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곡물가격의 법칙

국제 곡물가격이 상승한다. 국내 수입가격이 오른다. 식품업체들이 꿈틀거린다. 이내 소비자가격을 인상한다. 국제 곡물가격이 올라 어쩔 수 없다는 이유를 댄다. 하지만 이는 국제 곡물가격이 오를 때만 적용되는 법칙이다. 국제 곡물가격이 하락할 때 이를 이유로 소비자가격을 낮추는 업체는 단 한곳도 없다. 변하지 않는 원재료(곡물)의 법칙이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이상한 국제 곡물가격의 법칙을 취재했다. 

국제 곡물가격이 급등하자 식품업체들이 가격인상을 단행하고 있다.[사진=뉴시스]
국제 곡물가격이 급등하자 식품업체들이 가격인상을 단행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식품업체들이 제품가격을 줄줄이 인상하고 있다. CJ푸드빌이 운영하는 제빵 프랜차이즈 뚜레쥬르는 지난 1월 22일 소보로빵·크루아상 등 90개 품목의 가격을 9.0% 인상했다. CJ푸드빌은 “글로벌 원재료 가격이 최고가를 경신하는 등 국내외 주요 원·부자재료 가격이 올라 제품값 인상이 불가피했다”고 밝혔다. 업계 1위인 파리바게뜨도 2월 19일 95개 품목의 가격을 5.6% 끌어올렸다. 파리바게뜨는 “각종 제반 비용 상승에 따라 가격을 조정했다”고 설명했다.

패스트푸드 업체도 가격을 인상했다. 한국맥도날드와 롯데리아는 최근 각각 2.8%, 1.5% 폭으로 가격을 조정했다. 롯데칠성음료는 6년 만에 음료수 가격을 평균 7.0% 올렸다. 이들 업체도 “원재료 가격의 상승으로 인한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가격 인상 이유를 설명했다.

누군가 총대를 메주길 바라던 라면업계도 설 연휴 중 ‘가격 인상’의 신호탄을 쐈다가 스스로 철회하는 촌극을 벌였다. 지난 2월 10일 오뚜기는 “3월부터 라면 가격을 9.5% 인상하겠다”며 대형마트에 공문을 보냈다. 2008년 이후 13년 만에 라면 가격을 인상할 계획이었지만 부정적인 여론에 부딪혀 ‘없던 일’로 입장을 바꿨다. 앞서 즉석밥 가격을 올렸다가 호되게 비판 여론을 경험한 결과였다.

■가격 인상 이유 = 그렇다면 식품업체들이 제품가격을 인상하는 이유는 뭘까. 앞서 언급했듯 이유는 간단하다. “국제 곡물가격이 크게 올랐다”는 거다. 가공식품 원재료 대부분은 대두·소맥(밀)·원당 등을 사용한다. 이는 1차 가공을 거쳐 대두유·밀가루·설탕이 되고 또 한번 과정을 거쳐 라면·제과·제빵·음료 등의 원재료로 쓰인다. 실제로 지난해 3분기부터 국제 곡물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하고 있다.

기상 이변으로 인해 곡물 주요 수출국들이 작황에 차질을 빚었고, 코로나19 확산의 영향도 컸다. ‘식량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곡물 수급이 어려워졌다. 더구나 곡물 자급률이 낮은 우리나라는 국제 곡물시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곡물 자급률은 쌀(92.1%)을 제외하곤 매우 낮다. 밀(0.7%)은 채 1%가 되지 않아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옥수수 자급률도 3.5%에 불과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식품업체의 가격인상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 모른다. 

■올릴 때와 내릴 때 = 하지만 이 문제를 순진하게 봐선 안 된다. 대부분의 식품업체들은 국제 곡물가격이 오를 땐 발 빠르게 대응하고 내릴 땐 나 몰라라 한다. 이게 문제라면 문제다. 쉬운 이해를 위해 2012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애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은 농업을 뜻하는 영어 ‘애그리컬처(agriculture)’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성한 신조어로, 곡물가격이 상승하는 영향으로 일반 물가가 오르는 현상을 가리킨다. 당시엔 미국·러시아 등 주요 곡물 생산국가에서 극심한 가뭄으로 생산량이 감소한 게 애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시카고선물거래소에 따르면 2011년 12월 1일 대두는 414달러(1톤·t 기준), 옥수수는 234달러, 밀은 221달러로 거래됐다. 그러던 것이 2012년 8월 30일엔 대두 650달러, 옥수수 319달러, 말 325달러로 크게 상승했다. 상승곡선이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이내 하락세로 돌아섰고, 2014년부턴 안정세를 보였다. 대두는 300달러, 옥수수와 밀은 100달러대를 오랜 시간 유지했다. 

그때 국내 업체들은 어땠을까. 2012년 식품 업체들은 너도나도 가격을 올렸다. 삼양식품은 삼양라면 등 6개 라면 가격을 50~ 60원씩 올렸고, 롯데제과는 2.9~20%, 오리온은 초코파이 가격을 25.0% 인상했다. 롯데칠성음료도 ‘설탕 등 원·부자재 가격과 포장재 가격 인상’을 이유로, 칠성사이다·펩시콜라 등 주요 제품 16개의 출고가격을 평균 3.0% 올렸다. 코카콜라음료도 가격을 인상했다. 

국제 곡물가격이 안정세를 찾고 그때와 비교해 낮은 가격을 유지하는 동안엔 어땠을까. 국내 식품 업체들은 이때도 되레 가격을 올렸다. 2014년엔 코카콜라음료가 먼저 코카콜라와 스프라이트 등 주요 제품의 출고가를 평균 6.5% 인상했다. 이어 롯데칠성음료가 칠성사이다·펩시콜라 등의 출고가격을 각각 6.5%, 6.6% 끌어올렸다. 2012년 주장대로 원재료 가격이 상승해 가격을 올려야 했다면, 원재료 가격이 하락했을 때 소비자가격도 조정하는 게 맞지만 업체들은 그러지 않았다. 한국소비자단체가 이런 점을 꼬집어왔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물가감시센터는 2019년 국제 곡물가격과 국내 수입가격, 가공식품 출고가, 최종 소비자자격의 추이를 비교해 가공식품의 물가 변동 현황을 조사해 발표했다. 밀가루 등으로 가공되는 소맥을 살펴보자. 조사에 따르면 2011년 대비 2018년 3분기 기준 국제 소맥 가격은 30.7% 하락했다. 수입가격 역시 비슷한 수준인 32.2%로 하락했다. 하지만 소맥을 1차 가공한 밀가루 출고가격은 14.0% 하락하는 데 그쳤다. 문제는 소비자가격이다. 국제 곡물가격, 국내 수입가격, 가공식품 출고가 모두 하락했는데 소비자가격만 10.0% 상승했다.

패스트푸드 업계도 연이어 가격을 인상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패스트푸드 업계도 연이어 가격을 인상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설탕의 주원료인 원당 가격도 마찬가지다. 곡물가격과 수입가격이 같은 기간 각각 55.1%, 48.8% 떨어졌다. 다소 둔화하긴 했지만 출고가격도 34.8% 떨어졌다. 하지만 최종 소비자가격은 3.0% 하락하는 데 머물렀다. 식품업체들이 원재료 가격 상승을 이유로 소비자가격을 올리지만 그 변동폭이 상승이 아닌 하락일 땐 소비자가격에 반영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2020년 11월부터 국제 곡물가격이 상승하면서 곳곳에서 가공식품 가격이 인상되고 있다. 국제 곡물가격 인상은 원재료 가격 인상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제품가격 인상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이미 가격을 올린 업체들도 있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박상준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원재료 매입과 투입 시점엔 9개월~1년이라는 괴리가 있다”며 “지난해 3분기부터 곡물가격이 상승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올 2분기나 3분기부터 가격 인상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더 많은 업체가 더 큰 폭으로 가격을 올릴 수 있단 얘기다.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물가감시센터 관계자는 “원재료 가격 인상을 이유로 제품 가격을 인상했던 업체들은 가격 인하에 인색하다”면서 이렇게 꼬집었다. “원자재 가격 하락이 하락할 땐 자발적으로 그 혜택을 소비자와 공유하고 가격 인하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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