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희의 Let's make money

▲ 주식시장에서 특정 업종의 폭등ㆍ폭락 역사는 반복된다. 1970년대 초반 주식시장에 불었던 건설업 열풍이 1970년대 후반 들어 사라진 것이 그 사례다.

주식시장은 동일한 패턴으로 움직인다. 주식시장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미 일어났던 일들이 반복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투자를 하기에 앞서 주식시장의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다. 대박과 쪽박 사이에서 고민하는 투자자에게 역사는 명쾌한 해답을 줄 수도 있다.

세계 최초로 증권거래소가 설립된 것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다. 국내 주식시장은 19세기 말 일본이 인천항을 쌀 수출 기지로 만들기 위해 미두장을 만든 것이 효시다. 투자 얘기에 뜬금없이 주식역사를 거론하느냐고 하겠지만 주식시장에서 돈 잃고 기분 좋은 사람 없고 주식 하는 사람치고 사연 없는 투자자가 없듯 주식시장도 역사와 사연을 갖고 있다.

사실 주식시장의 역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 주식시장을 투기가 아닌 투자의 공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역사는 반복을 거듭하면서 흘러간다. 주식시장도 마찬가지다. 이미 일어났던 여러 일들은 큰 흐름 속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에 따라 주식시장의 과거를 알면 전체적인 시장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처음 주식시장에 뛰어든 주식 초보자들이 제일 먼저 참고하는 게 있다. ‘차트만 알면 주식시장에 돌고 도는 돈은 모두 내 돈’이라고 써있는 주식 이론서다. “캔들과 눌림목은 불륜관계인가요” “수급과 파동은 짝사랑을 하나요” “거래량은 주식시장의 돈줄 아닌가요” “이평선은 왜 사람 마음을 시시각각 변하게 만드나요” 등의 질문을 던지며 이론서에 적힌 이론을 밤을 새워 외우기 시작한다.

그런 방식으로 지적 호기심만을 충족하면 주식시장에서 돈을 버는 기법을 완전히 터득했다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정작 이론서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기본서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이론은 비법이 될 수 없다.

이론서만을 파고들면 시장흐름을 보는 안목이 오히려 부족하게 된다. ‘객장에 애기 울음소리 날 때가 꼭지’라는 주식 격언대로 고점에 매달려 오도 가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를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의 전설적인 기술 분석가 그랜빌은 자신이 만든 주가와 이동 평균선 움직임의 관계로 유명세를 탔다. 그의 기법이 알려지기 전까지 주식시장은 그의 예측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그랜빌이 유명해진 후 주식시장은 그의 기법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랜빌은 그동안 벌어들인 돈뿐만 아니라 자산까지 모두 잃고 불행한 최후를 맞이했다.

엘리어트가 창시한 엘리어트 파동이론 역시 비슷한 상황을 맞았다. ‘주가는 상승 5파와 하락 3파에 의해 끝없이 순환된다’는 엘리어트 파동이론은 현재 주식시장에 적용하기 힘들다. 이 이론을 만든 사람 역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이처럼 주식시장은 어느 누구 한 사람의 이론을 통해 돈을 주워 담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유사한 상황은 발생할 수 있지만 똑같은 상황은 되풀이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론을 고집하기보다는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투자지표를 만들고, 또 믿어야 한다. 그보다 더 정확한 지침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론서의 맹신은 금물

1962년 1월 종합지수 40포인트에서 출발한 국내 주식시장의 주가는 지난해 4월 사상 최고점인 2231포인트를 찍었다. 서산대사는 눈을 감기 전 “근심걱정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주식시장도 마찬가지다. 개인투자자의 보이지 않는 근심과 고통이 없었다면 우리 주식시장이 이만큼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 1998년 4월 개인의 데이트레이딩이 시작된 것을 계기로 개인들도 손쉽게 주식투자를 접할 수 있게 됐다.
국내 주식시장은 40포인트로 시작한 지 5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287포인트까지 치솟았다. 주식시장 버블의 전주곡이었다. 비정상적 성장 뒤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꿈틀댔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공화당 창당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증권업자와 짜고 조직적으로 주식시장을 부풀린 것이다.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장은 충격에 휩싸였다. 대형 증권사들의 대규모 결제 불이행사태가 초래됐고, 돈을 잃은 개미들의 곡소리가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그 파장이 얼마나 컸으면 주식시장이 1년 동안이나 휴장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국민성은 ‘몰빵’을 좋아한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쪽박’ 아니면 ‘대박’을 원하는 DNA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월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인투자자로 손꼽히는 제시 리버모어는 “주식시장처럼 역사가 자주 되풀이되는 곳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주식시장의 폭락 ·폭등 현상은 되풀이됐다.

1970년대 초 오일쇼크로 주식시장이 출렁였다. 그러나 중동특수를 입은 건설사들은 오일머니를 등에 업고 죽어가던 주식시장을 다시 살렸다. 주식시장의 메이저 투자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건설사들의 이익을 마구 부풀린 것이다.

 
건설주들은 주식시장이 개장하자마자 상한가로 치닫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매도자가 없어 주식을 사기도 힘들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암거래가 이뤄지는 일까지 있었다. 상호에 ‘건설’이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건설화학의 주가가 급등했을 정도니 당시의 건설주 열풍이 어느 정도였겠는가.

건설업종들은 1975년 1월부터 1978년 6월까지 고점을 기록하며, 전체 거래대금의 46%를 차지했다. 건설업종 시가총액 비중은 전체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의 27%를 넘어섰다. 하지만 건설주에 대한 묻지마 투자는 주식시장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비극적 결말을 가져왔다.

1978년 하반기부터 건설주는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다.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누구도 건설업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건설주들은 그때의 주가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코스닥 시장에서도 주식시장의 반복되는 역사는 계속됐다. 1993년 출범 당시만 해도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코스닥시장은 1999년 3월부터 상황이 급변했다. 벤처 열풍이 불어 닥친 것이다. 1997년 12월 정부가 코스닥 시장 활성화를 위해 벤처기업 전용시장을 개설하고 1998년 4월 개인의 데이트레이딩을 시작한 것이 원인이었다.

직원 몇명 고용해 벤처라는 이름만 붙이면 성장성이 충분한 기업으로 포장됐다. 상호가 뜻도 없는 영어로 바뀌기만 해도 상한가 3~4번은 기본이었다. 데이트레이딩의 시작으로 주식투자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개인투자자들은 제대로 된 지식도 없이 벤처업체에 돈을 쏟아 부었다.

실적 없는 폭등의 결말은 …

새롬기술은 벤처열풍의 대표적인 사례다. 1999년 8월 2575원으로 시작한 새롬기술 주가는 12월 납회일까지 24만2000원까지 치솟았다. 이후 두 달간 상승3파가 이어지면서 주가는 30만8000원으로 8000% 폭등했다. 시가총액은 9조원을 넘어섰다. 그 당시 현대차 ·기아차 ·현대중공업의 시가총액을 합해도 9조원에 못 미쳤으니 새롬기술에 얼마나 많은 버블이 끼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열풍의 후유증은 폭등 뒤 아픔 그대로였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현재 새롬기술의 사명은 솔본으로 바뀌었다. 30만원을 넘던 주가는 2000원 중반에서 맴돌고 있다. 새롬기술의 경이적인 폭등기록은 코스닥시장이 출범한 지 19년이 흐른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새롬기술의 폭등기록은 얼마든지 깨질 수 있다. 폭락 뒤 폭등이라는 주식시장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어서다. 유의할 점은 혹시 폭등하더라도 그 뒤에 올 수 있는 폭락 가능성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