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걷수다] 건물 해체공사의 기록 ❶

건물을 해체공사를 앞두고 건물에 누런 천을 둘렀다. 이제 생을 다하고 떠나기 전 마지막 수의를 입은 모습같이 보인다. [오상민 작가]
건물을 해체공사를 앞두고 건물에 누런 천을 둘렀다. 이제 생을 다하고 떠나기 전 수의를 입은 모습 같다. [오상민 작가]

사람이 살던 곳엔 흔적이 남는다. 삶, 평범한 일상, 아빠와 엄마, 아이들의 기록이다. 장사하던 곳에도 흔적이 숱하다. 버려진 테이블엔 전화번호부가 적혀 있고, 남은 서랍장엔 낡은 LP판의 잔상이 새겨져 있다. 어디에도 기록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질 건물의 평범한 기록, 해체공사를 둘러싼 소소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건물에 누런 천을 둘렀다. 수십년간 한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톡톡히 해낸 이 거대한 구조물은 이제 며칠 후면 세상에서 사라진다. 사람은 태어나고 죽고, 건물은 세워지고 무너진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렇게 시작과 끝이 있나 보다. 그런 생각으로 다시 공사장을 바라보니 쓸쓸한 분위기 속 누런 천은 수의 같고, 수의 속 건물은 꼭 망자 같다.

건물 해체를 앞두고 설치한 비계 뒤로 오후 햇살이 넘어간다. 해가 뜨고 지듯이 건물도 태어나고 사라진다. [사진=오상민 작가]
건물 해체를 앞두고 설치한 비계 뒤로 오후 햇살이 넘어간다. 해가 뜨고 지듯이 건물도 태어나고 사라진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 건물은 수십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품어주었을까. 그리고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얻고 삶을 살았을까. 건물은 마치 성인聖人처럼 다른 존재를 위해서만 한 생을 살다 사라진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 생을 다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존재가 세상에서 없어진다면, 그동안의 감사함을 표현하고 한 생애를 존중하며, 소멸을 위로하는 게 사람 된 도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번 프로젝트의 주제는 해체공사다. 지난여름 서울 은평구 응암동, 이번 겨울 종로구 숭인동에서 해체공사 감리업무를 하며 건물 속 사람의 흔적과 건물이 해체돼 가는 과정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풀어보자. 

응암동 철거 현장 중 한 집에서 키재기의 흔적을 발견했다. '아이가 있는 집은 다 비슷하구나!' 라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진다. [사진=오상민 작가]
응암동 철거 현장 중 한 집에서 키재기의 흔적을 발견했다. '아이가 있는 집은 다 비슷하구나!' 라는 생각에 미소가 지어진다. [사진=오상민 작가]

■ 철거 전 모습 = 먼저 숭인동을 가보자. 숭인동 해체현장은 동묘시장 속에 있다. 건물은 ㄷ자 모양으로 주건물과 부속건물이 붙어 있고 중앙부에 마당이 있다. 주건물은 도로에 면한 3층 건물이다. 낡았지만 제법 번듯하다.

1층 판매시설은 동묘시장 속 상점들이다. 구제옷가게, 과자할인점, 음식점, 사무실 등이 한칸에 하나씩 들어서 있다. 2층엔 1970~2000년대 가요·팝을 틀어줄 것 같은 분위기의 카페가 있으며, 계단 맞은편엔 부동산이 있다. 3층은 봉제공장으로 사용했고, 지하는 큰 창고를 칸막이로 여럿 쪼개놓아 임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건물 뒤편 부속건물과 지붕을 덮은 마당 역시 판매시설과 창고로 사용했다. 이 모든 것을 철거한 자리엔 커다랗고 높은 현대적인 오피스텔이 들어설 것이다.

응암동 1층 철물점. 쓰임을 찾지 못한 자재와 공구들이 버려져 쓰레기 신세가 되었다. [사진=오상민 작가]
응암동 1층 철물점. 쓰임을 찾지 못한 자재와 공구들이 버려져 쓰레기 신세가 되었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번엔 응암동이다. 응암동 해체현장은 도심에서 벗어나 있어 조용한 편이다. 주변에는 이미 여럿의 고층 오피스텔이 들어서 있다. 그래서 이곳을 철거한 자리에 새 오피스텔이 둥지를 틀면 ‘고층 오피스텔촌’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 모습이 꽤나 현대적일 것 같다.

해체할 건물은 지하가 없는 지상 5층 규모의 건물이다. 외부 마감재가 단단하고 깨끗하게 붙어 있어 건물 자체가 낡은 것 같진 않다. 건물 1층에는 필로티 주차장과 작은 철물점이 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에 사이 공간을 활용한 작은 경비실이 있다. 2층에는 옻오리·옻닭 등을 팔던 음식점이 있고, 주택 용도로 활용한 3~5층엔 층마다 한세대씩 자리를 잡고 있다. 거실·주방·방 3개 정도 규모의 작지 않은 주택이다.

숭인동 현장. 손때묻은 옷걸이에서 사람의 흔적이 느껴진다. [사진=오상민 작가]
숭인동 현장. 손때묻은 옷걸이에서 사람의 흔적이 느껴진다. [사진=오상민 작가]

■철거 전 용도별 모습 = 공사 관계자만이 다녀가는 해체 직전의 현장. 그 속의 분위기는 각 실의 사용 용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이제 건물 속으로 들어가 현장을 살펴보자. 이번에도 숭인동이 먼저다. 

숭인동 1층 판매시설과 2층 카페로 사용하던 공간은 매대·수납장·장식장 등 붙박이 가구가 많다. 이사할 때 붙박이장을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인지 영업 당시의 분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은 붙박이장이 부서져 흉물스럽지만, 레트로 카페의 장식장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LP판과 CD, 음악잡지가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곳 소파와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옛 음악을 감상했을 테고, 그 음악은 사람들에게 그 시절, 그 사람, 그 장소, 그 기분을 떠올리게 해줬을 것이다. 

숭인동 레트로 음악 카페를 지키는 붙박이 벽장들. 언제나 음악이 흘렀을 이 공간엔 적막함만이 남았다. [사진=오상민 작가]
숭인동 레트로 음악 카페를 지키는 붙박이 벽장들. 언제나 음악이 흘렀을 이 공간엔 적막함만이 남았다. [사진=오상민 작가]

카페 맞은편에 있는 부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빈 부동산에 들어가보니 버리고 간 가구와 벽 한편 액자에 담긴 공인중개사 자격증 사진 속 아저씨가 표정 없이 날 반긴다. 남긴 흔적을 살펴보니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서류·컴퓨터·집기는 물론, 휴지통 속 쓰레기까지 탈탈 털어 이삿짐에 넣어간 듯 깨끗하다. 부동산 같은 사무공간은 건물에 남길 흔적이 별로 없나 보다. 별 소득 없이 발걸음을 돌려 3층으로 올라간다.

봉제공장으로 사용하던 3층도 같은 이삿짐센터에서 이사를 해서인지 아주 깔끔하다. 남은 건 봉제공장에서 많이 사용하는 머리 높이에 설치한 조명전기설비와 미처 뜯지 못한 거래처 전화번호 스티커뿐이다. 남은 흔적은 이곳이 봉제공장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만든다. 이렇게 용도별로 혹은 업종별로 건물을 해체하기 직전 현장의 분위기는 조금씩 다르다. 

숭인동 2층 부동산 자리에는 빈 책상과 의자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창문에 붙어있는 글씨만이 이곳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알려준다. [사진=오상민 작가]
숭인동 2층 부동산 자리에는 빈 책상과 의자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창문에 붙어있는 글씨만이 이곳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알려준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번에는 지난여름 해체한 응암동 현장으로 가보자. 필로티 주차장과 건물 진입로 우측에 있는 1층 철물점엔 쓰레기가 가득하다. 남은 흔적이란 표현보단 쓰레기를 버리고 갔다는 말이 적합해 보인다. 바닥에 철물·가구를 비롯한 자질구레한 것들이 널려 있어 발 디딜 틈이 없다. 이젠 팔리지 않을 낡은 철물과 오래 사용한 물건을 그냥 폐기처분한 것인지 철물점 장사를 접고 다른 장사를 하려 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조금 심란해 보인다. 

쓰레기더미를 뒤로하고 2층으로 올라간다. 2층 음식점에 들어서니 1층 철물점과 대비되는 깔끔함이 눈에 띈다. 주인과 주방장이 청결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 듯, 남은 주방도, 홀도 철거 직전의 모습치곤 꽤 정돈돼 보인다. 지금은 테이블도 의자도 없지만 가족·친구들이 음식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그리며 마스크가 필요없던 그때 그 일상을 떠올려 본다.

숭인동 3층 봉제공장. 짜투리 헝겊으로 만들어놓은 휴지걸이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숭인동 3층 봉제공장. 짜투리 헝겊으로 만들어놓은 휴지걸이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3~5층 주택의 분위기는 다른 용도와 확실히 다르다. 언뜻 보면 이삿짐이 나간 후 빈집 상태와 비슷한데, 자세히 둘러보면 사람이 살던 흔적, 그중에서도 아이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거실 한쪽에 아이들의 성장을 표시해 놓은 벽지는 꼭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숫자·표시·이름을 보니 한가족이 꽤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방에 들어가 보면, 벽에 작은 낙서가 있다. 얼굴 한번 보지 않은 아이들의 흔적이지만, 그 모습을 보니 손조차 닿지 않는 벽에 알록달록 낙서하는 내 딸이 생각나 바보 같은 웃음이 새어나온다.

방 창문 유리 한편에는 작은 스티커가 붙어있다. 어렸을 때 엄마 몰래 창문 유리에 판박이를 붙이던 추억이 돋는다. 수십년만에 내 머릿속에 떠오른 아기공룡 덴버 판박이가 해체공사 현장을 물들인다.

어린 시절 벽지에 스티커를 붙이기도 했고, 엄마 몰래 색연필로 낙서를 한 기억도 난다. 공간은 달라도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한가보다. [사진=오상민 작가]
어린 시절 벽지에 스티커를 붙이기도 했고, 엄마 몰래 색연필로 낙서를 한 기억도 난다. 공간은 달라도 사람 사는 모습은 비슷한가 보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처럼 사람이 다녀간 곳엔 다양한 흔적이 있다. 수십년간의 삶이 건물에 남긴 흔적은 건물과 함께 완전히 사라지고, 사람의 기억만이 남는다. 내가 사는 지금의 공간, 나는 이곳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그 흔적은 어떤 기억을 갖고 있을까. 내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2부에서 계속> 

글 = 박용준 보통사람건축사사무소 건축사 
opa.lab.02064@gmail.com 

사진 = 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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