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장소비자가 대체한 출하가
이름만 바뀌고 폐해는 그대로

제조사가 명시하는 ‘권장소비자가’. 소비자에게 ‘정상가’를 알려준다는 취지였지만 판매사와 제조사가 상술의 도구로 활용하면서 소비자에게 혼란만 줬다. 그래서 탄생한 제도가 ‘오픈프라이스’다. 정상가로 경쟁하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권장소비자가에서 오픈프라이스로 제도가 달라졌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오픈프라이스 20년의 성과를 냉정하게 짚어봤다. 

아이스크림은 오픈프라이스 제도의 한계를 드러낸 대표 품목으로 꼽힌다.[사진=연합뉴스]
아이스크림은 오픈프라이스 제도의 한계를 드러낸 대표 품목으로 꼽힌다.[사진=연합뉴스]

저렴하지도 덤터기를 쓰지도 않은 적절한 가격. 이를 두고 정상가라고 한다. 정상가를 알면 소비자는 제품의 실제 판매가격이 싼 건지 비싼 건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럼 정상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과거엔 권장소비자가격(희망소비자가격)을 정상가로 여겼다.

권장소비자가격은 제품 포장지에 표기된 가격으로, 판매자와 소비자가 참고할 수 있도록 제조사가 책정한 값이다. 판매자가 반드시 이 가격을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말 그대로 ‘권장’ 가격이다. 당연히 권장소비자가격과 실제 판매가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1999년부터 일부 품목에선 권장소비자가격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TVㆍ오디오ㆍ세탁기ㆍ운동복ㆍ운동화를 비롯한 12개 품목으로 시작해 이듬해 냉장고ㆍ에어컨ㆍ카메라ㆍ시계 등 10개 품목이 ‘폐지대열’에 합류했다. 2010년엔 빙과ㆍ과자ㆍ아이스크림ㆍ라면과 함께 247개 품목이 더해지면서 총 279개 품목에서 권장소비자가격 표시가 금지됐다.

금지 이유는 간단하다. 소비자를 위한 권장소비자가격을 되레 악용하는 사례가 늘었기 때문이다. 제조사와 판매자가 담합해 권장소비자가격을 일부러 높게 책정한 뒤 마치 할인율이 높아진 것처럼 소비자를 오도한 것이다. 권장소비자가격은 더 이상 정상적인 판매가격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 없었다.

권장소비자가격이 없어진 이후 가격표시체계는 ‘판매가격표시(오픈프라이스)’ 제도로 대체됐다. 오픈프라이스 시스템에선 소비자에게 혼란을 주지 않도록 판매자가 정한 실제 판매가격만 표시해야 했다. 당시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는 “오픈프라이스제로 가격을 일원화하면 판매자들이 자율경쟁을 펼칠 수밖에 없어 제품 가격이 떨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지금 오픈프라이스제는 잘 정착했을까. 가장 먼저 잡음이 터진 곳은 가공식품이었다. 제품 가격이 안정되기는커녕 판매점별로 가격 격차가 2~3배로 뛰었다. 특히 아이스크림은 상시 할인행사나 ‘1+1’ 프로모션을 내건 미끼상품으로 전락했는데, 기준가격이 없고 가격표시가 미흡해 소비자의 혼란을 초래한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결국 빙과ㆍ과자ㆍ아이스크림ㆍ라면은 오픈프라이스 품목으로 지정된 지 1년 만인 2011년 6월에 제외됐다.

더 이상의 리스크는 없을까. 산자부는 아이스크림을 비롯한 4개 품목을 제외한 이후 “오픈프라이스가 정착단계에 들어섰다”고 평가했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을 공산이 크다. “권장가격을 끌어올려 할인율이 높은 것처럼 소비자를 오도한다”는 1990년대 권장소비자가격의 폐해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오픈프라이스제에서 더 다양한 방법의 상술이 소비자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그 중심엔 ‘출하가’가 있다. 가전제품의 경우 제조사들은 여전히 출하가를 공개하고 있다. 판매자들은 권장소비자가격 대신 출하가를 판매가와 함께 명시하며 할인폭이 얼마나 되는지를 내세운다. [※참고 : 권장소비자가격이나 출하가나 제조사가 결정한다. 따지고 보면 별다를 게 없다.] 이 역시 소비자를 오도할 우려가 크다. 흔히 출하가를 ‘유통사가 제조사에 지불하는 가격’이라고 오인하기 쉽지만, 사실상 출하가는 제조사가 제품에 매긴 가치를 뜻한다. 

출하가는 통상 유통사가 소비자에게 파는 가격보다 높게 책정된다. 업계 한 관계자는 “출하가가 유통사의 판매가보다 낮으면 유통사가 가격정책이나 프로모션을 운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이를 감안해 출하가는 높게 책정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판매자가 인위적으로 가격을 조정해 ‘가짜 할인상품’으로 혼동시키는 경우도 숱하다. 1+1 상품, 사은품이라면서 판매가에 포함해 놓거나, 할인행사 기간에만 기존 판매가를 슬쩍 높이는 건 이제 흔히 볼 수 있는 꼼수다. 이는 오히려 권장소비자가격이 없어서 발생하는 폐해다.

대형 가전제품 판매점에서 운용되는 내부 프로모션도 마찬가지다. 판매점에 진열된 제품에 가격표가 붙어 있지만 실제 구매할 땐 내부적으로 운용되는 프로모션에 따라 가격이 떨어진다. 매장별ㆍ상품별ㆍ판매사원별로 제공하는 혜택과 할인율이 다르고, 그마저도 매주 바뀌기 때문에 소비자가 정상가를 가늠하긴 어렵다.

문제는 매번 달라지는 가격 때문에 소비자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제품을 사는 데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혹여라도 정상가로 둔갑한 가격표대로 제품을 구매하면 오히려 덤터기를 쓴 꼴이 될 수도 있다.

오픈프라이스제의 폐해를 두고 업계 한 관계자는 “사실 진정한 오픈프라이스제는 기존 판매가, 할인율 등 소비자를 혼동시키는 정보를 배제하고 최종 판매가만을 공개하는 것”이라면서 “이렇게만 되면 오픈프라이스제에서 비롯되는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오픈프라이스제의 가장 큰 한계는 정상가를 알기 어렵다는 점이다. 권장소비자가격 때의 문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유다. 산자부 관계자는 “판매자들의 무한 경쟁이 제품 가격을 떨어뜨리고 소비자들의 합리적 소비를 이끈다”고 설명했지만 반대로 판매자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폭리를 취해도 소비자는 이를 분간하기가 어렵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발품을 팔면 판매자들의 눈속임과 상술, 가짜할인 상품을 가려낼 수 있다지만 이마저도 결국 소비자가 떠안아야 할 몫이다. 

권장소비자가격이 없어지고 오픈프라이스 제도가 정착된 지 20여년이 흘렀다. 판매자들의 상술은 더 교묘해지고, 소비자들의 혼란은 더 가중되고 있다. 제도의 이름만 바뀌었지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는 거다. 당연히 소비자들이 얻은 혜택은 없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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