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관람객 1억명 돌파 의미

2006년 겨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는 연일 시민이 모여들었다. 스크린쿼터 축소를 반대하며 ‘1인 시위’에 나선 유명배우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로부터 7년여 시간이 흘렀다. 한국영화계는 어떻게 변했을까. 시위에 나선 배우들의 주장처럼 자멸했을까, 아니면 또 다른 도약기를 맞고 있을까.

▲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안이 발표되자 영화배우들은 1인 시위에 나서며 정부를 압박했다. 사진은 피켓시위 중인 배우 방은진.

2005년 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앞두고 미국은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자국영화 보호장치인 스크린쿼터 제도를 폐지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은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크게 앞지르고 있었다. 세계적으로도 드문 현상이었다.

한미 FTA 체결이 절실했던 정부는 2006년 1월, 미국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였다.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를 기존 146일(상영비율 40%)에서 73일(20%)로 대폭 줄인 ‘스크린쿼터 축소안’을 발표한 것이다. 영화계는 즉각 반발했다. 제작 관계자들은 언론과 시민단체에 호소문을 올리며 도움을 요청했다. 안성기•장동건•전도연 등 대표 배우들은 피켓을 들고 1인 시위에 나섰다.

스크린쿼터 축소 후 오히려 관람객 늘어

영화계에서 스크린쿼터 축소의 위험을 알리기 위해 예를 든 나라는 멕시코였다.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체결한 멕시코는 매년 5%씩 스크린쿼터 비율을 축소했다. 그 결과 연간 100여편에 이르던 영화 제작 편수가 10편 이하로 줄어들었다. 2000년대 들어 자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은 4%대로 내려앉았다. 이처럼 스크린쿼터 축소는 ‘한국영화의 씨를 말릴 것’이라는 게 영화 관계자들의 주장이었다.


이후 7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한국영화계는 어떻게 변했을까. 영화진흥위원회는 올 11월 21일 역사적인 발표를 했다. 올해 한국영화의 관람객이 11월 20일 1억명을 돌파했다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연간 최다 기록은 2006년에 세운 9800만명이었다. 올 11월 현재 한국영화의 시장 점유율은 59%로 추정된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시장 점유율(34%)의 두배에 가깝다. 게다가 12월 관람객은 아직 카운트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1억 관객을 넘겼다. 연말 결산이 끝나면 어떤 스코어가 나올지 영화인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김수현 영화진흥위원회 영화정책센터 연구원은 “12월에는 ‘호빗’ 등 외국 대작들이 개봉하는 반면 한국영화의 상영편수는 상대적으로 적어 점유율이 조금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한국영화의 올해 전체 점유율은 보수적으로 잡아도 57~58%는 넘길 전망”이라고 말했다.

관객 1억명 돌파는 ‘범죄와의 전쟁’등 400만명 이상을 끌어 모은 작품이 상반기에 이어지면서 일치감치 예고됐다. 후반기에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의외의 흥행을 기록하며 활력을 이었고, ‘도둑들’과 ‘광해’가 연거푸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현실이 됐다.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도둑들’은 극장 매출 누적액과 부가판권 등을 더하면 1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광해’는 장동건 주연의 ‘마이웨이’, 정지훈 주연의 ‘리턴투베이스’의 흥행실패로 곤란을 겪던 CJ E&M의 체면을 완전히 되살렸다. CJ E&M는 광해의 기획•배급•공동제작을 맡았다.

김시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2013년 CJ E&M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각각 10.6%, 82.1%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며 “향후 3년간 이 회사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연평균 9.2%, 7.6% 개선될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스크린쿼터 제도를 축소하면 한국영화가 죽는다’는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결과다. 실제로 스크린쿼

 

터 축소 이후 한국영화는 2005년 85편에서 지난해 151편으로 크게 늘었다. 영진위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2006년 60%를 넘나들던 한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은 스크린쿼터 축소 후 2008년 42.1%로 잠시 떨어졌지만 지난해 52%로 다시 높아졌다. 현재는 스크린쿼터 축소 이전수준인 60%대를 바라보고 있다.

예술영화 위해 스크린쿼터 필요

2006년 당시 ‘스크린쿼터 수호’를 주장했던 영화계 인사들이 민망할 만큼 한국영화는 잘 나가고 있다. 어떻게 이런 약진이 가능했을까. 전문가들은 ‘개방을 통한 경쟁력 강화와 아이템의 증가’에서 답을 찾는다. 문호확대로 늘어난 외국 영화는 한국 영화인의 반성과 각성을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국내 영화산업의 체질이 개선되고 수요도 늘어났다.

원로영화인 신영균씨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크린쿼터가 축소되면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던 게 한국영화의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평했다.

한국영화의 이런 성공은 보호무역 장벽을 걷어내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다. 요즘 소비자들은 자국•타국영화를 가리지 않는다.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작품이면 기꺼이 영화관을 찾는다. 최근 한국영화는 내용면에서도 크게 도약했다. 상투적인 사랑이야기나 할리우드 영화를 모방하던 수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플롯을 찾기 시작했다. ‘화려한 휴가’ ‘추격자’ ‘최종병기 활’ ‘국가대표’ ‘써니’ 등이 그 예다.

작품성 또한 높아졌다. 스크린쿼터 축소 이후에도 ‘밀양’의 전도연이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김기덕 감독은 ‘피에타’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쥐었다.
영화 인력의 해외진출도 활발해지고 있다. 광해의 이병헌은 ‘지.아이.조2’ ‘레드2’ 등에 출연해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았다. 배두나는 워쇼스키 남매의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발탁되며 할리우드에 진출했다. 박찬욱•김지운•봉준호 등 한국 대표감독들은 할리우드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다.

그렇다고 스크린쿼터가 아예 쓸모없는 제도로 전락한 것은 아니다. 스크린쿼터가 현재보다 더 축소되거나 아예 폐지되면 극장 측은 상업성이 약한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를 상영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문화산업의 다양성이 위축되고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 한국영화계가 풀어야 할 과제는 아직 많다.

 

Issue in Issue

잘나가는 한국영화, 과제는…

유명 배우는 돈방석
스태프는 월 73만원

스크린쿼터라는 단어가 기억에서 사라질 만큼 한국영화의 경쟁력은 강해졌다. 그러나 영화 산업계 전반에 깔려있는 구조적 문제는 여전하다. 열악한 현장 스태프 처우문제와 대형배급사에 집중된 스크린 독과점 등이 그것이다.

국내에선 CJ E&M•롯데엔터테인먼트•쇼박스•NEW 등 4대 배급사가 영화공급을 독점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이들 4개 배급사에서 올 상반기 공급한 영화의 점유율은 61%에 이른다. 그중 한국영화 공급률만 따지면 90%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CGV•롯데시네마 등 대기업의 극장소유가 늘어나면서 독과점은 더욱 심해졌다. 김기덕 감독은 이런 시스템에 불만을 표하며 자신의 역작 ‘피에타’를 조기종영하기도 했다.

 
스크린 독과점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작품성 있는 저예산 영화들의 상영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워너브러더스•20세기 폭스 등 대형영화사들은 극장을 소유하지 못한다. 대형업체가 자본의 힘으로 스크린을 독과점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스태프의 처우개선도 시급하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영화 스태프들의 월평균 임금은 73만8000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인데, 이마저도 체불되기 일쑤다.

2006년 스크린쿼터 축소 당시 시위에 나선 유명배우들에게 시민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배우들은 당시 과도한 출연료로 인한 스태프와의 불평등 문제에 대해선 ‘자유시장 경제논리’를 들어 반박했다. 반면 스크린쿼터에 대해선 ‘문화의 논리’를 드는 이중성을 보였다.
유두진 기자 ydj123@thescoop.co.kr|@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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