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석 AQ테일러 대표

19살 때부터 양복점에서 일했다. 견습공ㆍ봉제공이란 꼬리표를 6년 만에 떼낸 그는 4년 넘게 ‘패턴’을 배웠다. 68세 ‘양복 명장’ 장병석 AQ테일러 대표는 그렇게 재단사가 됐다. 이제 눈을 감고도 양복을 척척 지어낼 수 있을 것 같은 나이, 하지만 그는 오늘도 ‘꿈’을 재단한다. “아무리 어려워도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아직 접지 않았습니다.”

맞춤양복 업계에 발을 들인지 49년차인 장병석 AQ테일러 대표는 여전히 배움에 목마르다.[사진=천막사진관]
맞춤양복 업계에 발을 들인지 49년차인 장병석 AQ테일러 대표는 여전히 배움에 목마르다.[사진=천막사진관]

장병석 AQ테일러 대표는 재단사다. 업계에 발을 들인 지는 49년, 재단사 경력은 39년, 말 그대로 ‘양복 명장’이다. 두 손으로 섬세하게 옷을 지어야 하는 업業의 특성 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양복점엔 장인 냄새가 가득했다. 장 대표의 양복점 운영 철학도 딱 그렇다. “내가 만든 옷이 손님 몸에 딱 맞지 않으면 밤잠을 설친다”고 그는 털어놨다.

올해로 68세인 그가 패션 선진국인 이탈리아ㆍ프랑스 등을 매년 방문해 배울 거리를 찾는 것도, 그 나라에서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맞춤양복 전문서적을 구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들춰보고 응용하는 것도 ‘옷을 잘 만들고 싶어서’다. 68세 ‘양복 명장’의 꿈이 이것이라니…. 더스쿠프(The SCOOP)가 그를 만났다. 

✚ 맞춤양복을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나. 
“‘앞으로 기술시대가 올 것’이라던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말씀을 듣고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일은 특성상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는 기술직이더라. 역사적으로는 영국 왕족인 테일러 가문이 하던 일이다. 그런 점들에 확 끌렸다.”

✚ 그런데 정작 창업은 2000년에 했다.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재단사로 일할 때는 창업은 꿈도 안 꿨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경영상 어려움으로 문 닫는 곳들이 생겨나면서 위기감이 생겼다. 1980년대에만 해도 꽤 유명한 양복점이던 AQ테일러가 매물로 나왔고, 이를 인수하면서 내 가게를 열었다. ‘어쩌다 보니 창업’한 셈이다.”

✚ 재단사라는 직업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신체 치수(20여 가지)를 재서 ‘패턴화’하는 것부터 옷(양복)을 재단하고, 봉제하고, 신체에 맞게 완벽하게 수정해서 완성하기까지를 총괄 컨트롤하는 사람이다.”

✚ 패턴화라는 건 뭔가.
“신체 치수를 재서 종이에 그리는 건데, 일종의 양복 설계도다.”

✚ 상당한 노하우가 필요할 것 같은데.
“당연하다. 패턴기술을 배우는 데만 10년 걸렸다. 19살부터 양복점 일을 시작했는데, 6년간 심부름과 바지 봉제, 상의 견습공 등을 거쳤다. 그 이후에야 패턴 만드는 걸 배울 수 있었다.”

✚ 패턴은 얼마나 배웠나. 
“4년 배웠다.”

✚ 봉제공으로 일했어도 되지 않았나.
“그렇다. 하지만 난 재단사를 해야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이 업을 완전히 터득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 패턴 만드는 기술이 매우 중요한 작업인 것처럼 보인다. 
“건축설계자에 따라 집이 달라지는 것처럼 옷도 재단사의 설계 노하우에 따라 질이 달라진다. 패턴을 모르면 몸에 딱 맞는 옷을 만들 수가 없다. 옷을 수정할 때 뭘 손봐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다.”

✚ 요즘 같은 시대에도 이런 일이 필요한가. 
“모르는 소리다. 기성복 제조에도 재단사가 필요하다. 기성복도 패턴이 없으면 못 만들고, 패턴 기술에 따라 질이 달라진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에서 나오는 기성복이 일반 기성복들과 착용감이 다른 이유다. 그만큼 재단사의 역할은 중요하다.”

✚ 재단사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뭔가.
“맞춤양복은 수정 과정을 거친다. 예컨대 목 뒤 경추 부분이 약간만 잘못돼도 윗도리 아랫단이 운다. 왜 그런 문제가 생기는지 잘 몰라서 처음엔 꽤 답답했다.”

✚ 10년을 배워 재단사가 됐는데도 그런 문제를 잡지 못했나. 
“그렇다. 그런 건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패턴기술 지식이 축적되지 않았고, 배울 곳도 없었다.”

장 대표가 구입했던 외국의 패턴 전문서적들.[사진=더스쿠프 포토]
장 대표가 구입했던 외국의 패턴 전문서적들.[사진=더스쿠프 포토]

✚ 어떻게 해결했나.
“맞춤양복 종사자들의 연합체인 ‘세계주문양복연맹’ 총회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다들 자기가 만든 양복들을 입고 오는데, 이탈리아인들이 입은 양복이 어찌나 멋지던지 넋을 놓고 봤다. 체형이나 체격이 좋은 게 아닌데도 옷이 매끈했다. 알아보니 이탈리아엔 설립된 지 200년이 넘은 재단학교가 있고, 여기서 인재들을 양성하더라. 독일에도 그런 학교가 있고. 그래서 이런 재단학교에서 발간하는 패턴 전문서적을 구해 탐독하면서 문제점을 개선해 나갔다.”

현재 장 대표는 이렇게 터득한 노하우를 토대로 다양한 체형에 황금비율을 적용, 최적화된 맞춤양복을 만들고 있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 의류제조업은 사양산업 아닌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키우지 못해 사양산업이 된 거다. 섬유산업의 종주국이었던 영국에는 ‘새빌 로(Savile Row)’라는 곳이 있다. 고급 맞춤양복 거리다. 정부가 맞춤양복 전문가들을 모아 일할 수 있게끔 배려한 덕분에 탄생한 거리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선 앞서 말한 전통 있는 재단학교가 인재를 양성한다. 프랑스는 사치품들을 한데 모아 명품 브랜드로 키웠다. 소상공인으로 출발한 루이비통이 세계적 명품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런데도 의류제조업이 사양산업이라고 할 수 있나.”

✚ 정부의 책임도 있다는 건가. 
“없다고 하긴 힘들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 이젠 기존 기술과 지식, 노하우가 제대로 전수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다.”

✚ 무슨 말인가. 
“너무 급하게 간다. 고작 몇 개월 배우고는 개업하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다. 그러면 명품화로 나아가기 힘들다. 예를 들어보자. 이탈리아 로마엔 ‘테일러 아카데미’라는 게 있다. 재단사를 양성하는 클래스라고 할 수 있는데, 기본이 10년이다. 여기서 일을 배우면 이탈리아 명품정장 브랜드 ‘키톤’ ‘브리오니’ 같은 곳에서 데려간다. 이렇게 전통 있는 아카데미도 최근 클래스 과정을 4년으로, 또 2년으로 줄였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을 위한 변경이었는데, 2년을 ‘마지노선’으로 봤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이마저도 길다는 불만이 나왔다.” 

 

✚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한국맞춤양복협회 회장을 하던 2000년대 후반, 이 시스템을 도입하려고 서울에 ‘테일러 아카데미’를 만들었다. 하지만 2년도 힘들다는 말이 너무 많아서 4개월로 기간을 단축했다. 그래 놓고 노하우도 없이 개업부터 한다. 남 밑에서는 일하지 않고 돈만 벌겠다는 거다. 처음엔 마케팅 잘해서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실력이 없이 오래가겠나. 그럼 그 고객들도 기성복으로 가거나 명품 브랜드로 간다. 악순환이다.”

✚ 창업자의 마인드도 변화해야 한다는 건가.
“그렇다. 앞서 말한 것처럼 기성복 업계도 패턴 만드는 기술을 우습게 봐선 안 된다. 일부 브랜드가 디자이너들을 몇 달 정도 해외연수를 보내기도 하는데 그렇게 해서 노하우를 전수받기는 힘들다. 결국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기술력 전수할 환경 조성돼야

✚ 우리나라가 맞춤양복 분야에 경쟁력은 있나. 
“사실 양복 짓는 기술력에 있어서 한국은 최고다. 예전에 국제기능올림픽에 양복 부문이 있었는데, 우리나라가 1967년부터 참가해서 1978년까지 12회 연속 금메달을 땄다. 이렇게 독식하다 보니까 선진국들이 맞춤양복 부문을 대회 종목에서 없애버렸다. 실력을 잘 살리기만 하면 우리도 명품 브랜드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얘기다.”

나름 포부가 큰 장 대표지만, 요즘은 임대료를 내기에도 벅차다. 그는 “재단사로 일할 때는 내가 하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됐는데, 지금은 매월 임차료를 걱정해야 하니 기본이 흔들릴까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장 대표는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접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꿈을 잃었다’고 한탄한다. ‘꿈이 있어도 실현하기 힘든 세상’이란 푸념도 곳곳에서 나온다. ‘양복 명장’ 장병석, 그런 그가 ‘최고’란 꿈을 접지 않겠다며 세상을 향해 도전장을 던졌다. 우린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글 =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사진 = 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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