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후보 재벌개혁공약 성공하려면…

▲ 경제민주화가 대선의 화두로 떠오를 만큼 한국경제가 심각한 양극화에 몰렸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까지 주장해온 낙수효곽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사진=뉴시스)
재벌개혁은 공약만으로 이룰 수 없다. 유력 대권주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나쁜 재벌을 벌주겠다’며 으름장을 놓지만 막상 집권하면 상황이 달라질 게 분명하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재벌에 화해의 손짓을 내밀 수밖에 없어서다. 공약은 국민을 현혹하는 사탕발림일 뿐이다. 정작 필요한 건 따로 있다. 공정위 바로 세우기다.

18대 대선의 화두는 경제민주화다. 대선후보들은 갖가지 재벌개혁 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을 두고 벌써부터 논란이 인다. “지난 정부에서 실패한 정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는 재탕론에서부터 “한국경제를 움직이는 재벌의 반발을 감수할 수 있겠느냐”는 주장까지 다양하다. 이런 주장이 나오는 이유가 뭘까. 

먼저 대선주자들의 재벌개혁 정책부터 살펴보자. 대선후보들의 재벌개혁 공약을 크게 분류해보면 출자총액제한제도•순환출자•금산분리•지주회사 요건•계열분리명령제•기업인 범죄 처벌로 나눌 수 있다. 금산분리에 있어서는 세 후보 모두가 산업자본의 은행지분 소유한도를 현행 9%에서 4%대로 낮추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받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재벌개혁 정책은 각 분야를 모두 아우른다. 출자총액제를 부활시키는 동시에 10대 재벌의 출자한도를 순자산 30%로 제한하고 각종 예외규정을 폐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순환출자 개혁방안도 눈길을 끈다. 신규와 기존의 순환출자를 모두 없애되 기존 출자에 대해서는 3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의결권을 제한하고 있다.

비은행지주회사의 비금융 자회사 소유를 금지하고, 사모펀드(PEF)가 은행지분을 소유하는 예외 규정을 폐지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모든 금융업종에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도입할 것과 지주회사의 요건을 강화하는 것도 포함돼 있다. 지주회사의 부채비율은 현행 200%에서 100% 이내로 제한하고, 비상장사와 상장사의 자회사 보유비율을 각각 50%(현행 40%)와 30%(20%)로 상향 조정하는 방안이다.

안철수 무소속 후보의 재벌개혁 정책은 계열분리제가 관건이다. 중요한 금융회사에 대해서는 계열분리명령제를 바로 도입하고 일반 계열사는 재벌개혁 성과에 따라 2단계로 도입 여부를 검토한다는 계획이다. 순환출자에 대해서는 신규 순환출자만 금지하고 기존 순환출자는 자율 해소를 유도해 결과에 따라 단계적으로 추진한다는 입장이다. 금산분리 정책과 비은행지주회사의 비금융 자회사 소유 금지는 문재인 후보와 같다. 하지만 재벌 계열 금융회사가 다른 계열사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할 때 투자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재벌 계열 금융회사의 의결권 행사 기준을 마련한다는 부분이 조금 다르다. 지주회사 요건 강화는 문 후보와 같고, 계열사의 지주회사 출자를 제한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재벌개혁 가능성 벌써부터 논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통해 가장 먼저 ‘경제민주화’라는 이슈를 선점한 만큼 강력한 재벌개혁 정책이 나올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11월 16일 박 후보가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경제민주화 정책에는 재벌개혁이 없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대규모기업집단법 제정’이 빠졌다. 대규모기업집단법에는 김 위원장이 주장했던 ‘기존 순환출자 의결권 제한’이나 ‘지분조정명령’ 등이 포함돼 있었다. ‘주요 경제사범 국민참여재판’과 ‘총수연봉공개’ 등도 모두 제외됐다. 대신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 등을 도입해 공정거래 관련법 집행 체계를 개선함으로써 재벌을 규제한다는 방침이다. 일감몰아주기 등 총수일가의 부당내부거래 규정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신규 순환출자 금지와 산업자본의 은행지분 소유한도를 제한하는 정책은 유지하기로 했다.

 
각자 정책이 조금씩 다르지만 세 후보 모두 기업인 범죄에 대해서는 강하게 처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기업 총수의 사면 제한이나 집행유예 방지 등이 그렇다.

이처럼 각 후보들마다 정책에는 차이가 있지만 재벌개혁에 대한 필요성은 상당 부분 공감하는 분위기다. 분명 종전 대선과는 다른 분위기다. 그런데도 ‘못 지킬 약속이다’ 혹은 ‘실효성이 없다’는 등의 얘기가 나온다.

사실 출총제는 1997년 폐지됐다가 1999년에 부활하고, 2009년에 다시 폐지된 법안이다. 안철수 후보가 실효성을 의심하는 이유 중 하나다. 계열분리명령제는 위헌 시비까지 일고 있다. 금산분리 정책은 해당 규정에 해당되지 않는 기업이 많아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순환출자 연결고리를 끊는 데는 최소 8조원에서 14조원의 돈이 들어갈 것이란 추측이 나오는 상황이다.

연강흠 연세대(경영학) 교수는 “이런 정책들이 실제 실행될지는 앞으로의 경제상황에 달려 있겠지만, 경제가 어렵다면 이런 강력한 정책을 추진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소기업연구원에서조차 재벌개혁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중소기업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이렇게 말했다.

“재벌개혁 정책은 언제나 나왔다. 강력한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재벌규제 정책이 나오면 뭐하나. 좀 있으면 원상태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을 뿐이다.”

재벌개혁의 내용이 부실해서가 아니다. 규제 강화와 완화가 반복되면서 신뢰를 잃었다는 얘기다. 실제로 재벌개혁을 내세웠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도 같은 패착을 저질렀다.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올 2월 발표한 자료집을 통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은 신자유주의 국정기조와 의지의 부재, 재계와 새누리당의 집요한 재벌개혁 반대 등으로 인해 실패했다”면서 당시 두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했다.

낙수효과 때문에 규제 강화•완화 반복

김대중 정부는 재벌개혁으로는 ‘대기업 구조조정 5대 원칙’과 ‘3대 보완과제’를 내놨다. 1998년 12월 8일 정부는 재벌 총수들과 기업투명성 제고, 상호채무보증 해소, 재무구조 획기적 개선, 핵심부문 설정과 중소기업 협력 강화,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라는 5대 원칙에 합의했다. 또 1999년 8월 15일 제2금융권 경영지배구조 개선, 순환출자 억제, 부당내부거래 근절과 변칙 상속증여 방지를 기본으로 한 3대 보완과제를 발표했다.

 
그러나 2001년 5월 말 경쟁력 강화와 투자 촉진이라는 명목으로 금융계열사 의결권 행사 허용, 지주사의 자회사 출자총액 제한을 없애는 출총제 예외 확대 등 기업규제 완화 정책을 발표하면서 재벌개혁에 손을 땠다.

노무현 정부는 ‘재벌개혁 등 공정한 경쟁질서 확립’을 내세웠다. 2002년 후보 당시에는 재벌 정경유착 근절, 상호출자와 채무보증 금지와 출총제 유지, 금융회사 계열분리청구제, 증권분야 집단소송제 도입 등을 내걸었다.

하지만 2003년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 2004년 ‘산업자본의 금융지배에 따른 부작용방지 로드맵’을 발표했지만 ‘금융회사 계열분리청구제’는 로드맵에서 제외됐다. 이후 각종 재벌개혁과 배치되는 법안이 발의되고, 촐총제나 금산법 등 세부 규정이 완화됐다.

노회찬 대표는 “2007년 2월 재계가 반대한 정부와 여당의 재벌개혁 입법안은 8개 법안뿐이었고, 원안대로 통과된 것은 금융계열사의 의결권을 축소시키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1개 법안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지주회사 부채비율 규제 완화, 내부거래 이사회 의결과 공시규정 완화, 공시의무 위반에 대한 과징금 완화 등 재계가 법 개정을 요구한 재벌개혁 후퇴법안이 발의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후 2001년 말까지 대기업 집단지정제도 완화, 금융계열사 계열기업에 대한 주식보유 한도 완화, 증권집단소송제도 도입 지연 등으로 인해 재벌개혁 정책들은 후퇴했다”고 밝혔다.

 
30대 그룹에 경제력 집중된 구조가 문제

이처럼 정부가 재벌 규제와 완화를 반복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이유가 뭘까. 김상조 한성대(무역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민주화가 밥 먹여 주냐’라는 공격이 들어오면 아무리 개혁적인 정부라도 버티지 못한다. 정책이 일관적일 수 없다. 일단 국민이 못 참는다. 국민 인식에는 재벌이 성장해야 낙수효과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깔려 있다. 30대 그룹이 한국 경제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틀린 말이 아니다.”

경제가 어려울 때 재벌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재벌이 한국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재벌의 경제력은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을 뛰어넘은 상황이다. 30대 그룹의 2011년 총 매출액은 1345조원이었다. 2011년 명목 GDP인 1237조원보다 108조원 많다. 30대 그룹의 GDP 대비 매출액 비중은 2003년 65.3%를 기록한 후 꾸준히 상승했다.

그룹별로는 삼성그룹 매출액이 273조원으로 가장 많고, 현대차그룹(156조원), SK그룹(155조원), LG그룹(111조원), 포스코(80조원) 순이다. 이들 5개 기업집단의 매출액 합계는 776조원으로 GDP의 62.7%에 해당한다.

수출에도 큰 몫을 담당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국내 30대 그룹이 차지하는 국내 전체 수출 비중은 84.2%(2010년 기준)다. 재벌이 살아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하지만 문제는 ‘낙수효과(trickle down)’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김상조 교수는 “1990년대까지 낙수효과가 작동해왔던 게 사실이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며 “납품 단가를 후려치고 금액을 제 때 지불하지 않고, 불법 하도급을 자행하는 상황에서 낙수효과를 기대하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낙수효과가 일어날 수 있도록 대중소기업 간 연결고리를 만들어 줘야 한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재벌의 반발을 법 개정으로만 잠재울 수는 없다. 10~20년의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또 다시 경제가 어렵다고 재벌에 유리한 정책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국민이 인식을 바꿔 정부의 재벌개혁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재벌개혁을 이뤄내겠다는 대통령의 끈질긴 의지도 중요하고, 그럴듯한 정책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법적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게 먼저라는 얘기다. 학자들마다 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선순위가 있지만 재벌의 불법행위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감시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공통된 의견을 내놓고 있다.

▲ 재벌 지배구조의 문제점들은 이미 나와 있다. 구조개선이 이뤄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사진=뉴시스)
공정위와 국민의 감시 역할이 중요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의 경우에는 하도급 관련법을 지키지 않으면 기업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정도의 처벌이 뒤따르지만 한국에서는 공정거래법•하도급법•대규모유통법 모두 솜방망이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며 “징벌적 손해배상을 한다고 하는데 그러려면 대기업의 보복행위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보호하는 장치와 더불어 부당행위를 지시한 임원은 벌금과 함께 형사책임까지 묻도록 하는 강력한 법 집행 절차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창양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도 “공정위가 바로 서야 한다”면서 “협상에서 제값 받고 물건을 파는 구조, 품질 외에는 고려되지 않는 구조를 만드는 게 우선”이라며 “그러기 위해선 공정거래 위반행위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상조 교수는 “출총제 부활, 기존 순환출자 금지, 계열분리명령제 도입 여부 등의 구조 교정 수단은 마지막 수단이며, 이런 강력한 조치들만 있다고 해서 재벌개혁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며 “불법행위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행위 규율이 우선이다”고 강조했다.

김정덕 기자 juckys@thescoop.co.kr|@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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