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분쟁 코오롱-듀폰 영업비밀 침해소송

삼성과 애플 소송만이 세기의 분쟁은 아니다. 슈퍼섬유를 둘러싼 미국 화학업체 듀폰과 코오롱의 분쟁도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소송 사유는 슈퍼섬유 ‘아라미드’ 영업비밀 침해건이다. 듀폰이 원고, 코오롱이 피고다. 또 다른 글로벌 소송전의 전말을 살펴봤다.

▲ 슈퍼섬유 아라미드는 총탄을 막아낼 정도로 내구력이 뛰어나다. 섭씨 500도의 고열도 견뎌낸다. 소재가 강하고 가벼워 주로 방탄복·타이어 등 특수분야에 쓰인다.
코오롱(코오롱인더스트리)-듀폰 소송은 삼성-애플 소송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특허침해 소송이 아니라는 얘기다.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코오롱과 듀폰의 입장은 엇갈린다. 듀폰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코오롱이 채용한 전직 직원이 우리의 아라미드 제조기술을 도용했다. 코오롱은 이 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영업비밀 침해다.” 반면 코오롱은 듀폰 직원의 채용은 영업비밀 침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판단 기준은 영업비밀을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획득했는지 여부다. 그렇다면 듀폰이 주장하는 영업비밀 침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코오롱은 부정한 방법으로 듀폰의 영업비밀을 빼돌린 걸까.

코오롱과 듀폰의 분쟁은 198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듀폰은 그해 아라미드 섬유 기술을 처음 개발했다. 아라미드 섬유는 내구력이 뛰어나다. 총탄도 막아낸다. 섭씨 500도의 고열을 견뎌낼 정도로 강하고 가볍다. 주로 방탄복•타이어•브레이크의 소재로 쓰이며 군수•자동차•항공•우주분야까지 응용된다.

듀폰이 아라미드 섬유 ‘케블라’를 생산한 것은 1973년부터다. 아라미드 섬유시장은 이후 듀폰 ‘케블라’와 데이진 ‘트와론’ 양강체제를 구축했다. 후발주자 코오롱은 듀폰보다 늦게 시장에 뛰어들었다.

1984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윤한식 박사 연구팀이 개발한 아라미드 펄프 원천기술의 상용화 개발작업에 코오롱이 참여했다. 특허 출원은 순조로웠다. 코오롱은 그해 미국에서 물질특허를 획득했다. 이 특허제품이 코오롱의 아라미드섬유 ‘헤라크론’이다.

 
분쟁의 서막은 듀폰이 올렸다. 1986년 듀폰과 네덜란드 악소는 코오롱과 윤한식 KIST 박사를 상대로 특허침해 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결과는 코오롱과 윤 박사의 승소. 듀폰의 긴 침묵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소송에서 이긴 코오롱은 2006년부터 미국시장에 진출했다. 코오롱은 미국에서만 5년 동안 판매 총액 33억원을 기록했다. 나쁘지 않은 실적이었다. 지금도 코오롱은 연간 5000t을 생산하고 있다. ‘헤라크론’의 시장 점유율(업계 추정치)은 5~6%다.

아라미드 섬유 분쟁이 다시 대두된 것은 2009년 2월. 듀폰이 “자사의 전직 직원을 채용한 코오롱이 아라미드 관련 기술을 빼돌렸다”며 미국 법원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면서다. 19년 전 아라미드 특허침해를 운운했던 듀폰은 이번에 영업비밀 침해라는 혐의를 들어 법정에 나섰다.

전직 직원 채용이 화근
코오롱은 반발했다. 듀폰이 시장 지배적 지위를 남용해 자사의 미국 진출을 방해했다며 2009년 4월 미국 법원에 반독점 소송을 냈다. 듀폰이 다시 맞대응했다. 2010년 8월 서울중앙지검에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다. 사유는 역시 영업비밀 침해였다.

미국 배심원단의 평결은 2011년 9월에 나왔다. 일부 평결 내용이다. “코오롱이 듀폰에서 케블라 마케팅 담당 간부이자 기술자를 비롯해 마케팅 인력과 기술 인력을 채용해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기술을 빼돌렸다.”

그해 11월 미국 버지니아 리치먼드 연방법원도 듀폰이 제기한 민사소송에서 코오롱의 영업비밀 침해를 인정했다. 금전 압박도 이어졌다. 연방법원은 코오롱에 9억2000만 달러(약 1조445억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코오롱은 벼랑 끝에 몰렸다. 코오롱이 미국 법원에 제기한 듀폰의 반독점법 위반혐의가 올 7월 기각됐다. 코오롱은 곧바로 항소했지만 지난 8월 미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소재 지방법원은 코오롱의 아라미드 섬유 20년 생산•판매를 금지한다며 듀폰의 손을 들어줬다.

코오롱은 물러서지 않았다. 올해 9월 코오롱의 생산•판매 금지명령의 집행을 정지해달라고 신청했다. 이 신청은 받아들였지만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 검찰은 10월 19일 코오롱 전현직 임원 5명을 영업비밀 침해 등 6개 혐의로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연방법원에 기소했다.

이번 영업비밀 침해소송은 후발주자 코오롱을 잡기 위한 듀폰의 전략이라는 시각이 많다. 아라미드 섬유시장에서 코오롱을 견제하겠다는 속셈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을 막고 시장을 독점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듀폰의 주장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2003년 듀폰의 계열사 파이오니어는 유전자 변형 종자 사업에 진출했다. 유전자 변형 종자업계 1위 업체인 몬산토의 후발주자였다. 파이오니어가 고속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무렵인 2009년 몬산토가 소송을 제기했다.

파이어니어가 몬산토의 유전자 변형 기술 ‘라운드업레디’를 활용해 신제품 ‘옵티엄 GAT 시드’를 내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몬산토는 당시 “상당한 양의 투자를 먼저 해서 최첨단 기술을 개발한 회사의 지적재산권은 보호돼야 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후발주자 압박용 카드라는 분석도

 
이때 듀폰의 주장은 의미심장했는데, 다음과 같다. “몬산토의 시장독점을 막고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다른 회사도 제품을 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아라미드 섬유 1위 사업자인 듀폰이 후발주자인 코오롱을 압박하기 위해 영업비밀 침해 혐의를 제기한 것과 오버랩된다.

듀폰의 소송제기가 합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코오롱이 경솔한 행동을 했다는 지적도 있다. 허성원 신원국제특허법률 변리사는 “코오롱이 불공정거래와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몰랐던 것도 문제지만 영업비밀 침해 여부를 떠나 듀폰과의 치열한 경쟁상황에서 경솔하게 행동한 건 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제 아무리 정당해도 모르면 손해를 볼 수 있다. 글로벌 경제정글의 섭리이고 법칙이다. 아는 게 힘이다.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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