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권에 면죄부 준 ‘무늬만 재정준칙’

정부는 구속성보다 유연성에 무게를 둔 준칙을 내놓으면서 “최근 다른 나라들의 흐름도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그렇지 않다. OECD 회원국들은 강력한 재정준칙을 운영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정부는 구속성보다 유연성에 무게를 둔 준칙을 내놓으면서 “최근 다른 나라들의 흐름도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그렇지 않다. OECD 회원국들은 강력한 재정준칙을 운영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정부가 국가채무 등 재정지표가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하는 재정준칙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름하여 ‘한국형 재정준칙’. 그런데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곳곳에 구멍이 뚫려있다. 그나마 5년 뒤, 2025년부터 시행하겠다니 현 정권은 해당되지도 않는다.

국가신용등급을 평가하는 세계적 신용평가사들은 한국의 적정 국가채무 비율을 40%대 초반으로 제시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복지예산이 늘어나면서 국가채무가 급증했다. 특히 올해는 추가경정예산이 네차례나 편성되면서 국가채무가 100조원 넘게 불어났다. 

코로나19 사태로 확장재정이 불가피했다지만, 선거까지 맞물리면서 국가채무 비율은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40%를 넘어섰다. 현 정부 임기 마지막 해인 2022년에는 50%도 뛰어넘게 된다.

재정준칙 도입은 2016년부터 추진됐다. 하지만 20대 국회에선 제대로 논의조차 못하고 폐기됐다. 기획재정부는 당초 8월에 재정준칙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코로나19 사태로 재정 지출을 확대해야 하는데 제약을 받는다며 반대했다.  

청와대와 여당의 눈치를 보면서 미루다가 10월에야 내놓았지만, 재정준칙 적용은 2025회계연도부터 하겠다고 한다. 나랏빚이 급증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에선 적용되지 않는다. 뒤늦게 도입 방안을 발표했지만, 다음 정권에서 지키라는 면피용이다.

정부는 ‘국가채무 비율은 국내총생산(GDP)의 60% 이내, 연간 재정적자는 3% 이내로 관리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민주당은 야당 시절 “재정건전성의 마지노선인 40%가 깨졌다”며 박근혜 정부를 비판했고, 재정건전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것이 60%로 느슨해진 데다 구속력이 약해 실효성이 의문시된다. 준칙이 정한 한도를 벗어나도 (지출 효율화와 수입 증대 등) ‘건전화 대책’만 마련하면 그만이다.

‘3% 이내’라는 재정적자 한도에도 꼼수가 작용한 모습이다. 정부는 그동안 재정건전성을 평가할 때 써온 관리재정수지 대신 통합재정수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관리재정수지는 통합재정수지에서 국민연금, 사학연금,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 흑자를 내고 있는 사회보장기금의 수지를 제외한 것이다. 

적자폭이 큰 관리재정수지 대신 상대적으로 양호한 통합재정수지를 기준으로 택함으로써 물타기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게다가 ‘경기 둔화에 대응할 필요가 있는 경우’ 등 적자폭을 늘릴 수 있는 예외조항을 두었다. 

정부는 국가재정법을 개정해 재정준칙 도입 근거로 삼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재정적자 한도는 법이 아닌 시행령에 위임해 5년마다 재검토하기로 했다. 정부가 제시한 기준 자체가 지나치게 유연한 데다 재정적자 한도마저 정부 마음대로 시행령을 고쳐 바꿀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있으나 마나 한 준칙이다. 

정부는 구속성보다 유연성에 무게를 둔 준칙을 내놓으면서 “최근 다른 나라들도 탄력적 재정 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재정준칙을 보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주요국들은 일찍이 재정준칙을 도입해 나라곳간을 관리해왔다. 선진국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 터키와 한국만 재정준칙을 도입하지 않았다.

독일은 1969년부터 헌법에 재정준칙을 규정했다. 2009년 헌법을 개정해 더욱 엄격한 ‘부채 브레이크’ 제도를 도입했다. 연방정부의 신규 채무가 GDP 대비 0.35% 이내여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를 통해 독일은 2019년 정부부채 비율을 2011년 대비 20%포인트 줄였다. 강력한 준칙에 기반을 둔 탄탄한 재정이 유럽에서 가장 앞선 코로나19 대책의 밑천이 됐다. 

영국은 ‘GDP 대비 공공부문 순채무 비율을 전년보다 감축해야 한다’고 법에 명시했다. 미국은 2010년 예산집행법에 ‘페이고(pay-go)’ 원칙을 명문화했다. 지출이 수반되는 정책을 세우거나 법안을 제출할 때 반드시 재원조달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와 달리 일본은 유명무실한 재정준칙으로 재정건전화는커녕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200%를 넘어서며 불명예스러운 세계 1위 국가이자 코로나19 대책에서도 뒤처졌다. ‘2025년도에 국가와 지방을 합쳐 기초재정수지(PB) 흑자화를 목표로 한다’는 느슨한 재정준칙이 악영향을 미친 결과다. 이것도 헌법과 법률이 아닌 우리나라 국무회의에 해당하는 내각 결의다.

마이너스통장 무서운 줄 모르고 마구 쓰다가 가계가 거덜 나듯 선거와 지지층 표를 의식해 선심성 사업에 돈을 뿌리다간 재정이 파탄 나고 국가신용등급도 추락한다. 독일식 구속력 있는 재정준칙인가, 일본식 느슨한 준칙인가. 국회에서 꼼꼼히 따져 목적에 부합하는 재정준칙을 입법화해서 즉각 시행해야 할 것이다. 

양재찬 더스쿠프 편집인
jayna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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