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기술 전수자’ 바버 김진근씨 인터뷰

목욕탕 한구석에서 머리를 잘랐다. ‘퇴폐’ ‘불법영업’이란 낙인이 찍혀 밖에서 이발사로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대代’를 이어 이발사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바닥에 짓눌렸다. 그럼에도 그는 꿈을 잃지 않았고, 이젠 희망을 전수하는 실력 있는 ‘바버(Barber)’로 우뚝 섰다. 남성 전용 이발소 ‘바버숍(Barber Shop)’이 인기를 끌고 있는 지금, 더스쿠프가 ‘100년 이발사’를 꿈꾸는 진근씨를 만났다.

이발사 김진근씨는 자신과 그의 아버지가 가진 ‘100년의 이발 노하우’를 후진 양성을 위해 내놓고 싶다고 말했다.[사진=천막사진관]
이발사 김진근씨는 자신과 그의 아버지가 가진 ‘100년의 이발 노하우’를 후진 양성을 위해 내놓고 싶다고 말했다.[사진=천막사진관]

“100년 이발사를 꿈꿉니다.” 1993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올해로 48세. 아무리 100세 시대라고 해도 100년 이발사는 허황된 꿈 같다. 하지만 ‘이발사’ 김진근씨가 이렇게 말하는 덴 나름의 이유가 있다. 60년을 이발사로 사신 아버지의 경력에 자신의 30년을 합치면 90년이고, 앞으로 10년 더 하면 ‘100년 이발사’가 된다는 거다. ‘부자父子 이발사’로 사는 게 ‘부자富者’가 되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진근씨,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 처음부터 아버지 뒤를 이을 생각이었나요? 
“아니요. 다른 친구들이랑 똑같았어요. 그저 대학에 가려 했죠. 특별하게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대학에 가야 취직한다?’ 뭐 그 정도였죠. 그래서 전공을 무시한 채 대학을 고르고 있는데, 아버지가 한마디 하시더라고요.”

✚ 무슨 말이었나요? 
“이름 있는 대학도 아니고, 전공도 그저 그런 거라면 차라리 아버지 밑에서 이발 기술을 배우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어요. 열심히 하면 밥은 먹고 사는 직업이라 하시더라고요.”

✚ 선뜻 내키던가요? 
“나쁜 선택 같진 않았어요. 순전히 아버지 덕이었죠.”

✚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네요. 
“사실 아버지가 이발사라는 걸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알았어요. 아버지는 꽤 오랫동안 중앙정보부 전속 이발사를 하셨는데, 그 일 자체가 기밀이었거든요. 그 일을 그만두신 후 이발소를 차리셨는데, 그제야 아버지 직업을 알게 됐죠.”

✚ 기분이 어땠나요? 
“일이 참 깨끗하더라고요. 지저분한 행색으로 들어온 손님들이 깔끔해져서 흥얼거리며 나가시는 모습이 흥미로웠어요. 게다가 아버지는 참 성실하셨어요. 이발소를 차릴 때 빌린 돈을 2~3년 만에 갚으실 정도였죠. ‘밥은 먹고 산다’는 게 거짓이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아버지 말씀대로 하겠다고 했어요.”

진근씨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서울 서대문구의 무궁화고등기술학교(1년제)에서 이용기술과 미용기술을 함께 배웠다. 집에선 아버지께 따로 기술을 배웠는데, 그게 특효약이었다. 아름다운 ‘아빠 찬스’였다. 

✚ 전문기술직은 어깨너머로 일을 배우는 경우가 많잖아요. 아버지께 배우면 더 쉬웠겠어요. 
“맞습니다. 사실 학교에선 초보적인 기술만 가르쳐서 자격증을 따더라도 현장에서 곧바로 일할 수 없어요. 현장에 가더라도 허드렛일을 하느라 기술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는 건 마찬가지죠. 하지만 전 아버지께 배울 수 있어 많은 이득을 봤어요. 아버지께서 직접 쓰신 책도 있었으니까 더할 나위 없었죠.” 

✚ 아버지께서 책을 쓰셨나요?
“아버지는 처음 가위를 잡으셨을 때부터 남자 커트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하셨어요. 그 과정에서 남자 커트는 25가지 기본틀 안에서 약간씩 변형하면 된다는 결론을 내리셨고, 이를 토대로 1990년대 후반쯤에 이용기술서를 쓰셨죠. 당시만 해도 책으로 엮은 이용기술서는 없었어요. 이런저런 이유로 많은 양이 보급되진 않았지만, 지금 봐도 훌륭한 책이에요.” 

✚ 이발사가 된 이후엔 어땠나요? 아버지 말씀대로 밥 굶는 일은 없었나요?
“그렇지 않아요. 1990년대 전국 이발소가 벼랑에 몰리면서 가시밭길이 펼쳐졌어요.” 

✚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돈에 눈이 먼 일부 이발소가 여성들을 이용해 퇴폐이발소를 운영하다 적발돼 사회적으로 큰 논란을 일으켰어요. 이발소 이미지가 완전히 추락했고, 어머니나 아내들은 아들과 남편을 이발소에 못 가게 했죠. 사인볼(이발소를 의미하는 삼색네온 기둥)이 사라진 것도 그때부터였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환위기까지 터져 이용업계는 붕괴되다시피 했죠.” 

왜 목욕탕에 이발소가 있었을까

‘퇴폐’란 낙인이 찍힌 이발사들은 갈 곳이 없었다. 때마침 깔끔한 이미지의 ‘프랜차이즈 미용실’이 확산하면서 많은 이발사가 호텔 사우나, 목욕탕, 찜질방 한쪽에 세를 얻어 들어가는 신세로 전락했다. 진근씨도 목욕탕으로 가야 했다.

지난 30년간 이발사 김진근씨와 함께 해 온 이발 도구들.[사진=천막사진관]
지난 30년간 이발사 김진근씨와 함께 해 온 이발 도구들.[사진=천막사진관]

✚ 답답했겠네요.
“억울했죠. 이용기술만은 ‘전문가’란 자부심이 있었는데, 목욕탕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다시 대학에 가볼까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마음을 잡아주셨어요. ‘가장 잘하는 것을 하라’면서요.”

✚ 미용기술도 배웠잖아요. 미용실로 갈 생각은 안 해봤나요?
“잠깐 미용실에 들어가기도 했어요. 그런데 여성 손님을 대하는 게 너무 어렵기도 하고, 미용과 이용은 차이가 커서 적응하기 힘들었죠. 그래서 얼마 못 버텼습니다.”

✚ 미용과 이용의 차이가 뭐죠?
“긴 머리와 짧은 머리를 다루는 차이라 보시면 됩니다. 짧은 머리는 두상과 머릿결을 잘 판단해서 전체적인 균형을 맞춰주는 게 중요해요. 머리를 감고 그냥 털고 나왔을 때 안정이 돼 있어야 하죠. 그래야 스타일링도 잘됩니다. 긴 머리 위주인 미용엔 그런 게 없어요. 이발소를 고집하는 남자들이 있는 이유죠.” 

✚ 목욕탕에서 나와 직접 이발소를 차린 계기는 뭔가요?
“이발소가 목욕탕에 있으면, 목욕하러 들른 손님만 받을 수 있잖아요.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남자 전용 미용실 ‘블루클럽’이 인기를 끌었어요. ‘이 정도면 이발소란 말은 쓰지 않으면서 가게를 차릴 수는 있겠구나’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2008년 진근씨는 서울 연남동에 ‘남자 전용 미용실’을 차렸다. 15년간 갈고닦은 이용기술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마침 미용 자격증도 있어서 ‘미용실’을 내는 데도 문제없었다. 아버지처럼 ‘깨끗한 경영’을 한다면, 나쁜 이미지들도 떨쳐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혹자는 성공을 ‘운’의 연장선상이라 말한다. 그렇지 않다. 실력을 쌓아 놓지 않으면 운이 와도 성공할 수 없고, 실력이 있어야 운도 따라붙는다. 진근씨가 그랬다. 그는 블루클럽이 뜨자 ‘남자 전용 미용실’을 만들어 목욕탕을 벗어났다.

그러자 운명의 장난처럼 ‘바버숍(Barber Shop)’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바버숍은 서구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남성 전용 이발소다. 요즘 젊은층엔 새로운 숍일지 모르지만, 진근씨에겐 이발소 혹은 이용원의 부활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저기 바버숍이 생기는 걸 보면서 또다른 희망을 품었어요. ‘실력을 갈고닦으면 아버지가 일하시던 이발소 같은 바버숍을 만들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었죠.”

고진감래였다. ‘남자 전용 미용실’을 낸 지 7년 만인 2015년 진근씨는 바버숍을 차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 데 후미진 목욕탕으로 밀려들어간 지 십수년 만의 일이었다. 그가 바버숍을 차린 뒤 가장 먼저 ‘사인볼’부터 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이제 사인볼도 있나요?
“네, 당당하게 걸어놨습니다. 그래서 더 뿌듯합니다. 사인볼은 제 정체성이나 다름없으니까요.”

✚ 요즘 바버숍이 인기를 끌면서 이발사가 되겠다는 이들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만큼 이발사가 되겠다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제가 유튜브를 시작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아버지의 책에 제 경험을 녹여 새로운 이용기술서도 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30년간 머리를 깎은 사람만 13만명이니 무시하지 못할 숫자죠. 저를 통해 또다른 실력있는 이발사들이 배출된다면 남다른 기분이 들 것만 같아요.”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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