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중도인출 증가세에 숨은 문제

적립한 퇴직연금을 미리 찾아 쓰는 퇴직연금 중도인출 금액이 증가하고 있다. 중도인출 사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주택구입과 임대보증금 마련이다. 혹자는 ‘영끌’로 집을 사려는 사람이 늘어난 탓에 중도인출이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퇴직연금의 수익률이 높았다면 노후를 불안하게 만들면서까지 중도인출을 했겠느냐는 거다.

긴급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퇴직연금을 중도인출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사진=뉴시스] 

# 평범한 직장인 장덕현(가명·45)씨는 최근 마음이 심란하다.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도 연일 치솟는 집값 때문이다. 장씨는 강서구 방화동에 있는 아파트에서 전세로 살고 있다. 20년이 넘은 아파트의 전세보증금은 3억원인데, 최근 걱정거리가 생겼다.

11월 전세계약 갱신을 앞두고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1500만원 올려달라고 통보하면서다. 당장 마련해야 할 1500만원의 보증금도 문제지만 계속해서 전세로 살아야 할지도 고민이다. 치솟는 집값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이라도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어쩔 수 없이 장씨는 경기도 김포시로 눈을 돌렸다. 직장을 오가는 교통도 편리하고 서울에서도 멀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열심히 발품을 판 장씨는 김포시 장기동에서 마음에 드는 아파트를 찾았다. 매매가는 5억2000만원. 하지만 장씨가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털고, 빌릴 수 있는 돈이란 돈을 모조리 끌어모아도 3000만원가량이 부족했다. 그때 직장 동료로부터 ‘무주택자가 집을 살 땐 퇴직연금을 중도 인출 할 수 있다는 얘길 들었다. 장씨는 노후를 위해 퇴직연금을 지켜야 할지 내집 마련을 위해 연금을 중도인출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최근 퇴직연금을 중도인출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17년 상반기 8163억원이었던 퇴직연금 중도인출 금액은 지난해 상반기 1조2584억원으로 54.1%(4421억원) 증가했다. 퇴직연금을 중도 인출한 가입자도 같은 기간 2만6323명에서 3만6702명으로 39.4% 늘었다.

이런 추세는 올 1분기에도 이어졌다. 이 기간 5대 시중은행(신한은행·우리은행·하나은행·KB국민은행·NH농협은행)의 퇴직연금 중도인출 규모는 2594억원을 기록해 전년 동기(1960억원) 대비 32.3%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퇴직연금을 중도인출할 수 있는 사유가 정해져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려할 만한 증가세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건데, 정부가 퇴직연금 중도인출 사유로 코로나19를 인정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현재 관련 법안이 법제처 심사를 받고 있어, 코로나19를 사유로 한 퇴직연금 중도인출은 이르면 10월 초부터 가능할 전망이다.[※참고 : 퇴직연금 중도인출 사유로 인정되는 것은 ▲무주택자가 본인 명의의 주택 구입 ▲연간 임금 총액의 12.5% 넘는 의료비 부담 ▲가입자가 파산선고를 받거나 개인회생절차에 들어갔을 때 ▲가입자가 본인·배우자·부양가족의 대학등록금, 혼례비, 장례비를 부담할 경우 ▲천재지변 등으로 피해를 입었을 때 등 5가지다. 확정급여형(DB·Defined Benefit), 확정기여형(DC·Defined Contribution), 개인퇴직연금(IRP·Individual Retirement Pension) 중 DB형은 중도인출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퇴직금 중도인출이 늘어나는 이유는 또 있다.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음)’로 집을 사려는 무주택자들이 부쩍 증가했다는 점이다. 이는 중도인출 사유에서 ‘무주택자 항목’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알 수 있다. 지난해 2분기 전체 중도인출 금액 1조2584억원 중 주택구입과 주택임대보증금 마련을 이유로 중도인출한 퇴직연금의 규모는 5746억원(주택구입 3664억원+임대보증금 2082억원)으로 전체의 45.6%를 차지했다. 부동산 가격이 가파르게 치솟은 최근 ‘집을 못 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패닉바잉(Panic Buying·공황구매)’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퇴직연금 중도인출이 더 늘어났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늘어나는 퇴직연금 중도인출

퇴직연금이 ‘노후준비’라는 본래의 목적과 다르게 사용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데, 그냥 지켜봐야 할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선 중도인출 증가세에 숨은 퇴직연금의 문제점을 살펴봐야 한다. [※ 참고: 여기서 잠깐. 중도인출이 급전이 필요한 서민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지라는 옹호론도 있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퇴직연금의 중도인출이 늘었다는 건 퇴직연금을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로 풀이할 수도 있다. 낮은 수익률이란 퇴직연금의 케케묵은 논란이 중도인출의 진짜 원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거다. 필자는 이를 전제로 깔고, 퇴직연금의 문제점을 살펴보려 한다.]

■문제❶ 턱없이 낮은 수익률 = 자, 지금부터 질문을 던져보자. 퇴직연금이 수익률이 5~10%에 달해 오래 묵힐수록 자산이 늘어나더라도 중도인출하려는 가입자가 많을까. 필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럼 지금처럼 중도인출자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같은 맥락에서 답은 간단하다. 퇴직연금을 유지하는 것보다 인출해 사용하는 게 유리하다는 인식이 크다는 거다. 퇴직연금을 오랜 기간 나눠받는 연금이 아닌 일시금으로 수령하는 가입자가 많은 것도 같은 이유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올 2분기 국내 시중은행의 퇴직연금 수익률(DC형·IRP형)은 0.95~1.91%에 불과했다. 10년 장기 수익률은 3%에도 미치지 못했다. 퇴직연금 가입자 입장에선 쥐꼬리만 한 수익을 노리고 목돈을 묶어두느니, 당장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하다.

■문제❷ 100% 인출 문제 = 특정 사유가 발생하면 적립한 퇴직연금을 모두 찾을 수 있는 점도 문제다. 특별한 사유가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이 때문에 노후의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는 측면도 있다. 필자가 중도인출 사유별 인출 가능 금액을 구체화해 노후자산이 사라지는 최악의 경우는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이를 위해선 퇴직연금 중도인출과 비슷한 제도인 퇴직연금 담보대출을 활성화할 필요도 있다. 퇴직연금 담보대출은 대출 한도를 적립금의 50%로 제한하고 있다. 최소한의 노후는 보장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해 놨다는 거다. 퇴직연금이라는 담보가 확실한 만큼 대출이자를 대폭 낮춰 중도인출보단 담보대출을 이용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문제❸ 지나치게 넓은 허용 범위 = 퇴직연금 중도인출을 허용하는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점도 따져봐야 한다. 2018년 보험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가입자 사망 ▲영구장애 발생 ▲근로활동 중단 등으로 중도인출의 허용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 영국은 건강상의 이유로 퇴직하거나 기대수명이 1년 이하인 경우에만 중도인출을 허용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중도인출이 불가능하단 거다. 일부 전문가들이 우리나라도 퇴직연금 중도인출 허용범위를 단계적으로 축소해 더욱 안정적인 노후준비 수단으로 거듭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부동산 가격 이슈와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은 반복될 수 있다. 퇴직연금 중도인출 논란이 계속해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퇴직연금이 노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이 필요한 때다.

글= 조경만 금융컨설턴트(엉클조 대표) | 더스쿠프
iunclejo@naver.com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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