도, 이 사업은 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통과했다. 이후 본회의 문턱에서야 물거품이 됐다. 당시 국회 국방위 관계자는 “호시탐탐 신규 이권을 노려왔던 민간혈액기관에서 군 혈액검사 사업의 민영화를 추진해달라는 민원을 국회에 넣었다”면서 “하마터면 군 혈액관리가 이들의 수익창출 수단이 될 뻔했다”고 꼬집었다.

국내 혈액 사업을 총괄하는 대한적십자사의 혈액원 예산만 해도 4290억원(2020년 기준)으로 적지 않다. 이중 국고보조금으로 책정된 예산이 115억원이다. 혈액 사업을 둘러싼 돈 싸움이 치열할수록 혈세 낭비도 심각해진다는 얘기다.

업계 기득권 간의 싸움


대한적십자사의 허술한 대처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면역검사장비 입찰 사건의 경우, 대한적십자사는 “직원의 부주의로 벌어진 사태”라고 해명했지만 설득력이 부족하다. 부주의를 바로잡을 기회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해당 입찰 건은 2018년과 2019년 연속으로 국정감사에서 입찰 공정성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됐었다. 이때 사업을 꼼꼼히 살펴보기만 했었어도, 국가 혈액 사업이 무허가 의료기기로 기만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상황이 이런데도 관리ㆍ감독의 책임이 있는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 혈액 사업 의료기기 담당 주무부처인 식약처는 한국애보트의 무허가 의료기기 입찰 행위를 두고 시정명령을 내리는 데 그쳤다.

이 때문인지 혈액 사업도 제 길을 못 찾고 있다. 헌혈률은 3년 연속 감소세(2017년 5.69%→2018년 2.58%→2019년 5.38%)다. 헌혈가능인구 대비 실헌혈자 비율인 실질헌혈률은 더 심각하다. 2014년 7.98%로 정점을 찍고 6년 연속 마이너스다. 지난해엔 7.08%에 그쳤다. 

문제는 이런 피해를 고스란히 국민들이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가령 면역검사장비는 혈액의 적격 여부를 판단하는 장비다. 교체가 늦어지면 수혈이 필요한 병원에 혈액을 신속하게 공급하는 일도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다. 지금도 대한적십자사의 중앙혈액센터엔 13년이 넘게 가동 중인 노후 검사장비가 놓여있다. 혈액 사업의 유일한 잣대는 돈이 아니다. 국민건강이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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