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습하는 출혈경쟁 우려
해운강국 봄꿈에 그칠까
관건은 공급보다 수요

지난해 초 해운시장이 침체할 거란 전망이 쏟아졌다. 해운사들이 서둘러 허리띠를 졸라맸지만 결과는 뜻밖이었다. 시장은 활기를 되찾았고, 해운사들의 몸집이 줄어든 덕에 뱃삯은 치솟았다. 최근 해운사들이 선박 주문량을 부쩍 늘린 이유다. 하지만 국내 해운업계엔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무리한 선박 발주가 출혈경쟁을 초래할 수 있어서다. 힘찬 뱃고동을 다시 울리느냐, 출혈경쟁에 휘말리느냐, 국내 해운업계가 기로에 섰다.

지난해 말 해상운임이 오르자 컨테이너선 발주도 덩달아 증가했다.[사진=연합뉴스]
지난해 말 해상운임이 오르자 컨테이너선 발주도 덩달아 증가했다.[사진=연합뉴스]

해운업계가 지난해 뜻밖의 호황을 누렸다. 특히 ‘컨테이너’가 뜨거웠다. 바닥으로 가라앉던 컨테이너선 운임이 예기치 않게 치솟은 덕분이었다. 컨테이너선 운임 지표인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지난해 800대에서 무려 2700대로 뛰어올랐다. SCFI 집계를 시작한 2009년 이후 최고치였다. 덩달아 해운사들의 실적도 껑충 뛰었다.

상승세는 올해 들어서도 이어지고 있다. SCFI는 벌써 2800대로 올라섰다. 그런데 왜일까.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는 해운업계에 기대감보다는 불안감이 짙게 깔려 있다. 과연 지금의 높은 운임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이냐는 건데, 이런 우려가 쏟아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해운업계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공급과잉과 치킨게임(출혈경쟁) 때문이다.

해운업계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 ‘속도경쟁’에서 ‘규모경쟁’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화물이 줄고 운임이 떨어지자 원가경쟁력을 높여 살길을 찾은 셈이다. 그 이후 글로벌 해운사들은 선박 발주나 인수ㆍ합병(M&A)을 통해 몸집을 불리는 데 집중했다. 규모가 작아 원가경쟁이 안 되는 해운사들은 하나둘 사라졌다. 해운업계가 장기간 불황의 늪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실제로 물동량(물자의 이동량ㆍ수요)은 2016년 1억7538만 TEU(1TEU=20피트 컨테이너 1개)에서 지난해 1억9446만 TEU로 10.9% 늘었지만, 같은 기간 세계 10대 해운사들의 선복량(배에 실을 수 있는 화물의 총량ㆍ공급)은 1413만 TEU에서 2042만 TEU로 44.5% 증가했다.

당연히 지난해 해운업계가 호황을 맞은 건 예상 밖이었다. 코로나19라는 변수가 불러온 나비효과였다. 글로벌 해운사들은 코로나19 탓에 세계 교역이 위축돼 물동량이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고, 배를 줄여 공급을 조절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반기 들어 교역이 살아났다. 상반기에 보내지 못했던 화물까지 몰리면서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공급은 줄고 수요는 쏠리면서 해상운임이 치솟은 것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해운사들은 늘어난 수요에 맞춰 공급을 늘려나갔다. 지난해 총 114만7669TEU(114척) 규모의 컨테이너선이 새로 발주됐는데, 그중 83%인 95만2014TEU(71척)가 해운시황이 살아난 4분기에 발주됐다. 이는 지난 한해 인도된 컨테이너선(85만5675TEU)을 웃도는 양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규모의 경쟁이 가속화하면서 해운업계 치킨게임이 고질적 문제로 자리 잡았다.[사진=연합뉴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규모의 경쟁이 가속화하면서 해운업계 치킨게임이 고질적 문제로 자리 잡았다.[사진=연합뉴스]

시장 관계자들은 이런 상황을 ‘치킨게임의 전조’로 읽었다. 이는 해운강국으로의 도약을 꿈꾸는 국내 해운업계엔 좋지 않은 징조다. 국내 해운사 대부분은 ‘규모가 작아 원가경쟁이 안 되는’ 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계 8위 해운사로 껑충 뛰어오른 HMM이라고 해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지난해 2만4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12척을 인도받아 덩치를 한껏 키웠지만, 상위 해운사들에 비하면 아직 한참 모자라기 때문이다. 시장의 우려처럼 치킨게임이 가열되면 국내 해운업계가 받을 타격이 상당할 거란 얘기다. 

그렇다면 정말 국내 해운업계의 재건계획은 한낱 봄꿈에 그치고 말까.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건 아니다. 숱한 위기 속에서도 기회의 문은 열려 있게 마련이다. 

■기회의 문❶ 공급조절론 = 무엇보다 지난해 4분기에 쏟아진 컨테이너선 발주가 치킨게임을 초래할 거란 우려는 기우杞憂일 수 있다. 별다른 이유가 아니다. 선박이 제작되는 기간은 통상 1년 6개월에서 2년가량. 해운사들이 발주한 선박은 빨라야 2022년께 인도된다는 얘기다. 

실제로 프랑스 해운조사기관 알파라이너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에 발주된 95만2014TEU 규모 선박 중 2022년에 인도되는 건 16만2173TEU(18척). 나머지는 2023년 이후에나 순차적으로 투입될 예정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운임이 오르면서 발주가 늘고 있는 건 맞지만 단기적인 이슈보다는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면서 “노후화와 친환경 이슈로 폐선ㆍ대체되는 선박이 점차 증가할 공산이 크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기회의 문❷ 수급조절론 = 국내 해운업계에 기회가 있다는 주장의 논거는 또 있다. 수급조절론이다. 글로벌 해운사들이 수급 조절을 통해 운임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은 상황에서 섣불리 공격적인 운영을 펼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전형진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연구실장은 “컨테이너선 시장은 지금도 충분히 공급과잉 상태”라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코로나19가 해소되고 세계 무역이 정상화한다면 해운사들이 다시 공격적으로 운영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선 그럴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공급조절을 통해 운임을 올릴 수 있다는 학습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해운사들의 초대형 컨테이너선이 인도되는 시점에선 코로나19도 해결될 공산이 크다는 거다. 그때 해운사들이 현재 선복량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선박을 추가할지, 기존 선박을 대체할 것인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

앞선 설명대로라면 해운사들의 컨테이너선 발주는 무차별적인 공급 확대가 아닌 운항효율과 수익을 높이기 위한 전략적 투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거다. 정연승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도 당장 치킨게임을 논하기엔 이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2022~2023년쯤엔 다시 치킨게임이 언급될 수도 있다”면서도 “하지만 해운사들의 재정적 부담이 여전히 크고, 20년 이상 써야 하는 선박에 어떤 연료를 써야 할지 결정하는 것도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탓에 보수적으로 투자하는 곳이 늘고 있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올해 해운업계는 공급보다는 되레 수요에 좌우될 수도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불확실성과 소비패턴의 변화로 기존 비수기와 성수기의 경계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올해 글로벌 해운사들의 선복량이 크게 늘었음에도 전통적인 비수기인 1분기 해상운임이 여전히 높다는 건 수요가 꾸준하다는 방증이다.

정연승 애널리스트는 “글로벌 소비 시장에 따라 해운시장의 변동성이 달라질 것”이라면서 “운임이 치솟진 못해도 예전만큼 빠지진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향후 최소 6개월은 높은 수준의 운임이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뜻밖의 호황을 맞은 국내 해운업계, 때이른 봄바람에도 불안감은 여전하다. 일각의 우려처럼 치킨게임에 휘말릴까 아니면 또다른 기회의 발판을 마련할까.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