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타임과 제2의 조두순

“감옥에서 60년 살게 해주세요.” 심리치료를 받던 아이가 그림을 그린 후 적은 문구다. 납치죄 10년, 폭력죄 20년, 유기죄 10년, 장애를 입힌 죄 20년…. 하지만 아이의 몸과 마음을 다치게 한 범인에게 내려진 벌은 징역 12년, 전자발찌 7년, 신상공개 5년이다. 뒤늦은 후회지만 만약 그때 법이 더 강력했다면 어땠을까. 우리나라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더스쿠프(The SCOOP)가 ‘조두순 골든타임’과 후회의 악순환을 짚어봤다. 

재범률이 높은 아동 성범죄는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재범률이 높은 아동 성범죄는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2005년 2월 어느 날, 집에서 자고 있던 9세 소녀가 갑자기 사라졌다. 이웃에 살던 아저씨가 몰래 침입, 자고 있던 아이를 납치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남자는 여러 차례 아이를 강간했고, 그것도 모자라 비디오테이프로 녹화까지 했다. 혹시라도 범행이 들통날까 두려웠던 남자는 집에 보내준다며 아이를 쓰레기봉투에 들어가게 한 뒤 그대로 인근 야산에 묻었다. 아이는 산소 부족으로 사망했다. 수일 후, 시신을 수습하던 과정에서 필사적으로 쓰레기봉투를 뚫으려 했던 흔적이 발견되면서 시민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15년 전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발생한 이 사건의 범인은 아동 성범죄 전과 2범 존 쿠이였다.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모범수로 2년 만에 출소해 또다시 범죄를 저질렀다. 끔찍한 사건 이후 플로리다주는 희생된 아이의 이름을 딴 ‘제시카 런스포드법’을 제정했다. 아동 성범죄자의 최저 형량을 25년으로 높이고 출소 후에도 평생 전자발찌를 채워 집중 감시하도록 했다. 

그보다 1년 앞선 2004년, 스위스에선 위험한 성범죄자를 평생 사회에서 격리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성범죄 전과자가 석방된 뒤나 가석방 중에 다시 범죄를 저지르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법안이 발의되기까진 성범죄 피해자 가족의 역할이 컸다. 국민투표를 하기 위해선 10만명의 서명이 필요했는데, 그들은 두배에 가까운 서명을 받아 입법화를 도왔다. 해당 법안은 전체의 56.2%가 찬성했다.

2008년 겨울 전 국민을 분노케 한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이 오는 12월 12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다. 검찰은 1심에서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하지만 법원은 조두순이 고령(당시 56세)인 데다 술에 취해 심신미약이었다는 이유로 ‘심신장애로 인하여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한다’는 형법 제10조제2항에 따라 징역 12년형을 선고했다. 단일사건 유기징역 상한인 15년에서 3년을 감형한 거다.

만약 조두순 사건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 플로리다주나 스위스에서 발생했다면 그는 올해 교도소 문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최소 25년 후에야 출소할 수 있다. 2020년이 아니라 2033년에 출소하거나 아예 못 나올 수도 있단 얘기다. 전자발찌 역시 7년이 아니라 평생 차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두순 사건은 한국에서 벌어졌다.

조두순에게 적용되지 않는 법

조두순 사건 발생 이후 처벌을 강화하고, 재범을 막아야 한다며 국회에선 여러 법안들이 발의됐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20 09년 10월 박선영 당시 자유선진당 의원은 ‘심신장애로 인한 형의 감경에 성폭력범죄 제외’ ‘무기징역의 가석방 요건을 30년으로’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2010년 8월엔 김상희 당시 민주당 의원이 “형기 종료 후라도 적절한 보호관찰을 해야 한다”며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의미 있는 안건들이었지만 “책임주의 원칙에 위배” “이중처벌 논란” 등의 이유로 대안반영 폐기됐다. 

물론 법이 바뀌지 않은 건 아니다. 2010년 형법이 개정되면서 유기징역의 상한은 15년에서 30년까지로 길어졌고, 형을 가중할 경우엔 최대 50년까지 선고할 수 있게 됐다. 무기징역의 가석방 요건도 10년에서 ‘20년 이상 복역한 자’로 조정됐다. 아동·청소년에 대한 강간죄의 공소시효가 폐지되고, 전자발찌 착용 기한도 최대 30년까지 연장했다. 문제는 조두순 때문에 강화된 법이 정작 당사자인 조두순에겐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일까. ‘형벌 불소급의 원칙’ 때문이다. 형벌 불소급의 원칙은 과거의 행위에 대해 새로 법을 만들어 처벌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형벌은 범죄 행위 당시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을 받고 이후 만들어진 법률에 소급돼 처벌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조두순에게 더 무거운 형량을 내리려면 사건 발생 이전에 법이 강화됐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두순 사건 이후에도 유사 사건이 여럿 발생했다.[사진=뉴시스]
조두순 사건 이후에도 유사 사건이 여럿 발생했다.[사진=뉴시스]

다시 조두순이 판결을 받은 2009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조두순은 심신미약으로 감경돼 12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당시에도 유기징역을 가중할 경우엔 25년까지 선고할 수 있었다(현재는 50년까지 선고할 수 있다).

늦은 후회는 이제 그만

조두순 사건 이전부터 “무기징역을 감경할 때도 25년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형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법원은 귀를 닫았고, 국회는 불구경만 했다. 당시 조두순에게 25년까지 선고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심신미약 감경을 하더라도 20년은 사회로부터 격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조두순 사건 이후 형법이 개정됐고, 아동 성범죄에선 더 이상 심신미약이 인정되지 않는다. 2011년엔 ‘성폭력범죄자의 성충동 약물치료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다. 이른바 ‘화학적 거세’로 불리는 ‘성 충동 약물치료’ 제도가 도입됐다. 

한발 늦은 대처로 비록 조두순의 이른 사회복귀는 막지 못했지만 우리가 막아야 할 건 조두순 한명이 아니다. 조두순 이후에도 김길태 사건, 김수철 사건 등 잔혹한 아동성범죄 사건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만약에 그때 법이 통과됐더라면…” “처벌이 강화됐더라면…”이라는 후회는 너무 늦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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