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편 | 창신초 뒤편 계단

낡은 계단을 올라간다. 얽히고설킨 계단과 골목길은 구불구불 기차게 연결돼 있다. 집이나 건물을 만난 골목길은 접히고 꺾이면서 또다른 계단과 연결된다.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층층이 쌓인 계단과 골목길을 바라본다. 소소한 계단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길이 얼마나 유연한지 건축가와 사진가는 새삼 깨닫는다.

하얀 눈이 내려앉은 시멘트 계단이 마치 굽이치는 산맥과 같다. 유연한 곡선에서 시간의 흔적이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하얀 눈이 내려앉은 시멘트 계단이 마치 굽이치는 산맥과 같다. 유연한 곡선에서 시간의 흔적이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천국의 계단을 내려와 지봉로를 따라 동묘앞역 방향으로 걷다 보면 창신초등학교가 보인다. 그 뒤편엔 좁은 골목과 시멘트계단이 있다. 먼저 옛 항공사진을 통해 이곳 마을이 생긴 시기를 추측해본다. 

1947년 항공사진을 보면 흥인지문에서 동묘앞역 방향으로 까맣게 밀집된 한옥 지붕이 보인다. 1916년 개교한 창신초등학교가 지금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이번 편의 대상지인 창신초 뒤편엔 건물도, 골목도 없다. 

서울의 항공사진을 정기적으로 촬영하기 시작한 1972년도 항공사진을 확인한다. 창신초 뒤편으로 작은 규모의 지붕과 좁은 골목이 나타난다. 그 뒤편으론 토지를 새로 정비해 매각을 앞두고 있는 듯 계단식으로 분할한 대지가 나타난다. 더 뒤편으로 새로 개설한 도로가 보인다. 그 도로 너머엔 아파트가 줄지어 서 있다.

골목길에서 계단이 시작된다. 하나로 이어지다 때론 두갈래 길로 나뉜다. 강물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게 골목을 연결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골목길에서 계단이 시작된다. 하나로 이어지다 때론 두갈래 길로 나뉜다. 강물처럼 부드럽고 유연하게 골목을 연결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추측해 보건대 ‘1945년 광복’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동대문을 중심으로 봉제산업이 성장하고, 도심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까지 각광받으면서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서울살이’를 시작한 듯하다.  

이런 이유로 서울시는 이곳 산중턱에 시영아파트를 건설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과정에서 도로가 생기고 주택을 지을 수 있는 대지가 개발·분양됐을 것이다. 그러니 창신초 뒤편의 골목과 그 골목 속 계단의 나이는 적게는 50살, 많게는 70살 정도일 게 분명하다. 

실제로 골목길을 걷다 보면 아주 오래된 시멘트계단 위에 다시 시멘트를 덧발라 보수한 흔적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언뜻 봐도 그 나이가 적지 않음이 느껴질 정도다. 자! 창신초 뒤편에 나 있는 소소한 계단을 올라간다. 

복잡하게 얽힌 계단과 경사로가 좁은 골목길이 요리조리 잘 연결돼 있다. 목적지인 집의 대문이나 건물의 출입문을 만나면 골목길은 갈라지고 접히고 꺾여 또다른 계단으로 이어진다. 골목 속 계단과 경사로는 대부분 시멘트로 마감돼 있다. 그 재질과 모양이 뭉뚝하고 거칠지만 눈에 익어 편안하다. 골목길의 지형에 맞춰 층층이 올라가는 계단은 사람의 발자국이 그대로 녹아 만들어진 듯하다. 

한쪽 계단은 집으로 연결돼 끝이 난다. 다른 쪽은 또 다시 길로 이어진다. [사진=오상민 작가]
한쪽 계단은 집으로 연결돼 끝이 난다. 다른 쪽은 또 다시 길로 이어진다. [사진=오상민 작가]
계단의 ‘단’이 반칸씩 나뉘어 있다. 골목으로, 집으로, 그리고 기존 길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따라 보이지 않는 미세한 칸의 변화다. [사진=오상민 작가]
계단의 ‘단’이 반칸씩 나뉘어 있다. 골목으로, 집으로, 그리고 기존 길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따라 보이지 않는 미세한 칸의 변화다. [사진=오상민 작가]
계단도 세월에 따라 나이를 먹었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깨졌을 것이다. 시멘트를 덧바르고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계단도 세월에 따라 나이를 먹었다. 여기저기 부서지고 깨졌을 것이다. 시멘트를 덧바르고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가만히 서서 시멘트계단과 골목길을 바라본다. 사람의 발길과 시간이 함께 만들어낸 그것이 얼마나 유연하고 자연스러운지 새삼 느낀다. ‘수직과 수평’ ‘기능과 효율’을 건축의 가치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여기게 돼버린 나, 건축가로서의 사고가 얼마나 굳어버렸는지도 깨닫게 된다. 

그러던 지난가을, 날카롭고 둔탁한 기계소음과 함께 공사가 시작됐다. 마을의 노후 계단을 새 계단으로 바꾸는 자치구 사업의 일환이란다. 오래지 않아 반듯한 계단이 뚝딱 완성됐다. 재료가 평범하긴 하지만 시멘트가 빚어 내려간 계단보단 재질감도 있고 튼튼해 보인다. 계단 아래 땅속에는 배수관도 설치했다. 계단 양측으론 어르신들과 아이들이 잡고 오르내릴 수 있는 구불구불 손잡이가 생겼다.

낡은 계단 하나 바꿨을 뿐인데, 골목 경관이 정돈된 듯 깨끗해지고, 배수 환경이 개선됐다. 동네 어르신과 어린이의 이동도 편해졌다. 소소한 변화일지 몰라도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특히 이동약자들에겐 도움이 될 만한 변화다.

창신동의 언덕에 존재하는 골목은 대부분 계단의 형태로 존재한다. 골목길의 경사는 계단의 높이로 이어진다. [사진=오상민 작가]
창신동의 언덕에 존재하는 골목은 대부분 계단의 형태로 존재한다. 골목길의 경사는 계단의 높이로 이어진다. [사진=오상민 작가]
지난가을 정비사업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계단. 손잡이는 이동을 좀 더 손쉽게 만들어준다. 계단의 질감은 튼튼해 보인다. 이 계단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이동을 도와줄까. [사진=오상민 작가]
지난가을 정비사업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계단. 손잡이는 이동을 좀 더 손쉽게 만들어준다. 계단의 질감은 튼튼해 보인다. 이 계단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이동을 도와줄까. [사진=오상민 작가]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깎아내린다. 마을의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업이 아니라고 쏴붙이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이 사업의 목표는 근본적인 것을 고치는 게 아니다. 마을이 갖고 있는 것을 유지·관리해 동네주민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거다. 

이 목표만 달성하면 이 사업은 성과를 낸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을 다루지 않았다고 쓸데없는 일’이라고 평가절하해선 안 된다. 재개발이든 도시재생이든 혹은 아무것도 개발하지 않든 주민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환경을 개선하고 인프라를 지속 설치하는 게 마땅치 않겠는가. <다음호에 계속> 

글 = 박용준 보통사람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  
opa.lab.02064@gmail.com  

사진 = 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빽빽한 집들 사이로 시멘트 계단이 보인다. 계단은 칸칸이 아래에서 위로, 집과 집 사이를 연결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빽빽한 집들 사이로 시멘트 계단이 보인다. 계단은 칸칸이 아래에서 위로, 집과 집 사이를 연결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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