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와 정의선, 그리고 로봇
정의선의 선택 “인류 위한 진보”

미래 IT 기술을 전망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게 있다. 로봇이다. 감정을 가진 로봇과 사랑을 나누는 영화까지 제작됐을 정도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에 한참 못 미친다. 수년 전부터 ‘로봇의 일상화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쏟아졌지만, 우리 주변에서 로봇을 찾는 건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차그룹이 ‘로봇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로봇 스타트업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지분을 인수하면서다. 여기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의지가 담겨 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정의선과 로봇, 그리고 현대차의 미래를 분석해 봤다.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로봇 기업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했다. 사진은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로봇 ‘스팟’.[사진=뉴시스]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로봇 기업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했다. 사진은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로봇 ‘스팟’.[사진=뉴시스]

2020년은 수많은 공상과학 미디어의 ‘미래 배경’이었다.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은 1970년 발표한 단편소설 「50년 후, Dπ9 기자의 어느 날」에서 2020년의 미래를 썼다. 운전은 레이더와 컴퓨터가 대신하고 아이는 인공 자궁에서 자라는 신인류의 일상을 묘사했다.

개중엔 2020년에 ‘로봇 시대’가 열릴 것으로 내다본 영화나 보고서도 있었다. 1989년 출시한 국산 애니메이션 ‘2020 원더키디’가 대표적이다. 주인공의 단짝인 인공지능 로봇 ‘코보트’는 상황에 맞춰 자동차가 됐다가 비행기로도 변신하며 우주를 누볐다.

2007년 정보통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IT 기술예측 2020’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각종 미래기술의 상용화 시기를 전망하는 보고서였는데, 그 중심엔 다용도 로봇기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 대신 로봇이 링에서 싸우는 할리우드 영화 ‘리얼스틸’의 배경 역시 2020년이었다. 영화 속 복싱 로봇은 사람처럼 두 발로 걷고 두 팔을 휘두르며 싸웠다. 


그런 2020년이 왔고, 예상대로 로봇이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다만, 보고서나 영화가 그렸던 ‘로봇의 일상화’는 먼 미래의 이야기로 머물러 있다. 제조업계에서 로봇이 상용화하긴 했다. 공장 제조라인 곳곳에서 활약 중인 로봇으로 분류되는 ‘자동화 기계’를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로봇의 존재감은 약하다. 상용화에 성공한 제품이라곤 장애물을 요리조리 피하는 기능이 전부인 ‘로봇 청소기’뿐이다. 사실 로봇 상용화가 논란이 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간 수많은 로봇이 사람들의 기대 속에 등장했다가 금세 사라졌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꼬집는다. “연구개발의 실패 때문이라고 보긴 어렵다. 대중화하기도 전에 너무 많은 기대를 갖게 된 영향이 크다. 과도한 기대가 실망만 불러온 셈이다. 이제 대중은 로봇을 유용한 기술로 여기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로봇 상용화’에 현대차그룹이 도전장을 던졌다. 이 회사는 최근 미국의 로봇 스타트업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지분 80.0%를 인수하기로 했다. 인수금액은 9000억원 수준으로 적지 않다. 현대차 30.0%, 현대모비스 20.0%, 현대글로비스 10.0%에 나머지 지분 20.0%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직접 취득한다. 

이번 인수ㆍ합병(M&A)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무엇보다 정의선 회장이 지난 10월 현대차그룹 회장에 부임한 이후 첫번째 대규모 M&A다. 지분을 취득하는 데 사재를 동원했다는 점에서 총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풀이된다. 

보스턴다이내믹스는 1992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내 설립된 벤처에서 분사해 설립됐다. 2013년 알파벳(구글 모기업)에 인수돼 미국 국방부와 로봇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2017년에는 소프트뱅크그룹에 인수됐다가 이번에 현대차그룹으로 넘어오게 됐다. 

이 회사는 세계 최고의 로봇 기술력을 보유한 스타트업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지난해 9월엔 4족보행 로봇 ‘스팟(SPOT)’을 시중에 출시했을 정도다. 개 모양의 로봇 스팟은 ‘거친 지형 이동 능력’ ‘360도 장애물 회피’ ‘내비게이션’ ‘원격 제어 시스템’ 등의 기능을 갖췄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도 간단히 해낼 수 있다. 이동 속도는 초당 1.6m, 화물 탑재 능력은 최대 14㎏이다. 

로봇에 팔을 추가로 달면 문을 여는 동작도 수행할 수 있다. 현재는 건설 현장을 모니터링하고 가스ㆍ석유 설비, 전력 설비, 공공 안전시설 등에서 원격 검사를 하는 데 활용 중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이렇게 신통방통한 기술이 현대차그룹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느냐다. 정의선 회장과 현대차그룹은 왜 거액을 들여 로봇 스타트업을 인수했을까. 

회사 측의 설명을 들어보자. “로봇의 폭넓은 활용성과 미래 성장 가능성에 주목했다. 2017년 245억 달러 수준의 글로벌 로봇 시장은 연평균 성장률 22%를 기록해 올해 444억 달러 수준으로 커질 전망이다. 2020년부터 2025년까지 연평균 성장률(32%)은 더 가팔라질 것이다. 2025년 시장 규모는 1772억 달러(약 195조원)로 예상된다.”

5년이 흐르면 로봇 시장이 현대차그룹의 연 매출(185조3148억ㆍ2019년 기준) 수준으로 성장할 것이란 얘기다. 이쯤 되면 현대차그룹이 로봇 스타트업에 베팅한 이유가 명확해진다. 이는 지난해 11월 양재동 사옥 타운홀 미팅에서 나온 정의선 회장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지만 미래에는 자동차가 50%, 개인용 플라잉카(PAV)가 30%, 로보틱스가 20%가 되리라 생각한다. 현대차그룹은 그 안에서 모빌리티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자동차 업계 로봇 전쟁

문제는 정 회장이 그룹 포트폴리오를 단기간에 바꿔놓을 수 있느냐는 점이다. 무엇보다 ‘로봇사업 매출 비중 20%’는 가벼운 숫자가 아니다. 현대차그룹 매출의 20%는 37조629억원이다. [※참고 : 현대차그룹은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한 직후 ‘물류 로봇’과 ‘이동형 로봇’ 개발에 집중할 계획이다. 물류 계열사인 현대글로비스가 지분 인수에 참여한 건 이 때문이다. 생산ㆍ물류 공장에서 제품을 선별하고 이송하는 공정에 이런 로봇을 도입할 수 있다는 게 현대차그룹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룹 매출 비중 20% 달성은 물류 로봇만 팔아선 거두기 힘든 실적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현대차그룹이 꺼낸 키워드는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휴머노이드는 사람과 유사한 손과 다리를 바탕으로 각종 업무를 대행할 수 있는 로봇이다. 과거 세대가 꿈꿨던 로봇의 진정한 면모가 드러나는 단계다. 회사 관계자는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로봇 영역이 바로 휴머노이드 시장”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차그룹이 ‘로봇 시대’를 겨냥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인수는 로봇 시대를 앞당기기 위한 포석이 될 수 있다. 이 회사는 별도의 지지장치 없이 직립 2족 보행이 가능한 휴머노이드 ‘아틀라스’를 공개한 바 있다. 2017년엔 아틀라스가 고정된 물체를 밟고 건너가거나 뛰어올라 180도 공중제비를 돌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사람의 동작을 쏙 빼닮은 조깅을 선보이기도 했다. 

현대차 역시 휴머노이드 관련 개발 역량을 갖추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로보틱스랩은 지난해 9월 웨어러블 로봇 ‘벡스’를 공개했다. ‘벡스’는 공장에서 장시간 일하는 노동자의 어깨ㆍ허리ㆍ목 등에 부담을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 조끼 형태의 이 로봇을 입으면 성인이 3㎏ 공구를 들었을 때,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올해 초부터 미국 앨라배마 현대차 공장, 조지아 기아차 공장에 시험투입하고 좋은 평가를 이끌어냈다. 이런 개발 경험이 세계 최고 로봇제어 기술을 갖춘 보스턴다이내믹스와 어우러지면 휴머노이드 시장에서 비약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게 현대차그룹의 판단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자율주행차ㆍ친환경차 등 미래차 패권경쟁이 치열한데, 기술을 확보하긴커녕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고 비판할지 모른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로봇 시대’는 현대차만의 플랜이 아니다. 수많은 완성차 회사가 로봇 시장에서 기회를 찾고 있다. 2000년 세계 최초로 2족 보행 로봇 ‘아시모’를 개발한 회사는 일본의 자동차 회사 혼다다. 도요타 역시 다양한 파트너 로봇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현대차그룹은 이미 웨어러블 로봇 시장의 상용화를 꾀하고 있었다.[사진=연합뉴스]
현대차그룹은 이미 웨어러블 로봇 시장의 상용화를 꾀하고 있었다.[사진=연합뉴스]

폭스바겐은 자율주행 충전 로봇이 주차된 차량으로 옮겨 다니면서 자동으로 차량을 충전하는 신개념 충전 콘셉트를 올해 1월 공개했다. 포드는 ‘어질리티 로보틱스’와 협력해 최대 18㎏까지 물건을 들 수 있는 직립 보행 로봇 ‘디짓’을 개발해 상용화를 앞둔 상황이다. 이들 완성차 회사들은 로봇기술을 발판 삼아 미래차 분야에서 입지를 다지겠다는 전략이다. 

휴머노이드 개발의 꿈

현대차그룹의 각오도 만만치 않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로봇 기술력이 글로벌 톱 수준이라 인수를 추진하게 됐다”면서 “그룹 차원의 로봇 신사업이 더욱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차와 기아차의 사명에서 ‘자동차’를 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지금까지 달려왔던 현대차의 길을 벗어나겠다는 거다. 자동차만 잘 만드는 회사에서 탈피하겠다는 의지다. 그 중심엔 로봇이 있고, 이번 보스턴다이내믹스 M&A가 있다. 로봇 시대를 앞당기는 건 정 회장이 선언한 현대차그룹의 새 비전 ‘인류를 위한 진보’와 맞닿아 있기도 하다. 현대차에 탑승한 로봇. 더 이상 공상이 아니다. 성큼 다가온 현실이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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