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편 | 수많은 계단들

창신동 낙산을 오르는 수십개의 골목에는 많은 계단이 있다. 그 계단에는 동네 주민의 숱한 이야기가 서려 있다. 계단이 생겼을 때는 단지 오르내리기 위한 통로였을지 몰라도 사람들은 그 계단을 오르내리며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고 시간이 지나면 이야기는 모두 잊힌다.

창신동을 오가는 사람은 저마다의 계단을 오르내린다. 각자의 발걸음과 이야기가 계단에 쌓여간다. [사진=오상민 작가]
창신동을 오가는 사람은 저마다의 계단을 오르내린다. 각자의 발걸음과 이야기가 계단에 쌓여간다. [사진=오상민 작가]

■납득이 계단 = 창신동은 TV와 스크린에 자주 나오는 촬영지 중 한곳이다. 이곳이 갖고 있는 감성적 풍경과 뛰어난 전망, 특색있는 골목길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차별적인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주인공(이제훈)과 납득이(조정석)가 함께 있는 대부분의 장면도 이곳 창신동 산 윗마을에서 찍었다. 그중에서도 둘이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눴던 장소는 종로사회복지회관 옆(영화속 정릉독서실) ‘납득이 계단’이다. 영화를 찍지 않았다면 아무런 의미조차 없는 계단이었을 조그만 시멘트 계단. 이곳은 지금도 영화 속 모습 그대로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주인공과 납득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사진 위). 영화에 출연했던 계단은 아직 그 모습 그대로다. [사진=오상민 작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주인공과 납득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사진 위). 영화에 출연했던 계단은 아직 그 모습 그대로다. [사진=오상민 작가]

주인공이 소심한 표정으로 계단에 앉아 있다. 납득이는 답답한 표정으로 주인공을 내려다본다. 연애고수라도 되는 듯 뽀뽀와 키스의 차이점을 두 팔과 손, 그리고 손가락을 이용해 섬세하면서도 때론 격렬하게 묘사한다. 화려하고 과장된 손놀림으로 표현하던 그 장소가 바로 납득이 계단이다. 난 그곳을 걸을 때마다 “어떡하지? 너?(영화속 대사)”와 “야! 너두 할 수 있어!(광고속 대사)”가 생각나 배시시 웃는다.

언젠가 내가 이곳을 떠나고, 거기서 또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영화 건축학개론을 다시 보는 날을 상상해 본다. 먼 미래의 어느날 영화 속 마을 풍경과 납득이 계단을 본다면, 처음 이 마을에 사무실을 열고, 출근하고, 걷고, 일하던 나의 40대를 다시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별것 아닌 시멘트 계단이 영화 속 납득이 계단으로 인식되는 순간, 그것은 내 인생의 첫 사무실을 떠오르게 만드는 의미 있는 계단이 됐다. 

눈 덮인 납득이 계단. 누군가에겐 일상의 계단, 누군가에겐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계단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눈 덮인 납득이 계단. 누군가에겐 일상의 계단, 누군가에겐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계단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상한 계단 = 창신소통공작소 근처의 좁은 골목과 찻길을 이어주는 한 골목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 이상한 계단’이 있다. 그 모양 자체가 대단히 이상하진 않지만 야외 계단으로서 일반적인 형태는 아니다. 계단을 쓱 보면 ‘뭐 좀 애매하게 생겼네’ 정도지만, 직접 계단을 체험해 보면 다른 느낌이 든다.

‘이상한 계단’을 올라가보자. 창신동 속 좁고 가파른 골목길. ‘이상한 계단’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다른 골목보다 좀 더 좁고 어두운 데다 가파른 느낌이다. 골목 속 계단을 올려다보니 계단 끝부분이 90도로 꺾여 다시 계단으로 이어진다. 그 위로 구멍 같은 통로가 보인다. 통로 위에 어떤 곳이 있는지는 가늠할 수 없다. 다시 계단을 오른다. 꺾인 부분을 오를 땐 콘크리트 슬라브에 머리가 닿지 않도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상한 계단을 마주한다. 천장을 뚫고 나가는 것처럼 올라가는 기묘한 모양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상한 계단을 마주한다. 천장을 뚫고 나가는 것처럼 올라가는 기묘한 모양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다시 계단을 밟고 오른다. 그 끝엔 계단참(계단 중간에 설치되는 수평면 부분)이 있고 걸어 올라온 골목이 눈 아래로 어둡게 보인다. 다시 뒤돌아 계단을 몇단 밟고 올라가면 동네길이 좌우로 펼쳐져 있고 개방감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계단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시 계단을 쳐다본다.

이 경험을 짧게 요약하면 어두움과 밝음, 좁음과 넓음, 두려움과 편안함 등이 계단을 걸으면서 복잡하게 대비된다. 이런 경험이 겹쳐 ‘이상한 계단’이란 느낌이 생긴 것 같다. 이 계단은 언제, 어떻게, 왜, 이런 모양이 됐을까. 궁금하다.

이상한 계단을 뚫고 올라오면 건물 사이로 창신동 전경이 펼쳐진다. 발 아래에는 계단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상한 계단을 뚫고 올라오면 건물 사이로 창신동 전경이 펼쳐진다. 발 아래에는 계단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오상민 작가]

■계단 속 계단 = 창신동 속 계단을 걷다 보면, 가끔 계단 한쪽 끝에 밟을 만한 벽돌을 얹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마을을 오르내리는 게 불편한 어르신을 위한 ‘계단 속 계단’이다. 살고 있는 곳은 산 윗마을인데, 볼일을 봐야 할 곳이나 일이 모조리 마을 아래에 있다 보니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계단 속 계단은 어르신의 부담을 조금 덜어준다.

시멘트 계단 위에 대충 벽돌을 붙여 그 모양이 썩 아름답진 않지만, 마을 어르신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느낀다면 그것이 그 자리에 있을 이유는 충분하다. 후에 마을 건축가로서 기회가 된다면 어르신들을 위한 계단 속 계단을 제안해야겠다.

계단과 계단 사이에 벽돌과 시멘트로 반단 계단을 만들었다. 단 사이가 높아 만든 배려의 장치다. [사진=오상민 작가]
계단과 계단 사이에 벽돌과 시멘트로 반단 계단을 만들었다. 단 사이가 높아 만든 배려의 장치다. [사진=오상민 작가]

■계단 속 경사로 = 계단만 있는 골목에선 물건을 오르내리기 힘들다. 경사로가 있다면 바퀴 달린 것들이 다닐 수 있어 짐을 옮길 때 조금이라도 수월하지만, 경사로가 없는 곳은 바퀴를 멈추고 손으로 짐을 들어야 한다. 아직 이 마을에는 계단으로만 이뤄진 골목이 남아있다.

지난해 종로구청은 계단만 있던 몇몇 골목에 계단의 폭을 줄이고 좁은 경사로를 함께 만들어놨다. 보기에 무척 가파르지만 이것이 이 골목의 물류통로다. 주민들도 사용하지만 택배기사, 배달기사들도 오르내린다. 경사로의 경사각이 가팔라 평지에 비해 힘이 들지만 이것마저 없다면 물건을 오르내리는 게 몇배는 더 힘들 것이다. 작은 변화지만 이 마을에 사는 사람과 살아가기 위해,  이 마을을 다니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임에 틀림없다.

계단 옆에 경사로를 만들어 무거운 짐을 손쉽게 끌고 올라갈 수 있게 됐다. [사진=오상민 작가]
계단 옆에 경사로를 만들어 무거운 짐을 손쉽게 끌고 올라갈 수 있게 됐다. [사진=오상민 작가]

사무실 근처 계단을 둘러본다. 내가 모르는 저 계단에는 어떤 이야기가 스며 있을까. 왜 그 계단에 내 이야기는 없는 걸까.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이 마을에 충분히 스미지 못해서일 것이다. 언제쯤 나와 저 계단의 이야기가 만들어질까. 언젠가 내 이야기로 가득한 마을이 되는 것을 상상해 본다. 

글 = 박용준 보통사람건축사사무소 건축사 
opa.lab.02064@gmail.com 

사진 = 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