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10회

 
정발은 적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승전이나 한 듯이 즐거워하였다. 소서행장이 물러간 이유는 일종 계획이었다. 거짓 퇴병하여 정발로 하여금 마음을 놓게 하자는 계산이었다.

선조 25년 임진1592년 4월 12일에 일본 함대가 잇달아 부산항 앞바다에 들어오니 이 전쟁 임진란壬辰亂과 그 뒤의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본에서는 각각 문록역과 경장역1)이라 한다.

그 이튿날인 4월 13일 새벽에 일본 선봉 소서행장이 부산 바다에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새벽녘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700여 척이나 되는 대함대가 국경의 관문을 침입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방어책이 없는 조선의 군정이란 실로 한심한 정세였다.

일본군은 아무 저항도 없이 부산진을 향하여 풍우 몰아치듯 진군하여 쳐들어왔다. 전일에 부산첨사 정발은 절영도2)에 사냥을 나가서 자고, 아침에야 일본 부대가 상륙하였단 경보警報를 들었다. 정발은 타고 갔던 병선 3척을 끌고 급하게 돌아와서 성 위에서 바라본즉 일본 군사가 이상한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조총과 창검 깃발을 들고 항오를 갖추고 쳐들어왔다. 해마다 한 번씩 일본 배들이 장사하러 오는 전례가 있으나 아마 그것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배도 많고 사람도 많고 하여서 의혹이 났다.

웬일인가 하고 부하들을 돌아보며 “일본이 아무리 강하기로니 명분 없는 군사를 일으켜 가지고 무단히 이웃나라를 침범하면 천벌이 없을까? 설령 일본이 도전한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무엇 있나. 내 칼 한번이면 만군이 온대도 무슨 걱정이 있나” 하고 큰소리쳤다. 정발은 만부지용萬夫之勇이 있는 장수였다. 그 자부심으로 칼 쓰기를 자랑하였으나 정발이 이렇게 큰소리친 이유는 부산성 내에는 3000명이 되는 정예한 군사가 있고 성 외에는 깊은 못이 있고 못 밖에는 기마병이 말을 달리지 못하도록 철질려3)를 깔아 놓았다. 이만한 병력과 설비가 있으면 웬만한 적병은 근심할 것이 없을 것도 그럴듯한 일이다.

이때에 일본 제일군 사령관 소서행장이 부산첨사에게 사자를 보내어 통지문을 올렸다. 이번에 풍신수길이 대군을 일으켜 명을 치려하니 길을 빌려주어 무사히 들어가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정발이 보고나서 군사를 호령하여 그 사자를 성 밖으로 몰아 내쳤다.

정발은 그제야 이 배들이 세견선4)의 상단이 아니라 전쟁하려고 나온 병선인줄 알았다. 곧 성문을 굳이 닫고 군기를 배급하여 적을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으로는 군사에게 밀령하여 부산진 병선을 물 밑에 침몰시키고 성 위에 무사를 벌여놓아 활로 막게 하고 파발마를 보내어 다대포5)첨사 윤흥신尹興信, 좌수사 박홍, 동래東萊부사 송상현宋象賢, 좌병사 이각, 경상감사 김수 등에게 적정을 통고하고 겸하여 구원을 급청急請하였다.

정발은 검은 갑옷에 황금 투구를 쓰고 ‘일검보국’6)이라고 새긴 칼을 차고 말에 올라 군사를 지휘하고 군관들도 군위를 갖추고 독약을 바른 화살을 전통에 가득 넣어 메었다. 일본군이 풍진을 날리며 부산산성을 향하여 소낙비와 같이 몰려왔다. 장수가 말을 타고 앞을 섰고 중간쯤 해서는 순금 갑옷에 금광이 찬란한 뿔이 달린 투구를 쓴 대장이 제장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오는 것이 보였다. 이는 일본 선봉 소서행장이었다.

▲ 동래읍성역사축제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송상현 동래부사와 읍성민들이 동래 성을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하였던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일본군은 한바탕 맹렬히 싸운 뒤에 물러갔다. 정발은 적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그만 적을 얕보는 마음이 생겨서 술을 먹고 즐기며 부하들에게도 술을 주어서 질탕하게 먹었다. 마치 승전이나 한 듯이 즐거워하였다. 소서행장이 물러간 이유는 일종 계획이었다.

부산성의 방비가 견고하고 군사가 용감한 것을 보고 거짓 퇴병하여 정발로 하여금 마음을 놓게 하자는 계산이었다. 정발이 취중에 그날을 보내고 밤이 깊어서는 그만 단잠을 잤다. 잠을 자서는 아니 될 첨사가 초저녁에는 방어를 좀 하였으나 음주 후에 노곤한 잠을 자고 말았다. 부하들도 자는 사람이 차차로 증가되었다. 밤 축시쯤 해서 소서행장은 부산의 지리를 잘 아는 관내에 있는 왜호7)로 앞잡이를 세워서 부산성을 에워쌌다. 일본군은 달이 넘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대군을 몰고 삽시간에 에워쌌다.

초저녁에는 파수도 돌았으나 닭 울 때쯤 되어서는 훈련이 부족한 군사들이 주장의 취한 잠을 본받아서 그만 다 잠이 들어 방어하는 임무를 잊어버렸다. 소서군은 지리를 아는 왜호의 인도로 참호의 얕은 데를 쫓아 건너가서 사다리를 놓고 잠이 든 부산성을 넘어들어 밀물 넘듯 하여 가옥에 불을 놓아 화광이 충천하고 조총을 마구 쏘아 콩 볶듯 하여 피와 주검이 길을 막았다. 첨사의 상하 장졸이 불의의 습격에 놀라 깨어 총에 맞아 죽고 또는 밟혀 죽고 하여서 주검이 산더미 같았다. 나중에는 조선 장졸들도 정신을 차려 응전하였으나 벌써 무너진 형세를 만회할 수는 없이 되었다.

조총의 위력에 활이 당하기가 어려웠다. 만일에 먼 거리에서 마주 바라보고 싸운다면 활이 그 시대의 화승총보다 나은 점도 있을 듯도 하나 이번 싸움은 도저히 감당해낼 수가 없게 되었다. 일본군이 마침내 첨사의 아문8)을 포위하고 항복하기를 권했다. 아문 안에 남은 군사가 아직 천명은 있었다. 비록 늦게 응전하였으나 정발은 용맹하게 힘껏 싸웠다.

일본군은 정발의 검은 갑옷이 번쩍하면 무서워하였다. 그의 검술은 참으로 귀신 같아 검광이 빛나는 곳에 주검이 삼대 쓰러지듯 무너졌으나 과부적중은 형세상 당연한 일이라, 정발은 남은 군사를 끌고 물러났다. 그러나 최후 일인까지 싸우기를 결심한 것이었다. 성내에는 화광이 충천하고 성 위에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 쓴 깃발이 꽂히었다.

남은 군사도 차차로 총알에 맞아 거꾸러지고 한정이 있는 화살도 다 떨어졌다. 비장9)이정헌李庭憲 황운黃雲 등이 “사또 이제는 화살도 다 하였으니 피신을 하였다가 다음 기회를 기다림이 어떨지요” 하고 정발에게 청하였다.

정발은 웃으며 “남아가 왕명을 받고 변방에 장수가 되어 내 땅을 버리고 도망을 한단 말이냐 나는 이 성에서 죽어 이 성을 지키는 귀신이 될 터이니” 하고 칼을 들고 나갔다. 마지막으로 적을 하나라도 더 죽이고 자기도 죽자는 것이었다.

정장군의 비장한 말에 남은 군사들은 감동이 되어 피곤한 것도 잊어버리고 용기가 분발하여 “우리도 사또를 따라 이 성의 귀신이 될 테요” 하고 칼과 창을 들고 정발의 뒤를 따랐다. 아문을 열고 보니 소서행장의 군사는 안에서 화살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고함을 치고 달려들었다. 정발의 칼에 수십명이 죽는 것을 보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

정발은 칼을 휘두르며 적군을 쫓아 고루10)앞까지 나갔다. 부하들도 용감하게 추격하여 수백의 적을 죽였으나 마침내 정발은 조총의 탄환에 십여 군데를 맞아 엎어졌다. 비장 이정헌은 엎어지는 정발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도 주장을 안은 채로 탄환에 맞아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정발이 죽은 뒤에 정발의 첩 애향愛香은 남편을 따라 절사節死하였으며 비장 황운과 가노家奴 용월龍月이까지도 최후까지 대항하다가 다 전사하였다.

이러하여 부산진의 삼천장사는 최후 일인까지 싸워 죽고 근촌에 사는 여자 하나가 입성하였다가 이 난리를 당하고 분이 발하여 고루위로 뛰어올라가 기왓장을 빼어들고 일본군에게 던져서 몇 사람을 죽이고 역시 총알에 맞아 전사하였다. 부산성은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일본 군사의 사상자도 수천명에 달하였다.

정장군은 충의남아忠義男兒였다. 그 빼어난 용기와 기개는 가히 이순신 신립 제공으로 더불어 이름을 같이하겠으나 그러나 고립된 성에 구원이 없고 기지機智가 미치지 못할 뿐이라, 그 처지가 최전선에 있어서 죽음을 끝내 면치 못하니 애석한 일이로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부산성을 일본군이 에워쌌다는 말을 듣고 그 가족을 피난시키고 산에 올라 이십리 쯤 되는 부산성의 위급한 형세를 바라보고 소위 주장이 되어 관망만 하고 구하지 아니하였다. 우후와 군관들은 정발의 청원이 있으니 앉아서 구하지 않고 그 패망하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이 불가한즉 출병하여 구원하자고 하였으나 박홍은 불청하되 군사를 경솔히 움직일 수 없다고 꾀를 내고 핑계하였다.

약한 장수 밑에는 강한 군사가 없는 법이다. 부산진에서 위급하다는 보고가 와도 수군대장인 박홍이 겁내는 것을 보고는 군사들은 주장의 믿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에라, 아서라. 가자” 하고 모두 도망하여 버렸다. 박홍은 막지도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용렬한 박홍은 그런 중에도 후일의 책임을 두려워하여 상황을 써서 장계를 올리고 병선 수십척과 군기 군량이 들어 있는 창고에 불을 놓고 말을 타고 달아났다. 박홍의 군관이던 오억년吳億年이 박홍의 일에 대하여 군사 만여명을 가진 수사가 되어 싸워보지도 못하고 황겁 도망하는 모습을 보니 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만 활을 당겨 박홍의 등을 향하여 쏘았다. 박홍은 저의 군관에게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오억년은 동지 몇 사람과 함께 모여 좌수영의 빈 성을 지키고 있었더니 소서군이 또 좌수영을 범하였다. 오억년은 그 동지들과 하나 아니 남고 다 싸워 죽기까지 격렬히 항거하다가 전사하였다.

동래부사 송상현의 자는 덕구德求요 호는 천곡泉谷이요 여산인礪山人이었다. 조정에서 문무재라 하여 이 동래부사를 제수한 것이었다. 이때 송상현은 이 경보를 듣고 곧 좌병사 이각, 울산군수 이언성李彦誠, 양산梁山 군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통지하여 구원을 청하였다. 양산군수 조영규는 군사 2000을 거느리고 14일에 동래성에 들어오고 좌병사 이각은 조방장 홍윤관洪允寬 울산군수 이언성 합 7000 병마를 거느리고 역시 14일에 도착하여 주객 합 2만여의 병마가 되었다. 부산첨사 정발이 전사하였단 보도가 들어오고 좌수사 박홍이 성을 버리고 도주한 보도도 들어왔다.

좌병사 이각은 이 경보를 듣더니 부사 송상현을 보고 “여보, 동래영감! 나는 일도의 대장인즉 성 밖에서 유진하고 도내제장을 지휘할 것이니 영감은 성을 지키시오” 하고 군사를 돌려 소산역蘇山驛으로 나갔다.
송상현은 “같이 성을 지켜 나라를 위해 함께 죽읍시다” 하였으나 이각은 듣지 아니하고 성을 나와 버렸다. 이각은 내심에 헤아리되 정발 같은 맹장이 3000 정병을 가지고도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잔뜩 겁이 나서 동래성을 빠져나온 것이었다. 이각은 “나는 어쩐 일로 태평시대에 병수사나 대장노릇을 못하고 이러한 난세를 당하였나” 하고 자탄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좌병사가 달아난 뒤에 송상현이 주장이 되어 울산군수 이언성을 좌위장을 삼아 동문을, 양산군수 조영규를 우위장을 삼아 서문을, 조방장 홍윤관을 중위장을 삼아 북문을 각기 지키게 하고 자기는 지휘관의 병권을 잡고 남문을 지키기로 약속을 정하였다.

4월 14일 유시 경이 되매 일본군이 물밀 듯 남문 밖 연병장으로 개미떼 모양으로 이르러 진을 치고 목패를 성중에 던졌다. 그 목패에는 “명을 토벌하고자 하니 귀국은 길을 빌려주기 원한다”고 하였다. 송상현은 부하를 시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큰 목패에 써서 성위에 세우고 곧 포를 쏘아 도전하여 해가 지도록 맹렬히 접전하여 피차에 사상자가 많았다. 송부사는 충의기개의 열사의 풍이 있다 하나 결코 용병하는 장수감으로 허락할 수 없는 학자선생이었다.

15일 아침에 일본군은 크나큰 우상 즉 신장神將같은 인형을 만들어 동문 밖 광장에다 세우니 그 높이가 백척이라 성안 군사들이 그것을 보고 천신인가 하여 겁을 냈다. 일본군은 조총을 난사하며 운제11)를 성 동북쪽에 걸어 놓고 개미떼와 같이 넘어오며 칼을 휘두르고 총을 콩 볶듯 놓고 고함을 치고 노도와 같이 달려들었다. 울산군수 이언성은 적군에게 붙들렸다. 이언성은 그만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 일본군은 이언성을 앞세우고 성내의 길을 인도하라 하였다.

조방장 홍윤관은 북문을 지키다가 적군이 벌써 동문을 깨치고 성내로 들어와 남문의 진을 향하는 것을 보고 군사를 돌려 막았다. 홍윤관은 그 부하를 지휘하여 맹렬히 싸워서 적에게 많은 사상을 주었으나 결국 탄환을 맞고 홍윤관은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홍윤관의 군사가 전멸을 당한 뒤에 일본군은 그 시체를 밟고 넘어 객사 앞으로 나왔다. 일본군은 36장군의 대세력이 모두 모였다. 양산군수 조영규는 자기 부하 2000을 몰고 객사 앞에서 시가전을 시작하여 한바탕 맹렬한 단병접전12)을 하였다. 적의 총알에 조군수는 비장한 전사를 하고 부하들도 거의 전멸이 되다시피 전사하였다. 남문의 본진만 남아서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았다. 송부사는 비장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등과 끝까지 싸웠으나 마침내 성은 결국 함락이 되었다.

천곡 송상현은 죽더라도 나라의 신하 되는 절개와 예의를 잃지 않으리라 하여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껴입고 북향 사배한 뒤에 호상13)에 걸앉아 최후까지 전투를 독려하였다. 이윽고 일본군이 돌입하여 송상현에게 칼로 치려 하였으나 송상현은 태연부동하였다. 적장 중에 평조신과 중 현소가 달려드는 군사를 물리치고 송상현더러 피신하기를 권고하였다. 이는 작년에 사신으로 왔을 때에 송상현의 예의 밝은 후대를 받고 그 인격을 앙모하였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송상현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들었던 부채에 글 몇 구절을 써서 그 부친 송흥복宋興復에게 부쳤다.

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외로운 성은 달무리에 갇힌 듯 적군에 포위되었는데 다른 진에서는 베개를 높이 하여 잠만 자고 있습니다. 군신의 의리가 무거우니 부자의 은정은 가벼이 해야겠습니다.”

이는 그 부친에게 보내는 결별사였다. 송상현은 병부14)와 인신15)을 손에 쥐고 일본 장수의 칼을 빌려 동래성 남문루에서 순절하였다. 송상현이 죽은 뒤를 이어 비장 송봉수 김희수와 양리良吏 송백宋伯과 그 집 하인 신여노申汝櫓 등도 다 항복하지 아니하고 주장의 곁에서 같이 전사하였다. 일본 장수 종의지 평조신 등이 송상현의 시체를 거두어 동문밖에 매장하고 송상현의 소실 김섬金蟾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잡혀갔다.

동래성에서 순절한 충의 제공은 천곡 송상현, 조방장 홍윤관, 양산군수 조영규, 비장 송봉수, 김희수, 양리 송백, 하인 신여노의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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