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9회 ①

 
풍신수길이 장종아부원친의 패전 소식을 받고 곧 20만 대군을 일으켜 구주로 출발하였다.

신속하기로 유명한 수길이 금번에는 천천히 나간다. 가다가 명승고적을 만나면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기도 하여 한 달이 지난 뒤에야 겨우 축전築前(치쿠젠) 축후築後(치쿠고)로 나가서 비후肥後(히고)를 지나 살마薩摩(사쓰마)에 이르러 가등가명加藤嘉明(가토 요시아키)의 수군과 합하여 태평사泰平寺(다이헤이지)에 유진하였다. 사납고 용맹하기로 유명한 도진의구 의홍 형제는 의외로 항복한다.

수길이 웃는 낯으로 맞아들여 시세를 따르는 도리를 설명하고 구주에서 유명한 녹아도鹿兒島(가고시마)의 풍경을 구경하고 살마요리라는 음식을 맛보고자 청하여 허물없이 말하였다. 도진씨 형제의 인도로 두루 감상하다가 축전의 상기箱琦(하코자키)땅에 이르러 대해를 바라보고 “저 바다의 건너편은 조선이지?” 하고 물었다. 도진 형제는 “글쎄요. 조선이 될지 명나라가 될지…” 하고 대답하였다.

상기 지방에는 조선의 반민1)이 들어와 사는데 반민 중에 요시라2)라는 자를 불러들여 수길이 조선의 사정을 묻는다. 먼저 조선의 국정을 알고자 함이었다. 요시라는 말하되 조선은 삼천리 강토에 팔도강산이며, 내직으로 3000, 외직으로 800의 관직이 있고, 조정의 정치상황은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여 소위 국방의 대비란 것은 보잘 것없다는 말과, 문신배들이 왕실의 계승문제이니 폐비사건이니 당파 싸움이니 하는 일들로 인하여 신하들의 죽음 사태가 종종 일어난다는 소위 갑자사화니 무오사화니 하는 형정의 참혹한 말과, 군정 같은 것은 덮어두어서 말하는 이가 없다는 말까지 하였다.

수길은 요시라에게 상을 내리고 “금번 길에 구주를 얻은 것보다 조선의 사정을 알고 가는 것을 반갑게 여기노라”고 말하였다. 수길이 구주에서 돌아와 천황을 모시고 취락聚樂(쥬라쿠)3)에 행차하니 천황의 거동은 수백년간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길이 금번에 거동 길을 차린 것은 황실을 잊어버린 제후에게 황실의 존엄한 도리를 알리려 함이었다. 천황의 봉련4)이 취락에서 5일간 머물렀는데 관백 수길이 정성을 다하여 시종하였다.

▲ 풍신수길이 장종아부원친의 패전 소식을 듣고 곧 20만 대군을 일으켜 구주로 출발하였다. 사진은 후쿠오카 구마모토 성내에서 전통복장을 하고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모습.
수길이 다시 관팔주로 출병하였다. 관팔주는 태평원의 기름진 평야 300만 석을 차지하여 50여 성의 영토중의 번화한 도시가 성라기포5)한 듯하였다. 수길은 27만의 대군을 일으켜 수륙 두 길로 진군하였다. 천황이 하사한 절도6)를 차고 나섰다. 불과 100일만에 40여 성을 함락하고 북조씨의 도성인 소전원小田原(오다와라)성을 포위했다. 덕천가강이 북조씨를 구슬러서 천하대세가 변하여 간다고 하여, 가강의 말에 귀가 열린 북조씨정北條氏政(호조 우지마사) 부자는 소전원성 밖에 나와 항복하였다.

관팔주라 자랑하던 58성 88관의 영토가 수길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수길은 북조씨직北條氏直(호조 우지나오)을 협산挾山의 일만석 영토를 내어주고 수길은 이번 걸음에 오우 지방까지 마저 치기로 하였다. 수길은 관팔주에서 병사를 움직여 바로 강호江戶(에도)로 향하여 쳐들어간다. 오우의 영주는 이달정종伊達正宗(다테 마사무네)이었다. 이달정종의 군사가 한바탕 맹렬히 대항하였으나 수길의 대군 앞에서 어쩔 수 없었다. 이달정종이 우도궁宇都宮(우쓰노미야)성 밖에 항기를 꽂고 머리를 숙였다. 수길은 친절한 대우를 하였다.

수길이 일찍이 대판에 근거지를 잡은 뒤에 구주에서부터 정벌을 시작하여 오우 지방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토 60여 주를 석권하였다. 기타 소소한 제후들도 다 항복하였다. 수길이 제장들을 분봉하되 먼저 직전신웅에게 오주 추전秋田(아키다)의 100만석 영토를 주고 덕천가강에게는 관팔주 70만석 영토를 주고 나머지 제장들도 각각 영지를 그 공로에 따라 분봉하여 주었다. 풍신수길이 일본국내를 평정하고는 다시 국외출병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그러하여 천하제후들을 대판성으로 불러들여 조선에 출병할 순서를 의논하고 대마도수 종의지를 통신사를 정하였더니 종의지는 관백의 국서國書를 받아가지고 자기의 부하 귤강광橘康廣(다치바나 야스히로)을 보냈다.

그 국서의 뜻은 아래와 같았다.

듣건대 중원 명나라에는 소인배들이 일을 맡아 나라의 운세가 이미 다햐였으니 귀국 조선이 일본을 위하여 길을 인도하는 선봉이 되어 일본과 합세하여 4백여 주의 중국을 정복하고 천하를 나누자. 조선의 선조는 일본 국서를 받고 이품이상 관리를 명하여 전례에 의하여 일본 사절을 접대케 하고 답서를 하여 보냈다. 수로가 미매迷眛하여 답례 사절을 보내지 못한다.

 
수길이 답서를 보고 대노하여 나라가 모욕을 받게 하였다 하여 귤강광을 목을 베고 종의지를 불러 네가 가야한다고 엄명하고 수길의 부하 평조신7)과 중 현소와 같이 보냈다. 선조 21년 무자 1588년 4월에 일본사신 종의지 등이 와서 공작 한쌍과 조총과 창, 칼 등을 헌납하니 조정이 이조정랑 이덕형으로 접대하게 하였다. 이덕형은 종의지를 보고 “전년에 손죽도 싸움은 우리나라 반민 사화동이 일본에 들어가 오도의 왜병을 인도하여 침략한 것이라 한즉 그 반민을 잡아 보낸 연후에 통신사를 보내겠다”고 하였다.

종의지는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오” 말하고 곧 평조신을 일본으로 보냈다. 수길이 구주 일대에 흩어져 사는 조선의 반민 사화동 및 신삼보라信三甫羅 긴시요라緊時要羅 등 160여 인을 잡아 보냈다. 기축 1589년 9월에 반민 사화동과 김대기金大璣 공대원 등이 일본으로부터 압송되어 나왔다. 사화동은 오도 해적을 인도하여 연해 변진을 약탈한 죄로 처참하고, 그 외는 다 폭풍을 만나 해상에서 표류되었던 백성이라 하여 풀어주었다. 공대원은 이순신의 부하가 되었다.

조정에서 종의지 등의 공으로 상과 음식을 내렸는데 의지 등은 조선의 답례사절을 청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경인 1590년 3월에야 그동안 조정에서 유성룡, 변협 등이 주청하되 사신을 파견하여 답례함이 말썽이 없을 것이요, 또한 저들의 동정을 살펴보고 오는 것도 옳다고 조정의 의견이 정해져 병조첨지 황윤길[무변 서인]로 통신정사를 삼고 성균사성 김성일[문신 동인]로 통신부사를 삼고 홍문전적 허성許筬으로 종사관을 삼아 종의지 등과 함께 일본으로 보냈다.

수길이 조선의 국서를 받아 읽어보니 교묘하게 글치레뿐이었다. “내가 조선의 글솜씨를 보자는 것은 아니다” 한 뒤에 곧 회답문을 써서 황윤길의 일행을 돌려보냈다.

수길의 글은 이러하였다.
日本國 關白은 奉書朝鮮國王殿下 雁書熏讀 卷舒再三이라.
我國六十餘州가 比年分離라. 故로 余伐叛討逆하여 今에는 異域遠島가 悉歸掌握이라.
竊諒余는 鄙陋賤臣也라.
雖然이나 余方托胎에 慈母夢에 日輪이 入懷러니 相士曰 日光所及에 無不照臨하여 必八表에 聞仁聲하고 四海에 蒙威名이리라 하더니 藉此奇異하여 戰必勝功必取하여 旣天下大治에 民富財足하고 兵强將勇하니 日本開闢以來로 未有盛於今日也라.
人生一世에 不滿百齡이라 焉能鬱鬱久居此乎아.
直欲一超入大明國하여 易吾朝風俗於四百餘州하고 施帝都政化於億萬斯年하리니 貴國이 先驅入朝하면 余入大明之日에 可修隣盟하리니 余願이 無他라.
只欲顯嘉名於三國而已라하노라.
保嗇不宣.
天正十八年 庚寅仲春 秀吉奉复書

일본국 관백은 조선국왕전하의 글을 받들어 재삼 숙독하였습니다.
우리나라 60여주가 그동안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반역자를 토벌하여 지금에는 이역의 멀리 떨어진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삼가 저를 살펴보건대 비루하고 천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태 안에 있을 때 어머니의 꿈에 해가 품안으로 들어왔는데 상을 보는 자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질다는 소리를 듣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런 기이한 징조를 받아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얻어냈습니다.
이미 천하를 크게 다스려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니 일본이 개벽한 이래로 오늘날 보다 더 융성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의 생애가 백세를 넘기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곳에만 오래 있을 수 있겠습니까.
곧장 명나라에 뛰어 들어가 우리나라의 풍속으로 400여 주를 바꾸어 놓고 황제의 정치와 교화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니 귀국이 앞장서서 입조8)한다면 내가 명나라에 들어가는 날 이웃나라의 맹약을 맺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다만 삼국에 아름다운 명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보중하시기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9)
천정 18년10)경인 중춘11)수길은 받들어 답서합니다.

황윤길 등이 돌아와 복명함에 선조는 수길의 사정과 그 위인이 어떠한지 물었다. 황윤길은 상주하되 “수길이 눈에 광채가 있어 형형하고 위인이 비범하니 필연코 해외로 출병하여 우리나라를 침범할 우려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는 황윤길의 말을 믿고 군비를 일으키자고 하다가 또 김성일을 불러 물었다. 김성일은 말하되 “수길은 눈이 쥐 눈 같으니 족히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한다. 선조는 두 사람의 말이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어서 여러 대신들에게 미루어 맡겼더니 그만 덮어두고 군비는 염두에 두지를 아니하였다.[제5회 참조]

▲ 김성일이 말하되“수길은 눈이 쥐 눈 같으니 족히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한다. 선조는 두 사람의 말이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어서 여러 대신에게 미루어 맡겼더니 그만 덮어두고 군비는 염두에 두지를 아니하였다. 사진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 한 장면.
학봉鶴峯 김성일은 필시 고집 세고 자기만의 편견으로 시세를 밝게 보지 못하고 안목이 부족하여 수길 같은 영웅을 눈뜨고도 몰라보았다. 그 고집으로 인하여 나라를 그르친 책망이 적다할 수 없다. 자기의 생각에는 풍신수길이 망망한 대해를 건너오지 못하리라 한 것인데, 선조가 그를 죽이려 함도 무리는 아니다. 정사 황윤길의 고명한 식견에 어찌 따르지 못하였던가! 탄식할 일이로다, 당파싸움이여.

조선까지 따라 나왔던 평조신이 조선 조정의 동향을 보고 하도 답답하여서 선조에게 상언하여 수길의 품은 뜻을 고한즉 선조는 말하되 “일본이 대명을 친다는 것은 가재가 바다를 버리고 육지로 오르려 함이요 벌이 거북의 등을 쏘려하는 셈이로다” 하고 거절하여 버렸다. 평조신은 그만 돌아갔다. 선조가 일본의 이러한 사정을 명나라 조정에 통지하자고 하였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는 불가하다며 말하기를 “일본이 이러한 패망한 글을 조선에 보내게 된 것은 조선과 일본 두 나라가 중국이 모르게 중개인이 왕래한 까닭이라 하여 도리어 우리를 의심하기가 쉬울 듯도 하고 또 무슨 모함과 견책이 있을는지도 모르니 오늘의 일은 말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우의정 이양원李陽元, 이조판서 이원익李元翼, 병조판서 황정욱黃廷彧 등이 다 이산해의 말을 찬성하여 중국에 통지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좌의정 유성룡은 선조의 뜻을 찬성하여 명나라에 통지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 이유로, “이제 일본 국서를 보고 중국에 알리지 않으면 다만 양국 간의 도의에도 불가할 뿐 아니라 일본이 만일에 중국에 침범할 책모가 있다하여 타국인 유구琉球(류큐)로부터 듣는다 하면, 그때에는 우리를 가리켜 일본과 공모하였다는 의심은 더욱 깊어질 것이요 우리의 처지는 발명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니, 앞서의 논의는 중국에 이 실정을 고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헌 윤두수尹斗壽가 유성룡의 의견에 찬동하였다.

선조는 유성룡 윤두수의 말을 좇아 김응남金應南으로 상사上使를 삼아 명나라에 통지하게 하였다. 중국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길잡이가 되어서 중국을 침범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중국조야에 들끓었다가 조선의 사신 김응남이 조선왕의 국서를 올려 추호도 감춤이 없이 일본의 상황을 상달하니 중국조정에서 그 국서를 본 뒤에는 모든 의심이 풀어져버렸다.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사절 종의지 평조신 등에게 답서를 맡겨 보내니 그 글은 아래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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