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집 | 1980년대 동서독 vs 2021년 한반도

문재인 정부도 2021년 5월이면 집권한 지 만 4년이 된다. 집권 초기엔 한반도 평화가 무르익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남북은 아직도 멀고, 통일은 여전히 먼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최근 들어 답답함을 느낀다. 기계적인 남북통일 방법론과 거기서 수반하는 조급증을 이젠 떨칠 때가 됐기 때문이다. 1980년대 서독에 유학갔을 때 겪었던 ‘낯선 경험’ 때문에 더 답답한 건지도 모르겠다.
 

독일은 분단된 후에도 동서 간 왕래를 계속했다.[사진=연합뉴스]
독일은 분단된 후에도 동서 간 왕래를 계속했다.[사진=연합뉴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인 1987년. 필자는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독일은 동서로 갈라진,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였다. 이 때문에 필자는 독일과 우리나라가 공통점이 많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독일의 관문인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브레멘 대학과 적색깃발 = 우리는 독일 북부의 상업도시에 있는 브레멘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갈아타고 다시 브레멘으로 향했다. 독일에 사는 선배집에 하루를 묵고 이튿날 브레멘 대학교를 방문했다. 그런데 학교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분명히 브레멘은 서독이었는데, 동독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대학 내 대형 건물들의 벽면에 낫과 곡괭이로 무장한 노동자들이 적색 깃발을 치켜든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게 아닌가. 반공을 국시國是(국가 정책의 기본 방침)로 받아들였던 필자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브레멘 대학의 행정 절차에 오류가 있어서 바로 입학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부득이하게 다음 학기에 입학 신청을 해야 했다. 고민 끝에 우리는 독일의 수도인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당시 베를린에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았다.

더구나 베를린에서 일하면 번 돈의 8%에 해당하는 돈을 서독 정부가 ‘베를린 수당’으로 지급(서베를린 거주 지원 정책)했는데, 외국인에게도 이 혜택을 똑같이 줬다.


공포의 베를린행 열차 = 다음날 우리는 선배의 도움으로 열차표를 끊어 베를린행 열차에 올랐다. 그런데 선배는 필자에게 “반드시 서베를린임을 확인하고 내려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참고 : 분단 독일의 베를린은 지리상 동독에 있었지만, 베를린 역시 동서로 갈라져 있어 서베를린으로 가려면 동독을 거쳐 가야 했다.] 
 

덜컥 겁이 났다. 잘못하면 서베를린이 아닌 동베를린에서 내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서독의 중북부 도시들을 거친 열차 안에선 동독으로 들어갈 거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실제로 열차가 동독지역으로 접어들자 동독의 검표원이 열차에 올라왔다. 그런데 검표원의 표정이 시종일관 밝았다. 때로는 승객들과 수다를 떨기도 했다.  

열차는 동독지역을 한참 지난 후 서베를린 중앙역에 도착했을 때 다시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열차가 동베를린 중앙역과 폴란드 바르샤바를 거쳐 러시아(옛 소비에트연방)의 모스크바까지 운행한다는 게 아닌가. 동독과 서독이 철저히 담을 쌓고 사는 줄 알았던 필자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위험하지 않은 장벽 = 우리가 느낀 혼란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우리는 베를린에서 저렴한 월셋집을 하나 구했다. 월세는 우리나라 돈으로 10만원도 채 안 됐다. 집 앞 도로를 하나만 건너면 베를린 장벽에 닿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나라로 비유하면 휴전선 바로 근처에 생애 첫 신혼집을 마련한 셈이었다. 건물 3층만 올라가도 장벽 너머 동베를린이 훤히 보였다. 

사실 그 집의 위험요소는 장벽이 아니었다. 지은 지 100년이 넘은 집이어서 벽에다 못 하나만 박아도 콘크리트 일부가 무너져 내린다는 게 더 큰 위험요소였다. 


물론 특별한 경험도 했다. 동독의 TV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역시 필자의 예상과 다른 부분이었다. 베를린 주민은 동독 TV 프로그램을 제한 없이 시청할 수 있었다. 이산가족의 방문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심지어 동독 출신의 연금수급자에게는 서독 측이 체류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일종의 환영금을 연 1회 지급하기도 했다. 

이색적인 분단 상황을 경험하며 살다 보니 나중엔 베를린이 분단돼 있다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외국 유학생인 우리에게 독일의 분단 상황은 그저 사소한 불편일 뿐이었다. 

 

서로 다른 통일관 = 그래서였을까. 유학 시절에 만난 서독 대학생들은 대체로 통일에 무관심했다. 통일을 반대하는 이들도 많았다. 서독인들이 막대한 통일 비용을 부담해야 할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왜 하필 그 비용을 자신들이 부담해야 하느냐는 불만도 상당했다. 

통일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낸 이들은 오히려 동독인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통일의 수혜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물론 그건 오판이었다. 통일 과정에서 서독이 동독에 막대한 재정 지원을 한 건 맞지만, 동독에선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단행됐기 때문이다. 통일 직전(1989년) 1000만여명이었던 동독의 경제활동인구는 통일 후 4년 만인 1993년 300만여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런 혹독한 구조조정은 통일 후 30년이 지난 지금도 동서독 간 생활수준 격차 문제, 실업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독일의 통일은 여전히 미완인 셈이다.

필자는 당시의 유학 경험이 한반도가 합쳐지는 데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첫째, ‘분단’과 ‘통일’은 반대말이 아니다. 유학 시절 독일의 상황을 보면 그렇다. 그들은 왕래를 전혀 못하는 것도, 서로의 생각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장벽이 있기에 ‘약간 불편할 뿐’이었다. 분단과 통일을 굳이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반면 한반도의 분단은 다르다. 교류가 거의 끊겨 있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건 분단 그 자체가 아니다. 극단적 대치상황과 교류 단절이다. 실향민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만든 사상 때문에 천륜까지 끊고 75년을 살아야 했다. 하루하루가 고통과 설움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는 분단 후 왕래가 거의 없어 이질성이 커졌다. 사진은 북한 개성박물관과 북한 관계자.[사진=이정우 교수 제공]
한반도는 분단 후 왕래가 거의 없어 이질성이 커졌다. 사진은 북한 개성박물관과 북한 관계자.[사진=이정우 교수 제공]

문제는 단절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남북 스스로 할 수 있는 역할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더구나 한반도는 주변 열강의 민감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스스로 뭔가 할 수 있는 역량이 적을수록 외생변수가 더 크게 작용하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분단을 극복하고 독일과 같은 통일국가를 이루려면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많아져야 한다. 내생변수라고 할 수 있는 자질과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이 합리적으로 ‘분단관리’를 해야 하고, 상호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신뢰자산을 축적해야 한다. 이는 교류과정에서 발생할 갈등과 불확실성을 줄이는 중요한 도구가 될 것이다. 

둘째, 통일은 우리에게 당위론적이고 필연적인 목표가 될 수 없다. 길고 긴 분단으로 남북의 이질성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민족사적 숙명론이나 통일의 당위성도 한계가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선 통일의 장점을 강조하는 전략이 유효할 수 있다.

당장은 경제적 부담을 초래할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통일이 남북한 모두에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게 어떻겠느냐는 거다. 이런 ‘공생적 이기주의’는 통일과도기의 경제적 불확실성이나 통일비용으로 인한 심리적 부담감도 상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정우 인제대 사회복지학 교수 | 더스쿠프
socwjwl@hanmail.net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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