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9회 ②

 
일본의 사신이 떠난 뒤에 조선에서는 일본의 대군이 나온다는 풍설이 낭자하여 팔로의 인심이 물 끓듯 경동되어 안정이 되지를 못하였다. 조정에서는 당시에 문무재를 겸하였다는 김수를 경상감사에, 이광李洸을 전라감사에, 윤국형을 충청감사에 발령하여 남삼도 내의 성곽을 수축하며 군기를 신속히 준비하며 군사를 모집 훈련하여 불우의 변란을 당한대도 능히 방어하도록 하여 두었다.

또 조정에서 대장감을 각기 추천하여 신립으로 대장에, 이순신으로 전라좌수사에, 이억기로 우수사에, 권율로 광주목사 겸 방어사에 임명하고 당대 맹장이라는 정발鄭撥로 부산첨사에, 정운으로 녹도만호에, 황진黃進으로 동복同福현감에, 이운룡으로 옥포만호에 임명하였다.

▲ 수길은 원정군의 본영을 비전국 명호옥에 두기로 하고 덕천가강 석전삼서 이하 모든 장수를 명하여 출정군의 부대를 조직하였다. 불멸의 이순신 중 한 장면.
풍신수길이 조선에 통신하던 일이 실패되니 관백의 지위를 그 양자 수차秀次(히데쓰구)1)에게 넘겨 내정을 맡게 하고 자기는 태합太閤이란 최고직위를 받아 가지고 온전히 원정군에 관한 사무만 보기로 하였다.

수길은 10만석 영토를 가진 제후에게는 대선 2척씩을, 그 밑의 제후에게는 대선 1척씩을 새로 지어 오게 하고, 군사는 사국四國 구주九州 중국中國 기주紀州 오기五畿 근강近江 이세伊勢 미장尾張 미농美濃 원강遠江 삼하三河 준하駿河 이두伊豆(이즈) 약협若狹(와카키) 능등能登(노토) 월후越後 출우出羽 육오陸奧의 장정들을 모집하여 조선 출병의 준비를 마쳤다.

수길이 친히 통솔하고 떠나려 하던 차에 수길의 모친 대정소大政所(오만도코로)[노부인의 존호]가 이르기를 “아서라. 너는 못 가리라.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 구십이 다 되어 죽을 날이 가까운 어미를 버리고 해외 귀역鬼域이란 조선으로 간대서야 내가 잠시인들 마음을 놓을 수가 있겠느냐!” 하며 죽기로 작정하고 만류하였다. 수길이 그 노모의 만류하는 정경은 비록 천하를 다 얻는다 하여도 바꿀 수 없었다.

수길은 원정군의 본영을 비전肥前(히젠)국 명호옥名護屋(나고야)2)에 두기로 하고 덕천가강 석전삼성石田三成(이시다 미쓰나리) 이하 모든 장수를 명하여 출정군의 부대를 조직하였다.

수륙군의 총세는 아래와 같다.

제1진 선봉
7000인 소서행장小西行長(고니시 유키나가)
5000인 종의지宗義智(소 요시토시)
3000인 _송포진신松浦鎭信(마쓰라 시게노부), 일명 평조신平調信
2000인 유마청신有馬晴信(아리마 하루노부)
1000인 대촌희전大村喜前(오무라 요시아키)
700인 오도순현五島純玄(고토 스미하루)
이상합계 1만8700인

제2진 선봉
1만인 가등청정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
1만 2000인 _과도직무鍋島直茂(나베시마 나오시게)
800인 _상량뢰방相良頼房(사가라 요리후사)
이상합계 2만2800인
제3진 선봉
5000인 흑전장정黑田長政(구로다 나가마사)
6000인 대우의통大友義統(오토모 요시무네)
이상합계 1만1000인

제4진
1만인 도진의홍島津義弘(시마즈 요시히로)
2000인 모리승신毛利勝信(모리 가쓰노부)
1000인 _고교원종高橋元種(다카하시 모토타네)
1500인 _추월종장秋月種長(아키즈키 다네나가)
1500인 _이동우병伊東祐兵(이토 스케타카)
이상합계 1만6000인

제5진
4800인 _복도정칙福島正則(후쿠시마 마사노리)
3900인 _호전승륭戶田勝隆(도다 가쓰타카)
이상합계 8700인

제6진
7200인 _봉수하가정蜂須賀家政(하치스카 이에마사)
3000인 _장종아부원친長宗我部元親(초소카베 모토치카)
5500인 _생구친정生駒親正(이코마 지카마사)
이상합계 1만5700인

제7진
1만인 _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500인 _모리수포毛利秀包(모리 히데카네)
2500인 _입화종무立花宗茂(다치바나 무네시게)
900인 축자광문筑紫廣門(쓰쿠시 히로카도)
800인 _입화직차立花直次(다치바나 나오쓰구)3)
이상합계 1만5700인

제8진 총대장
3만인 _안예재상安藝宰相 모리휘원毛利輝元(모리 데루모토)

제9진 수군
1500인 _구귀가륭九鬼嘉隆(구키 요시타카)
2000인 등당고호藤堂高虎(도도 다카토라)
1500인 _협판안치脇坂安治(와키자카 야스하루)
800인 _가등가명加藤嘉明(가토 요시아키)
1100인 _내도통총来島通総(구루시마 미치후사)
400인 관야정영菅野正影(스게노 마사카게)
900인 _상산중승桑山重勝(구와야마 시게카츠)
1000인 _상산소전차桑山小傳次(구와야마 쇼덴지)
900인 _굴내씨선堀內氏善(호리우치 우지요시)
700인 _삼약전삼랑杉若傳三郞(스기와카 덴사부로)
이상합계 1만800인

제10진 수륙군 총대장
1만인 _비전재상備前宰相 부전수가浮田秀家(우키다 히데이에)4)

이상 수륙군의 총합계가 15만9400여 인이었다. 그 시대에는 육군과 수군의 구별이 오늘 과 같이 판연히 다르지 않아서, 수군도 육전을 하였고 육군도 병선에 올라 수군이 된 예가 많았다. 장수도 역시 그러하여 수군대장이 상륙작전 시에는 육군대장이 된 예가 많았다. 이 15만9000여의 대군 이외에도 서해 관문에서 책응하는 수군이 4만이고, 또 비전 명호옥의 본영과 일기와 대마에 주둔한 후방 예비군이 합 11만이니 이상 수륙군이 합 30만9000여 인이던 것이었다.

▲ 조선의 연해안을 모두 점령하고 조선의 수군을 전멸하여 조선의 제해권을 완전히 손안에 넣은 뒤에 명나라로 향하여 수륙군이 서로 호응하여 들어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불멸의 이순신 중 한 장면.
병선은 각처 제후들의 새로 지은 누각선과 포도아국 서반아국5)등 서양제국에서 큰 도해선渡海船을 많이 구입하였다. 군자금은 화강금花降金이니 석천은石川銀이니 하는 돈을 새로 주조하고 군중의 재정은 대장대보大藏大輔 장속정가長束正家(나쓰카 마사이에)가 맡게 하고 출전 제장의 선발과 상벌은 치부소보治部小輔 석전삼성과 형부소보刑部小輔 대곡길계大谷吉繼(오타니 요시쓰구) 두 사람에게 맡겼다. 대판에서 출발하는 날에 태합 풍신수길이 일종의 각서를 발표하였다.

“금번 출정군이 승리한 후에는 천황의 도성을 명나라 북경으로 천도하고 천팔백국의 조공을 받을 것이니 그때이면 여러 장수들의 식록은 열배 이상이 될 것이다.”

육군이 먼저 떠난 지 며칠 뒤에 수군은 일기 대마에서 지체하다가 떠났다. 육군의 선봉은 4월 13일에 부산 부두에 상륙하고 수군은 4월 27일에야 각양 전투 기구와 물품을 싣고 떠났다. 수군의 총세는 합 6만여 인이나 부르기를 10만이라 하였다. 후일 평양平壤에서 소서행장의 서간에 “수군 10만이 서해6)로부터 도착했다” 한 것이 이를 말함이다.

조선의 연해안을 모두 점령하고 조선의 수군을 전멸하여 조선의 제해권을 완전히 저의 손안에 넣은 뒤에 명나라로 향하여 수륙군이 서로 호응하여 들어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 하에 행군하여 의기당당하게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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