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적십자사 구멍 뚫린 인사검증 시스템
“중앙위 위원에게 사무총장 징계 내용 알리지 않아”
중앙위 위원 28명 최소한의 검증도 안 해

대한적십자사의 사무총장이 갖는 권한은 막강하다. 회장과 부회장을 제외한 전 임직원의 인사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어서다. 그래서 임명에 신중해야 한다. 대한적십자사가 국민의 혈액을 다루는 공공기관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사무총장의 임명 승인 절차가 까다로운 이유다. 하지만 사무총장의 임명을 승인하는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최소한의 검증도 하지 않았다. 더스쿠프(The SCOOP)가 대한적십자사의 구멍 뚫린 인사검증 시스템을 취재했다. 

중앙위원회는 대한적십자사의 중요 사항들을 심의ㆍ의결하는 기구지만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사진=연합뉴스]
중앙위원회는 대한적십자사의 중요 사항들을 심의ㆍ의결하는 기구지만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사진=연합뉴스]

“2014년 7월부터 2015년 3월까지 운영팀장으로 근무하면서 여직원과의 과도한 농담과 신체접촉을 함으로써 해당 직원들의 불쾌감을 초래했다. 직무상의 지위를 이용 혹은 관련자의 사적호의를 활용해 직무상의 하급자에게 적절하지 못한 행위를 요구했다. 직원운영규정 제33조(품위유지의무)를 위반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단독 입수한 ‘징계의결서’에 적힌 내용의 일부다. 2015년 10월 19일 작성된 이 징계의결서는 김태광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당시 경남혈액원 소속)을 징계(견책)한 사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참고 : 김 총장은 이 징계의결서를 본 적 없다고 했다. 하지만 대한적십자사 인사관리시행규칙 제25조(징계의 집행)에 따르면 징계의결 집행 시 징계처분사유설명서를 징계의결서 사본과 첨부해 교부하도록 돼 있다. 게다가 해당 징계처분사유설명서의 수신자는 김 총장으로 명시돼 있다.]

징계 사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임직원간 상호존중 의무를 소홀히 해 대한적십자사 임직원행동강령 및 행위기준 제42조(임직원의 상호존중) 위반 ▲성희롱 고충상담원의 피해자 면담과 사실 확인을 하지 않고, 기관장에게 보고도 없이 본인 전결로 문서종결 처리해 양성평등기본법 제30조(성폭력ㆍ가정폭력ㆍ성매매 범죄의 예방 및 성희롱 방지)와 경남혈액원 성희롱예방지침 제5조(고충전담창구) 위반이 포함돼 있다. 

김 총장은 이런 이유로 ‘견책’의 징계를 받았다. 징계 수위가 ‘고작’ 견책인 것 같지만, 그렇게 볼 사안이 아니다. 징계 수위가 김 총장이 과거에 총재 표창과 기관장 표창 등을 수상했다는 점을 고려해 조절됐기 때문이다. 견책보다 심한 징계를 받을 수도 있었다는 의미다.

[※참고 :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는 “2015년의 품위유지의무 위반 내용은 현재 관점으로 볼 때 심각하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김 총장의 품위유지의무 위반 내용은 2009년 고용노동부가 배포한 ‘성희롱 예방 교육’ 자료에 등장하는 금지행위들이다. 당시 시각으로 봐도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대한적십자사 신임 사무총장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김 총장의 징계 내용이 제대로 검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임명과 승인의 절차에 관한 사전 지식이 좀 필요하다. 

사무총장은 대한적십자사 회장이 임명한다. 하지만 사전에 회장을 포함한 중앙위원회 위원 28명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대한적십자사가 하는 일이 ‘고도의 공익성과 중립성’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당연한 절차다. 대한적십자사의 명예회장이 대통령, 명예부회장이 국무총리로 정해져 있는 것도 대한적십자사의 공공성 때문이다.

무색한 사무총장 임명 절차

중앙위원회 위원은 회장, 전국대의원총회에서 선출한 중앙위원 19명, 중앙부처 장관 8명으로 구성된다. 중앙부처 장관들은 바로 ▲‘함께 잘사는 포용국가’를 만들겠다던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의원 시절 정유라 특혜입학을 꼬집으며 공정한 교육정책을 펴겠다던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검찰개혁 소명을 완수하겠다면서 법과 정의를 강조한 추미애 법무부 장관 ▲의사소통 잘하는 장관이 되겠다며 올해 7월 취임한 이인영 통일부 장관 ▲안전무시관행 근절과 예방중심 사회를 강조한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군’이 되겠다며 올해 9월 취임한 서욱 국방부 장관 ▲포용적 복지를 내세우던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국민의 의지가 담긴 외교, 국민과 소통하는 외교’를 강조하며 등장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 등이다. 

포부는 달라도 그들은 모두 현 정부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해 이전과 다른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밝힌 이들이다.[※참고 : 대의원은 대통령 위촉 8명, 국회 위촉 12명, 광역단체장(서울시장ㆍ광역시장ㆍ특별자치시장ㆍ도지사) 위촉 각 2명씩, 한적 지사별 선출 각 6명으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중앙위원회 위원 19명을 선출한다.] 

대한적십자사 중앙위원회 위원에는 중앙정부 부처 장관 8명도 포함돼 있다.[사진=연합뉴스]
대한적십자사 중앙위원회 위원에는 중앙정부 부처 장관 8명도 포함돼 있다.[사진=연합뉴스]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김 총장에 관한 징계 내용을 알고 있었을까. 더스쿠프는 중앙위원회 위원들(연락이 닿지 않은 4명 제외)에게 김 총장의 임명에 승인했는지, 승인 과정에서 김 총장에 관한 징계 내용을 검토한 적이 있는지 서면으로 질의했다. 

답변을 내놓은 곳은 단 1곳도 없었다. 한 위원은 “승인 과정에 관한 내용은 적십자사에 문의할 일이지 위원에게 문의할 게 아니다”면서 “아무것도 얘기해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래서 취재팀은 대한적십자사에 문의했다.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는 “A씨의 징계 내용이 중앙위원회 위원들에게 전달된 바 없다”고 말했다. 김 총장에게도 ‘2015년의 징계 내용에 관해 위원들로부터 소명을 요청받은 적이 있는가’라고 물었다. 김 총장은 “그런 요청을 받은 적 없다”고 답했다. 

이 얘기들을 종합해보면 한가지 중요한 결론에 다다른다. 중앙위원회 위원들이 김 총장 임명을 승인하면서 최소한의 인사 검증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위원들은 사무총장 임명의 승인권자로서 김 총장의 징계 처분 기록을 요청할 수 있지만, 그런 절차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28명의 위원 중에 단 1명도 제 역할을 다하지 않은 셈이다.

중앙위원회 제 역할 하고 있나

더 큰 문제는 중앙위원회의 역할이 사무총장 임명 승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한적십자사의 정관 변경, 운영위원 선출, 임원 선출, 회원 모집과 회비 수납, 관할 기관 설치와 폐지, 본사 기구, 사업계획과 예산, 사업실적과 결산, 부동산 취득과 처분, 자금 차입에 관한 사항들을 심의ㆍ의결한다. 중앙위원회의 심의ㆍ의결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참고 : 위원들은 중앙위원회 회의에 출석할 때마다 회의참가비(당연직 위원은 제외)를 지급받는다.] 

김 총장은 취재 과정에서 이렇게 해명했다. “사무총장의 인사 검증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면 개선하겠다.” 하지만 본인의 검증조차 허술한 상황에서 차기 사무총장의 인사 검증 시스템을 개선하겠다는 게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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