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사의 이상한 청약 철회 거부 논리

고가 스마트폰을 구입하고 개통까지 했다. 그런데 계약 조건이 판매점에서 들었던 것과 너무 달랐다. 이런 경우 고객이 할 수 있는 건 청약을 철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통3사는 “개통한 스마트폰은 청약 철회 대상이 아니다”면서 “근거 규정도 있다”고 잘라 말한다. 과연 그럴까. 다른 가전제품은 구입 후에도 청약 철회가 가능한데 왜 스마트폰만 안 되는 걸까. 더스쿠프(The SCOOP)가 이통사의 이상한 청약 철회 거부 논리를 취재했다. 

이동통신사가 휴대전화 청약 철회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사진=뉴시스]

직장인 김태형(가명·36)씨는 최근 큰맘 먹고 휴대전화를 바꿨다. 4년간 쓴 휴대전화가 자꾸 말썽을 부린 탓이었다. 휴대전화 판매점 사장은 이벤트 할인·즉시 할인·약정 할인 등을 받으면 출고가가 120만원가량인 최신 스마트폰을 40만원대에 장만할 수 있다고 안내했고, 그 말을 믿은 김씨는 휴대전화를 개통했다.

하지만 허위·과장 광고였다. 김씨가 확인한 계약 내용은 판매점의 설명과 너무 달랐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김씨는 “판매점에 청약을 취소하겠다”고 쏘아붙였다. 하지만 판매점 사장은 “휴대전화를 이미 개통한 이상 기기불량이나 통화품질 문제가 확인되지 않으면 철회가 불가능하다”고 버텼다. 이동통신사에 문의한 결과도 다르지 않았다. 김씨는 이 휴대전화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용해야만 하는 걸까.

‘휴대전화 할부계약 청약 철회’를 둘러싼 소비자의 민원이 증가하고 있다. 스마트폰이 출시될 때마다 발생하는 불법보조금 논란과 휴대전화 대리점(판매점)의 과장·허위 광고 탓이다. 한국소비자원의 자료(2019년)에 따르면, ‘휴대전화 청약 철회 거부 피해구제’ 신청 건은 2015년 93건에서 2018년 171건으로 83.9% 증가했다.

그렇다면 김씨의 사례처럼 한번 산 휴대전화는 청약 철회가 불가능할까. 이통3사는 약관을 강조하면서 ‘제한적인 경우에만 청약 철회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KT 관계자는 “이용 약관의 번호이동 철회 조항을 근거로 개통 후 14일 이내라면 통화품질을 이유로 개통을 취소할 수 있다”며 “개통한 휴대전화기기가 불량으로 판정을 받은 경우도 가능하지만 약관 이외의 경우엔 청약을 철회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과연 그럴까. 할부거래에 관한 법률(할부거래법)은 이통3사의 주장을 반박한다. 법 제8조에 따르면 계약서를 받은 날로부터 7일, 계약서를 받은 날보다 재화 등의 공급이 늦게 이뤄진 경우에는 재화 등을 공급받은 날부터 7일 이내에 청약 철회가 가능하다. 대부분 소비자가 고가인 최신 휴대전화를 24~48개월 할부로 산다는 걸 감안하면 충분히 적용을 받을 수 있다.

■이통사의 이상한 거부❶ 청약 철회 품목 = 하지만 이통3사와 대리점·판매점은 이상한 논리를 내세워 청약 철회를 거부하고 있다. 가장 흔한 거부 이유는 ‘휴대전화는 청약 철회 품목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용 또는 소비로 인해 그 가치가 현저히 낮아질 우려가 있는 것으로 대통령령으로 정한 재화 등을 사용 또는 소비한 경우는 청약 철회가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할부거래법 제8조 제2항 2호를 근거로 든다. 언뜻 그럴듯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대통령령으로 정한 재화는 선박·항공기·자동차·전기 냉난방기·보일러 등인데, 휴대전화는 항목에 없다.

■이통사의 이상한 거부❷ 소비자 책임 = 이통사는 ‘할부거래법 제8조 제2항 2호가 아닌 1호를 이유로도 청약 철회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이 역시 설득력이 약하다. 이 조항의 골자는 ‘소비자에게 책임 있는 사유로 재화 등이 멸실되거나 훼손된 경우 철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LG유플러스 관계자는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데 고객의 동의가 필요하다”며 “개통시 고객번호, 휴대전화 고유식별번호(IMEI) 등이 기록돼 새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재판매도 어려워 청약 철회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단순한 변심으로 청약 철회가 늘어나고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증가할 수 있다”며 “계약 조건이 다르다는 이유로 청약을 철회하려면 계약서 등을 통해 소비자가 이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이통사의 주장은 억측에 가깝다. 소비자가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것과 새 단말기를 할부로 사는 것이 동시에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서다. 이통사와 함께 진행하는 휴대전화 개통 절차를 청약 철회를 거부하기 위한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삼는 건 과도하다는 얘기다.

단순변심을 이유로 내세운 청약 철회가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도 어불성설이다. 다른 가전기기는 그렇지 않아서다. 김주호 참여연대 팀장은 “할부로 구입한 다른 가전기기는 고객의 마음이 바뀌면 얼마든지 청약을 철회할 수 있다”며 “휴대전화라고 다르게 볼 이유는 없다”고 지적했다.

휴대전화도 할부거래법에 따라 청약 철회가 가능하다.[사진=뉴시스]
휴대전화도 할부거래법에 따라 청약 철회가 가능하다.[사진=뉴시스]

그렇다고 이통사가 휴대전화 청약 철회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아니다. 공정위 관계자는 “계약서나 약관에 소비자의 책임 사유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이 조항을 소비자가 동의한 경우에는 청약 철회 거부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 관건은 이통3사의 약관에 청약 철회 근거규정으로 적용할 만한 게 있느냐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런 약관은 전혀 없었다. 이통3사의 약관에는 ‘고객은 번호이동 후 14일 이내에 통화품질을 이유로 번호이동을 철회할 수 있다’는 내용만 포함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실 휴대전화 할부 계약 후 청약 철회 논란은 해묵은 과제다. 2018년 공정위는 실태조사를 통해 이통3사와 대리점·판매점이 소비자의 청약 철회 권리를 과도하게 제한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공정위는 당시 “‘개통하면 환불이 불가능하다’ ‘휴대전화는 청약 철회 예외 품목이다’ 등 잘못된 안내를 통해 청약 철회를 거부하는 것으로 파악됐다”며 “이는 법적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단순변심이라고 해도 할부거래법에 따라 청약 철회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2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잘못된 관행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이통3사는 여전히 약관을 이유로 소비자 청약 철회 권리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청약 철회 관련 소비자 민원이 증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며 “제도 개선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통3사가 청약 철회에 동의하지 않으면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소송밖에 없다. 이통3사가 휴대전화 개통으로 새 상품의 가치가 훼손됐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현행법상 소송을 통해 법원의 판결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이동전화 청약 철회·계약해지 피해구제 접수 건수는 지난해 314건, 올해 289건(10월 26일 기준)을 기록했다”며 “소비자원에 피해구제가 접수된 후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를 통해 조정절차를 한번 더 밟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분조위를 통해서도 조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한국소비자원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며 “소액심판청구소송 등 소송절차를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조윤미 C&I소비자연구소 대표는 “청약 철회는 소비자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권리로 반품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며 “이통사가 개통을 이유로 청약 철회를 거부하는 건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그는 “공정위가 2018년 실태조사 이후 아무런 사후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며 “휴대전화 청약 철회와 관련한 법적 해석을 명확하게 내리고, 이통사를 지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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