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연기관차 줄인다” 소문 돌자 발끈
정유업계의 이해 못할 역주행

“혁신하자.”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 갈수록 강화되는 환경규제를 맞닥뜨린 정유업체의 CEO들은 틈만 나면 이런 말들을 쏟아낸다. 정유사업의 비중을 줄이거나 혁신을 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위기감의 발로다. 하지만 정부가 내연기관차 비중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2050 장기 저탄소 발전전략’을 내놓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자 정유업계는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있다. 말 그대로 ‘표리부동表裏不同’이다. 더스쿠프(The SCOOP)가 혁신을 외쳐온 정유업계의 네가지 오류를 짚어봤다. 

정부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내연기관차를 줄이려 하자 정유업계가 반발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정부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내연기관차를 줄이려 하자 정유업계가 반발하고 있다.[사진=뉴시스]

변해야 산다.” 기업 경영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요즘 이런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곳 중 한곳은 정유업계다. 석유 수요는 줄고 환경규제는 강화하고 있어서다. 지난 10월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0 세계 에너지 전망’ 보고서를 통해 “글로벌 석유 수요가 2023년에야 2019년 수준으로 회복될 것”이라면서 “석유 수요 감소에 따라 2030년까지 원유생산ㆍ정제설비의 14~24%가 폐쇄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유업계가 위기감을 느끼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은 지난 7월 사내 뉴스채널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석유화학 기업의 한계인 환경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핵심 고민”이라면서 “친환경ㆍ그린 가치를 새로운 성장 비전으로 삼지 못하면 미래 생존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참고 : 조경목 SK에너지 사장도 같은 시기 같은 뉴스채널에 비슷한 칼럼을 게재한 바 있다.] 

허태수 GS칼텍스 회장도 변화를 강조했다. 지난 10월 임원 포럼에서 그는 “디지털, 환경 및 클린에너지 등 우리가 아직 가보지 않은 영역을 포함해 적극적인 신성장 동력 확보에 나서 달라”고 강조했다. 새로운 사업 영역을 개척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에쓰오일은 수년 전부터 정유사업의 비중을 줄이면서 석유화학기업으로 체질을 바꾸고 있다. 현대오일뱅크의 분위기도 다르지 않다.

이상한 점은 정유업계가 이처럼 변화를 주창하면서도 정부의 친환경 정책에는 거부감을 보인다는 점이다. 정부는 올해 안으로 ‘2050 장기 저탄소 발전전략(LEDS)’을 마련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참고 : LEDS는 파리협정에 따라 올해 안으로 유엔기후변화협약에 제출하기로 한 탄소저감대책이다.] LEDS는 전문가들이 검토한 제안을 토대로 만들어지고 있는데, 그중엔 ‘2050년까지 내연기관차 비중을 한자릿수(약 7%)로 줄이는 내용’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세먼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구인 국가기후환경회의(대통령 직속ㆍ지난해 4월 출범)에서는 최근 “미세먼지와 기후위기 문제 해결을 위해 2035년 혹은 2040년부터 국내 내연기관차 판매를 제한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경유세를 인상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내연기관차를 퇴출하기 위한 제안들이 쏟아지고 있다는 얘기다. 

유럽연합은 탄소배출 기업을 지원하지 않고 사회안전망은 강화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유럽연합은 탄소배출 기업을 지원하지 않고 사회안전망은 강화하고 있다.[사진=뉴시스]

국내 정유업계는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정유사업은 정유사 전체 매출의 70~80%를 차지하는데, 휘발유와 경유 수요가 가파르게 줄면 정유업계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어서다. 정유업계에서 “내연기관차 퇴출은 국내 정유사업을 접으라는 말이나 다를 바 없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내연기관차를 규제해 탄소배출량을 줄여야 한다는 데에는 공감한다”면서도 이렇게 설명했다. “정유산업은 국가기간산업이다. 규제를 밀어붙이면 효과보단 비용이 더 커질 수 있다. 가뜩이나 경영환경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숨통을 터줘야지 막으면 어떡하나. 오히려 세제혜택(중유 수입시 개별소비세 인하 혹은 면제)을 줘서 지원해야 할 상황이다.” 

또다른 관계자 역시 “규제를 하더라도 상황을 봐 가면서 다른 나라들의 규제 속도를 봐 가면서 조절을 해도 되지 않겠는가”라면서 “외부 환경이 바뀌고 난 후에 규제를 시작해도 늦지 않다”고 꼬집었다. 

정유업계의 주장은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가만히 곱씹어보면 의문이 생긴다. 정유업계가 내세운 ‘변화’와는 정반대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오류도 적지 않다. 

■오류1 = 우선 ‘숨통을 터주지 않는 규제’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정부가 올해 안에 마련하겠다는 ‘2050 장기 저탄소 발전전략(LEDS)’은 아직 골자가 완성되지 않았다. ‘제안’만 있었을 뿐, 정부가 이 제안을 어떻게 검토할지도 정해진 바 없다. 당연히 구체적인 ‘규제’도 나오지 않았다. 알려진 대로 ‘2050년까지 내연기관차 비중을 7%까지 줄이는 정책’이 실시되더라도 아직 30년이나 남았다. 

■오류2 = “세제혜택을 달라”는 정유업계의 주장도 곱씹어볼 문제다. 정유업계가 말하는 세제혜택이란 석유제품 생산을 목적으로 중유(원유 정제 후 남는 찌꺼기 기름)를 수입할 경우 개별소비세를 면제해 달라는 거다. 다른 나라에선 매기지 않는 세금을 왜 우리나라만 걷느냐는 게 정유업계의 주장이다. 

물론 현 세금체계가 부당하다고 볼 여지는 있다. 그렇더라도 환경규제 탓에 정유사업 비중을 줄여도 모자랄 판에 정유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면제해 달라고 하는 건 정유업계의 ‘체질개선론’을 무색하게 만든다.[※참고 : 그럼에도 정유업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인다. 11월 30일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석유제품 생산용 중유 수입 시 개별소비세를 2년간 한시적으로 면제해주는 법안을 의결했다.]

이지언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국장은 “유럽연합(EU) 국가들은 코로나19 관련 지원을 해줄 때에도 탄소배출량을 줄이라는 조건을 붙인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일례로 프랑스는 코로나19로 인해 타격을 입은 자국 항공사 에어프랑스를 지원하면서 탄소배출량을 줄여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EU 국가들이 기업이 위기에 직면할 때를 대비한 사회안전망 구축에 힘을 쏟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유사업을 위해 세제혜택을 달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글로벌’ 외치지만 현실은…

■오류3 = “해외국가의 규제속도를 봐가면서 속도조절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현실과 다르다. 환경규제에 적극적인 EU는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있다. EU의 경우, 탄소배출 산업이나 기업엔 어떤 형태의 지원도 하지 않는다. 내년부터 가솔린차 1대 판매 시 자동차 회사에 수백만원의 벌금을 물릴 예정이다. 

이에 따라 독일의 자동차 회사들도 내연기관 개발 중단을 선언했다. 새로 출범하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도 이런 흐름에 빠르게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숨통을 운운할 겨를이 없다는 얘기다. 

■오류4 = “외부 환경이 바뀌고 난 후에 규제를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주장도 ‘글로벌 리더’를 지향하고 있는 정유사들의 선택지가 아니다. 시장 선도가 아니라 시장을 뒤따라가겠다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물론 글로벌 정유업계가 모두 변화를 택하고 있는 건 아니다. 영국의 브리티시 페트롤(BP)은 정유업계의 위기를 강조하면서 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반면, 미국의 엑손모빌은 오히려 정유업계의 역할이 커질 거라면서 정유사업을 늘리고 있다. 어느 방향을 선택할지는 국내 정유사들의 몫이라는 얘기다. 중요한 건 국내 정유업계가 입으론 혁신을 외치면서 실제론 변화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전략이 국내 정유업계에 득이 될 수 있을까. 지켜볼 일이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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