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의 퇴임과 산은의 혼란
정책기관장과 정치적 성향
이동걸 전 회장이 남긴 과제

이동걸 KDB산업은행 전 회장의 중도 사임을 두고 시장의 의견이 엇갈린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당연히 내려와야 한다”는 주장과 “숱한 과제를 풀지 않은 채 발을 뺐다”는 비판이 함께 쏟아진다. 하지만 정책기관장은 승자의 전리품戰利品이 아니다. 정치 철학이 맞지 않는다고 기관장 자리에서 내려오면 그 기관은 더 큰 혼란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 전 회장이 사임한 후 산은의 사업 방향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산업은행이 추진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은 1년 넘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산업은행이 추진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은 1년 넘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산업은행은 은행인 동시에 정부 정책을 금융 측면에서 집행하는 정책기관이다. 정부와 정책 철학을 공유하는 사람이 회장직을 수행하는 게 순리다.” 이동걸 KDB산업은행 전 회장이 이런 말을 남긴 후 중도 사임했다. 2020년 산은 역사상 26년 만에 회장 연임에 성공했던 이 전 회장의 사임을 두고 시장의 반응은 엇갈린다. 

한쪽에선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중도 사임카드를 꺼낸 건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비판한다. 이 회장의 임기는 2023년 9월까지로 임기가 1년 5개월 이상 남았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친親정부 성향을 서슴지 않고 드러내온 이 회장의 사임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주장한다.

이 회장은 연임에 성공한 지 열흘 만인 2020년 9월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민주당의 20년 집권을 의미하는 “가자 20년”을 외쳐 물의를 일으켰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국책은행 회장이 대놓고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셈이었다. 

이런 ‘정치성’은 사의를 발표한 후 더 뚜렷하게 나타났다. 이 회장은 5월 2일 열린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정권 교체기마다 정책기관장 교체와 관련한 잡음이 발생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대통령 임기에 맞춰 중요 정책기관장은 5년이나 2년 6개월 임기로 변경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정권의 성향에 따라 국책기관인 산은의 수장이 바뀔 수 있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이 전 회장의 말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기관장을 교체하면 사업의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책기관장은 승자를 위한 전리품戰利品도 아니다.

실제로 이 전 회장의 퇴장 이후 차기 회장 자리를 둘러싼 하마평이 쏟아지면서 산은이 추진하던 사업도 안갯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누가 산은의 수장이 되느냐에 따라 사업 방향이 바뀔 수 있어서다.

그럼 이 전 회장 시절에 풀지 못했던 산은의 과제는 어떻게 전개될까.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합병, 쌍용차 매각을 중심으로 이 질문을 풀어보자. 

■과제❶ 대형 항공사 합병 건 = 아시아나항공 매각 건은 이 전 회장이 공들였던 사안 중 하나다. 2020년 HDC현대산업개발과 인수·합병(M&A) 협상을 진행하던 당시, 이 전 회장이 정몽규 HDC그룹 회장을 수차례 만나는 등 아시아나항공의 매각을 성사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2020년 9월 매각 실패). 그해 11월 발표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 추진도 이 전 회장의 작품이다. 

하지만 두 회사의 합병은 답보 상태에 빠졌다. 지난해 1월 대한항공은 필수 신고국가 9개국(한국·터키·대만·베트남·미국·유럽연합·일본·중국)에 기업결합 신고를 했지만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을 승인한 국가는 한국을 포함해 4개국(터키·대만·베트남)에 불과하다.

미국과 유럽연합(EU), 중국, 일본 중 한 국가라도 결합 승인을 불허하면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은 무산된다. 아시아나항공의 매각을 처음부터 다시 추진해야 할 수 있다는 거다.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의 중도 사임으로 기업들의 구조조정에도 변화가 생길 전망이다.[사진=뉴시스] 

문제는 아시아나항공의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9년 1795.1%였던 부채비율(별도 기준)은 지난해 2282.4%로 나빠졌다. 합병이 무산되면 아시아나항공 매각에 빨간불이 켜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2019~2020년 3조원이 넘는 자금을 아시아나항공에 수혈한 산은의 책임론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그 어느 때보다 산은 회장의 결단이 중요한 시기라는 얘기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의 합병도 해외 경쟁 당국의 승인 거절로 무산됐다”며 “업계 1·2위 기업 간 합병을 추진한 산은의 정책이 무리수였다는 평가가 나오고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합병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동걸 전 회장의 중도 사임이 통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며 “누가 차기 산은 회장이 되느냐에 따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 정책에 변화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중도 퇴임이 남긴 과제들


■과제❷ 쌍용차 매각 건 = 지난 3월 에디슨모터스의 인수가 무산된 후 새로운 주인을 찾고 있는 쌍용차도 마찬가지다. 이 전 회장 사임 이후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시장을 혼란스럽게 만들 만한 시그널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새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로 내정된 한덕수 후보자는 지난 4월 26일 인사청문회에서 “쌍용차를 포함한 국내 완성차 업계가 해외 경쟁력을 확보하고 친환경차 생태계를 조성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며 “쌍용차는 향후 회생절차 진행상황을 지켜보면서 필요한 경우 관계부처와 함께 대응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쌍용차의 지원 가능성을 열어둔 셈인데, 쌍용차의 회생 문제를 ‘시장’에 맡겼던 이 전 회장의 기조와 다른 얘기를 한 거다. 

조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정치권에서 어떤 입김을 넣든 산은이 쌍용차의 생존가능성과 경쟁력을 어떻게 판단하느냐가 관건”이라면서도 “현재로선 산은의 스탠스를 예측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이 전 회장 시절과 달라진 시그널은 쌍용차를 둘러싼 M&A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쌍용차 인수전이 훨씬 뜨거워진 이유를 새 정부의 지원 가능성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참고: 쌍용차와 매각주관사인 EY한영회계법인은 지난 13일 KG컨소시엄(KG그룹+파빌리온PE)을 우선인수예정자로 선정했다.]

이항구 호서대(기계공학) 교수는 “새 정부가 흘리고 있는 쌍용차 지원 가능성을 보고 인수전에 뛰어든 기업도 없지 않을 것”이라며 “일단 뛰어들고 봐도 손해는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쌍용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새 정부의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이 문제를 외면하기 어렵다는 걸 감안하면 새 정부와 산은이 쌍용차를 살리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뜨거워진 쌍용차 인수전

이 회장은 퇴임을 앞두고 개최한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공적을 치켜세웠다. 11건의 기업 구조조정에서 성공했고, 도산 직전이었던 산은의 정상화를 이끌었다는 거다. 구조조정의 성공 조건은 기업이 정상화에 성공했느냐다. 이 회장이 내세운 ‘셀프 공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다. 되레 정치적 이유로 산은 회장에서 내려온 ‘무책임함’이 시장에 악재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 전 회장 이후 산은의 과제는 어떻게 풀릴까. 지켜볼 일이다.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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