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낸다는 경제단체
여태껏 목소리 안 냈나
권위적 정부에선 뭐했나

경제단체들이 “목소리를 내겠다”고 벼르고 있다. 그들의 말을 빌려보면 ‘친노조ㆍ반기업 성향을 가진 정부가 기업들을 규제하는 법과 제도만 만들고 있다’는 게 이유다. 그런데 이상하다. 권위적인 정부가 집권했을 때 경제단체들은 제 목소리를 낸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누울 만하니까 발 뻗으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들의 수장이 바뀌면서 재계의 이익을 강하게 대변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서울상의 회장직을 맡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사진=뉴시스]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들의 수장이 바뀌면서 재계의 이익을 강하게 대변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서울상의 회장직을 맡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사진=뉴시스]

“낮은 자세로 귀 기울여 업계의 목소리를 적극 대변하겠다.” 2월 24일 구자열 LS그룹 회장이 한국무역협회(제31대) 회장 취임사에서 말한 내용이다. 7만여 회원사들의 이익을 적극 대변하겠다는 거다. 2006년 이후 지금껏 퇴직한 정부 관료들이 맡던 회장직을 15년 만에 민간기업의 회장이 맡게 됐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하다.[※참고: 정부 관료들이 회장을 맡았다고 해서 목소리를 못 냈는지는 의문이다. 사실 자유무역협정(FTA) 등 굵직한 현안이 있을 때는 나름의 주장들을 펼쳤고, 정책에도 반영된 바 있다.]

이번에 제24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게 된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재계가 거는 기대감도 이와 비슷하다. 국내 4대 그룹(삼성ㆍ현대차ㆍSKㆍLG) 총수 가운데 대한상의 회장을 맡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재계 단체의 무게 중심이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에서 대한상의로 완전히 옮겨갔다는 분석도 나온다.

전경련은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된 이후 재계 대표단체로서의 역할을 못 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재계에선 “최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국회와 정치권에 재계의 의견과 현실을 잘 전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재계의 기대감이 크다는 얘기다. 

목소리 안 낸 적 있나

경제단체장이 그 회원사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회원사들이 왜 굳이 이처럼 좀 더 큰 ‘기대감’을 내비치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재계의 목소리가 좀처럼 반영되지 않는 데다 재계에 불리한 제도나 정책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재계가 경제단체장에 거는 기대감이라는 게 ‘영향력이 있는 대기업 총수가 나서서 정부와 국회 등에 강력한 목소리를 내달라’는 주문인 셈이다. 최근 다양하게 분화해 있는 경제단체들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는 주문도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몇가지 의문이 든다. 우선 현 정부에서 경제단체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했느냐는 거다.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지난해 개정된 상법의 애초 개정안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업의 경영투명성을 확보한다는 취지로 상장회사에 감사위원 중 최소 1명을 이사와 별도로 선출하도록 하고,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을 합쳐 3%까지만 인정한다.”

하지만 재계는 이 내용이 주주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고, 투기세력이 악용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다. 결국 정치권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지분을 합산하지 않고, 각각 3%씩 의결권을 인정하도록 완화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에서 ‘전속고발권 폐지’가 은근슬쩍 빠진 것도 같은 사례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을 폐지하면 공정위 고발이 없더라도 검찰이 자체적으로 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조사할 수 있었다. 당연히 재계는 반대 목소리를 높였고, ‘전속고발권 폐지조항’은 사라졌다. 

그동안 경제단체들이 대변해온 게 과연 재계의 이익이 맞는지 돌아봐야 한다.[사진=뉴시스]
그동안 경제단체들이 대변해온 게 과연 재계의 이익이 맞는지 돌아봐야 한다.[사진=뉴시스]

산업재해에 관해 기업과 CEO의 책임을 강화하는 중대재해처벌법이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재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론을 폈고, 재해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5인 미만 중소기업들은 법적용에서 제외됐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시대적 요구에 따라 등장한 법률안들이 재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는 거다. 경제단체들이 현 정부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것도, 그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또 다른 의문은 이전에도 경제단체들이 정말 필요할 때 목소리를 냈느냐는 거다. 재계의 기대감은 ‘할 말은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단체들은 그러지 않았다. 단적인 예가 국정농단 사건에서 보여준 전경련의 행보다.

박근혜 정부 시절 재계를 대표하던 전경련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의 설립을 주도하고, 회원사인 일부 대기업들로부터 수백억원의 돈을 모금해 이들 재단에 갖다 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주장을 할 만한 세상에선 목소리를, 주장을 아예 못할 세상에선 목소리 대신 돈을 내민 셈이다. 

의문은 또 있다. 경제단체들이 ‘재계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변하고 있느냐다. 사실 경제단체들이 ‘재계의 이익’과 상반되는 주장을 내놓은 경우는 종종 있었다.

지난 2012년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이 제안됐을 때부터 2015년 국회를 통과했을 때까지 재계는 끈질기게 이 법을 반대했다. 당시 26개 경제단체가 공동반대성명을 내기도 했다. 내수가 침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법이 실행된 이후 후유증은 단기간에 마무리됐고, 기업들은 이 법을 통해 오히려 득을 봤다는 평가가 많다. 쓸데없는 홍보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돼서다. 

경제단체들이 2015년 반대했던 탄소배출권거래제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경제단체들은 “소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환경규제에 반대 목소리를 확실히 내겠다”면서 “배출권거래제는 굴뚝을 막고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격”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6년이 지난 지금, 기후변화에 대응하지 않는 기업은 설 자리를 잃었다. 어찌 보면 정부의 규제가 기업의 리스크를 관리해준 셈이다. 

이런 의문점이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어떤 목소리를 내느냐’는 거다. 지금 경제단체들은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을까.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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