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총 속 소액주주의 목소리
기업 감시하는 파수꾼 역할
과잉 간섭 지양해야 한다는 의견도

조용히 지나가던 주주총회의 풍경이 최근 들어 달라졌다. 소액주주들은 기업에 의견을 피력하는 데 거침이 없고, 기업에선 주주들을 달래기 위해 진땀을 뺀다. 주주가 적극적으로 기업에 개입하는 이른바 ‘주주행동주의’가 주총 곳곳에서 관찰되고 있다. 이전과 비교해 무엇이 달라졌길래 ‘작은 목소리’가 힘을 낼 수 있게 된 걸까.

최근 기업 주주총회에서 소액주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사진=뉴시스]
최근 기업 주주총회에서 소액주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사진=뉴시스]

지난 2월, 삼성전자 스마트폰 이용자들을 분노하게 한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갤럭시S22 GOS(Game Optimizing Service) 논란’이었다. 2월 14일 론칭한 신제품 갤럭시S22의 성능이 특정 조건에서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다.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삼성전자가 기기 성능을 제한하는 앱 GOS를 갤럭시S22에 심은 게 문제를 일으킨 주범이었다. GOS는 고사양 게임이나 앱을 실행시킬 때 기기 온도가 상승하는 걸 막기 위해 자동으로 실행되는데, 삼성전자는 이용자들이 이 앱을 끌 수 없도록 해놨다. 역으로 풀어보면, 갤럭시S22의 발열 문제를 ‘이용자의 행동’을 차단해 막으려 했던 거다.

삼성전자 측에선 “GOS는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소비자들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다. GOS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은 데다 갤럭시S22의 발열 문제를 소비자에게 은근슬쩍 떠넘겼다는 이유에서였다.

삼성전자는 부랴부랴 GOS 기능을 소비자가 끌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지만,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가장 먼저 주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2월 14일 7만3700원이었던 삼성전자 주가는 3월 8일 6만9500원으로 5.6% 떨어졌다. 신제품 출시 직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좋지 않은 시그널임에 틀림없었다.

이 때문인지 3월 16일 열린 삼성전자 주주총회엔 역대 최대 규모인 1600명의 주주가 참여했는데, ‘뜻밖의 모습’이 연출됐다. 한 주주가 “GOS에 관해 삼성전자는 고객들을 합리적으로 납득시키지 못했다”고 지적하자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이 “고객 여러분의 마음을 처음부터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점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대기업 CEO가 소액주주의 지적에 사과의 뜻을 밝힌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주목할 점은 이게 삼성만의 일이 아니란 거다. 이번 3월 주총에선 소액주주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거나 의견을 개진한 예가 숱했다. 3월 30일 열린 엔씨소프트의 주총에서 주주들은 야구단 NC다이노스 운영 문제를 도마에 올렸다. 야구단의 인기가 시들해진 지금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NC다이노스가 효과적인 마케팅 수단이냐는 거였다.

KT 주총(3월 31일)에선 재선임 투표를 앞둔 박종욱 KT 각자대표가 돌연 자진사퇴하는 일이 벌어졌다. KT 측은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지만, 업계에선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주총 전날 재선임 반대 의사를 밝힌 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익명을 원한 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국회의원 쪼개기 후원’ 혐의로 재판을 받는 박 대표가 기업가치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게 국민연금이 제시한 반대 이유였다. 여기엔 박 대표의 재선임을 반대한 소액주주들의 목소리가 반영됐을 가능성이 높다.”

주총 휩쓴 소액주주 반란

소액주주가 대주주를 이기는 놀라운 상황이 벌어진 경우도 있다. 3월 31일 SM엔터테인먼트(이하 SM엔터) 정기주총에선 처음으로 최고재무책임자(CFO)가 투표를 통해 선임됐다. “CFO를 선임해 최대주주인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의 의존도를 낮추고 떨어진 주주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자산운용사 얼라인파트너스의 주장에 소액주주들이 힘을 실어준 게 변수로 작용했다.

이처럼 소액주주들이 주총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안수현 한국외국어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 몇년간 주주 권리를 강화하는 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다”면서 “이 법안들이 ‘주주행동주의’를 강화하면서 펀드와 소액주주들이 적극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고 분석했다.

주주행동주의를 단단하게 만든 대표적 시스템은 2020년 상법 개정안 때 도입된 ‘다중대표소송’ 제도다. 골자는 상장기업 지분의 0.01%(비상장인 경우 1%) 이상 소유한 주주는 해당 기업이 지분 50% 이상 보유한 자회사에 경영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해 도입된 ‘감사위원 분리선출제’ 역시 주주행동주의에 힘을 실어줬다. 기존엔 기업이 선임한 이사 중에서 감사위원(이사의 업무집행과 회계를 감시하는 역할)을 선출했기 때문에 감사위원 선임 과정에 기업의 입김이 들어가는 일이 숱했다.

하지만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는 다르다. 1명 이상의 감사위원을 이사 외 인물로 선임하도록 규정하고 있어서다. 적어도 감사위원 1명은 주주들의 의사를 반영해 뽑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은 주주총회에서 한 주주의 GOS 관련 지적에 고개를 숙였다.[사진=뉴시스]
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은 주주총회에서 한 주주의 GOS 관련 지적에 고개를 숙였다.[사진=뉴시스]

주주행동주의가 강해진 배경은 이뿐만이 아니다. 인터넷, SNS 등 IT 플랫폼이 진화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이은희 인하대(소비자학) 교수는 “과거엔 기업 정보를 갖고 있는 소수의 리더 중심으로 소비자 운동이 일어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면서 “소비자들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기업 이슈를 빠르게 접하고 의견을 공유하면서 ‘개인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미현 참여연대 사회경제1팀장도 “최근 소액주주들이 의결권을 담은 위임장을 보내주는 등 시민연대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면서 “대부분의 소액주주가 자체 온라인 커뮤니티를 운영하면서 의견을 공유하고 있는데, 이런 과정이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지는 듯하다”고 설명했다.

주주행동주의 부작용 경계해야

앞서 언급했던 갤럭시폰 집단소송에 참여 중인 김명훈(가명·40)씨의 얘기도 귀담아들을 만하다. “기업의 잘못은 기업에서 끝나지 않는다. 기업 제품을 자랑스럽게 쓰는 소비자들에게도 타격이 돌아온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기업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고 깨진 신뢰를 회복하려면 소비자들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물론 강화된 주주행동주의에 부작용이 없는 건 아니다. 재계는 소액주주들의 행동이 기업 경영에 걸림돌이 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김우진 서울대(경영학부) 교수는 “기본적으로 주주는 기업의 파트너이지 시어머니가 아니다”면서 “주주행동주의가 무조건 기업에 압박을 넣는 것으로만 해석돼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주주의 권한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지를 둘러싼 논쟁도 치열하다. 안수현 교수는 “주총은 법과 정관에 한해서만 결정권이 있고 회사를 경영하는 권한은 어디까지나 이사회에 있다”면서 “최근 들어 주주가 적극적으로 회사에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는 만큼 주주가 회사 경영에 관여할 수 있는 범위를 정책적으로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혁기 더스쿠프 기자
lhk@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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