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또 불구경

2019년 9월 16일. CJ대한통운은 이날 ‘최다 배송실적을 기록했다’며 자축했다. 하루 동안 총 909만개 박스를 배송했는데, 이 회사 소속 택배기사가 1만8000여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사 한명당 500개 넘는 박스를 나른 셈이었다. 과연 ‘물량 폭탄’을 맞은 택배기사에게도 자축할 만한 일이었을까. 올해는 더 심각하다. 물량이 급증하면서 택배 노동자 15명이 숨졌다. ‘죽음의 덫’을 걷어낼 수 있는 금배지들은 그사이 뭘 하고 있었을까. 더스쿠프(The SCOOP)가 택배기사를 사선으로 밀어넣은 덫을 취재했다. 

택배기사 처우를 개선할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은 20대 국회 때 처음 발의됐지만 임기 만료 폐기됐다.[사진=뉴시스]
택배기사 처우를 개선할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은 20대 국회 때 처음 발의됐지만 임기 만료 폐기됐다.[사진=뉴시스]

10월 27일 한진택배 마포 터미널을 현장점검한 직후,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표정은 무거웠다. “택배 노동자 과로사에 참담한 마음이다… 이번 정기 국회 내에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이하 생활물류법)’을 처리하겠다.” 바로 12일 전, 이 대표가 찾은 그곳에선 30대 택배기사 김모씨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김씨는 숨지기 4일 전에도 새벽 4시 반까지 배송을 하는 등 과중한 업무에 시달려 온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 어디 김씨뿐이랴. 올해에만 15명(10월 기준)의 택배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급증한 배송 물량을 견디지 못한 택배 노동자가 그만큼 많았다는 거다. 이 때문인지 이 대표 스스로 입에 담은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 처리’란 공언公言을 두고 숱한 택배 노동자들이 눈물과 한숨을 쏟아냈다. 

택배 노동자의 숙원이던 ‘생활물류법’이 20대 국회에서 처리됐다면 안타까운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원통함에서였다. 도대체 생활물류법은 왜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던 걸까. 시계추를 2019년으로 돌려보자. 생활물류법은 그해 8월 박홍근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처음 대표 발의했다. 택배산업이 6조1400억원(2019년 기준)대로 가파르게 성장했지만 관련법은 ‘화물자동차운수법’이 유일해 택배산업 전반을 규율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택배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서라도 생활물류법 제정은 긴요했다. 

실제로 이 법안에는 ▲생활물류서비스산업 발전 기본계획 수립 ▲택배사업자의 영업점 지도·감독 의무 부여 ▲택배종사자(택배운전종사자ㆍ택배분류종사자) 구분 ▲부정한 대가 수취(불법 리베이트) 금지 ▲택배종사자 휴식보장·안전대책 마련 ▲택배종사자 계약갱신청구권 6년 보장 ▲표준계약서 작성 및 사용 권장 등의 내용이 담겼다.

노동법상 근로자가 아닌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이하 특고 노동자)로 주당 71.3시간이란 고강도 노동에 시달려온 택배기사들은 생활물류법 처리에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이 법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야당과 택배사들의 반발이 거셌다. 

CJ대한통운ㆍ한진택배ㆍ롯데글로벌로지스·로젠 등이 소속된 택배사업자 단체인 한국통합물류협회는 그해 9월 입장문을 발표하고 법안의 전면 재검토를 요구했다. 협회 측은 “택배기사가 불법적으로 배송을 거부하면 택배 서비스의 이용자가 입을 피해를 방지할 수 없다” “택배사업자의 영업점 지도ㆍ관리 의무가 과도하다” 등의 반대 이유를 들었다. 

택배노조 측은 “책임 회피를 위한 변명”이라고 지적하면서 맞섰지만 그러는 사이 생활물류법은 국회의원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는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서야 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를 열었지만 별다른 진척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법안은 20대 국회 종료와 함께 임기만료폐기됐고, ‘공’은 21대 국회로 넘어왔다. 

박홍근 의원은 지난 6월과 10월 해당 법안을 수정해 재발의한 상태다. 금배지들이 택배 노동자 관련 현안을 뒷전으로 미룬 건 또 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의 허점을 메우지 않은 것이다. 그럼 산재보험법의 문제는 뭘까. 2011년 택배기사 등 특고 노동자도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참고 : 택배기사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 특례방식에 따라 사업주(대리점)와 종사자(택배기사)가 보험료를 절반씩 부담한다.] 문제는 특고 노동자에게 산재보험가입은 의무가 아닌 선택 사항이어서 ‘적용 제외 신청’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택배 물량이 급증하면서 과로사하는 택배기사가 늘고 있다.[사진=뉴시스]
코로나19 사태 이후 택배 물량이 급증하면서 과로사하는 택배기사가 늘고 있다.[사진=뉴시스]

이 때문에 사업주가 산재보험 가입을 회피하는 등의 문제가 속출했고, 택배기사 처우는 갈수록 악화했다. 실제로 택배기사의 산재보험 가입률은 39.7%(임종성 의원실· 2020년 5월 기준)에 불과하다. 지난해 업무 도중 사고를 당하고도 치료비용을 직접 부담한 택배기사는 전체의 98.9%(일과건강ㆍ356명 조사)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도 국회는 산재보험법 개정안을 처리하지 않았다. 특고 노동자의 산재보험 적용제외 신청제도를 폐지하는 내용 등을 담은 산재보험법 개정안이 19·20대 국회에서 9건이나 발의됐지만 모두 임기만료폐기됐다.[※참고 : 19대 국회에선 정청래ㆍ최봉홍ㆍ이명수ㆍ강기윤 의원, 20대 국회에선 한정애ㆍ강병원ㆍ문진국ㆍ하태경ㆍ서형수 의원이 9건의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모두 임기만료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선 노웅래ㆍ윤중병 의원이 2건의 관련 법안을 발의했고, 현재 계류 중이다.] 

법안이 국회에서 낮잠만 자는 사이 택배 현장에선 숱한 부조리가 싹텄다. 산재보험 적용제외 신청서를 ‘대필’해 작성하는 관행이 자리 잡은 건 대표적 사례다. 이는 10월 8일 배송 도중 가슴통증을 호소하다 사망한 CJ대한통운 소속 택배기사 김원종씨 사건을 통해 밝혀졌다. 고용노동부는 김씨의 산재보험 적용제외 신청서가 대필(대리점 계약 세무사)로 작성된 사실을 확인하고, 오는 12월까지 택배기사가 제출한 신청서를 전수 조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어쨌거나 국회에서 낮잠을 자던 택배 노동자 관련 법안들이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택배 노동자들의 처우 문제를 이대로 놔둬선 안 되겠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면서다. 한편에선 ‘이참에 부조리들을 뿌리 뽑아야 한다’ ‘생활물류법 처리를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좀 더 냉정하게 판단하고 장기적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지적도 숱하다. 생활물류법이 제정되더라도 택배기사 처우 개선을 위해선 갈 길이 멀다는 이유에서다. 김세규 전국택배연대노조 교육선진국장의 말을 들어보자. “생활물류법이 표준계약서를 체결하도록 하고 있지만 의무가 아닌 권고사항이다. 결국 택배사→대리점→택배기사로 이어지는 고질적 갑을관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생활물류법의 효과도 100% 기대하긴 어려울 수 있다.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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