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ovie] 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죽음에서 살아 돌아와 로마의 심장 콜로세움에 노예검투사로 등장한 막시무스는 한순간에 코모두스 황제를 정치적 곤경에 빠트린다. 코모두스는 황제의 권능으로 노예검투사 하나쯤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만 그것이 간단치 않다.

불완전한 인간이 판결하는 재판의 결과에 쿨하게 승복하는 패자는 없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불완전한 인간이 판결하는 재판의 결과에 쿨하게 승복하는 패자는 없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권력이란 민심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조각배와 같은 것이다. 뒤집어지는 바다에서는 항공모함도 견딜 수 없다. 죽은 줄만 알았던 막시무스가 등장하자 잔잔하던 바다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권력을 받치고 있는 원로원에도 거친 파도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코모두스가 못마땅했던 로마시민들과 원로원 의원들, 그리고 루실라 공주의 마음에 불을 지른다. 

노예 검투사 하나를 처형해버리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것이 시민들이 열광하는 노예검투사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아마도 민심의 바다가 뒤집힐 것이다. 헌법 위에 있는 것이 ‘국민정서법’이다. ‘절대적’으로 보였던 역사상 수많은 권력들이 그렇게 무너졌다. ‘절대권력’이란 없다. 교도소장도 수감자들이 뭔가 빈정 상해서 모두 들고 일어나면 자리를 유지할 수 없다.

‘국민정서법’에 걸리지 않고 막시무스를 제거해야 한다. 코모두스가 찾아낸 방법은 ‘결투’다. 무릎을 탁 칠 만한 아이디어이다. 아직 로마에 ‘결투’라는 제도가 도입되기 이전이었던 시대임을 감안하면 코모두스는 ‘결투’라는 분쟁해결 방식의 선구자쯤 되는 듯하다. 

시시비비를 분쟁의 당사자들이 직접 칼을 들고 가리는 ‘결투(duel)’의 원조는 게르만족이다. 로마의 오랜 골칫거리 게르만 정벌에 나서서 로마 최고의 ‘게르만 전문가’가 됐던 줄리어스 시저는 「게르마니아(Germania)」라는 저술을 남긴다.

전체적으로 게르만 족속은 인간화가 아예 불가능한 야만 족속들로 적의에 찬 기술을 하지만, 게르만족들의 ‘여성 존중’과 결투 문화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기술했다. 그래서인지 후일 게르만족이 로마를 무너뜨리고 유럽을 지배하면서 결투는 주요한 분쟁해결 방식으로 자리잡는다.

불완전한 인간이 판결하는 재판의 결과에 쿨하게 승복하는 패자는 없다. 시저도 야만스럽긴 하지만 게르만식 결투로 시시비비를 가리는 방식은 배울 만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중세시대 국가와 교회는 분쟁당사자끼리 결투로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중세시대 국가와 교회는 분쟁당사자끼리 결투로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17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Voltaire)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평생 2번 완전히 망해봤다. 한 번은 재판에 져서 망했고, 2번째는 재판에 이겨서 망했다”고 인간의 재판을 조롱했다.

재판에는 이겼지만 상대방과 그 지지자들이 볼테르에게 쏴대는 분노와 비난이 훨씬 더 거세졌기때문이다. 그래서였는지 볼테르는 재판을 거부하고 재판정에 결투 허가를 신청한 기록도 남겼다. 

독설가 버나드 쇼(Bernard Shaw)는 “재판이란 판사가 어느 쪽 변호사가 더 유능한지 판결하는 것“이라면서 그다운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다. 누가 ‘이따위’ 재판의 권능을 수긍하겠는가.

중세유럽시대, 국가와 교회가 분쟁당사자끼리 결투로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한 논리적 배경은 명쾌하다. “신神은 항상 정의의 편이다. 그러므로 신은 정의로운 자가 결투에서 승리하도록 할 것이다.” 깔끔하다.

코모두스도 결투에서 막시무스를 꺾음으로써 ‘신의 뜻’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로마시민들 앞에서 증명해 보이려 한다. 물론 코모두스는 결투에 앞서 막시무스를 미리 ‘반쯤 죽여놓는’ 잔재주를 부린다. 인간이 내리는 판결엔 ‘뒤끝’이 작렬할 수 있지만, 결투에서 지고도 부들대면 이는 신을 모독하는 행위가 된다. 

중세에 신성모독죄는 화형火刑의 대상이 된다. 신심神心이 깊었던 중세유럽인들은 결투에서 지면 그것을 곧 하찮은 인간으로선 알 수 없는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결과에 승복했다고 한다. 신의 뜻을 확인했는데 그것을 억울하다고 하면 곤란하다. 혹시 억울해도 혼자 속으로 삭여야지 밖에 대고 떠들면 신성모독이 된다.

온 나라에 재판 결과가 억울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라면 1봉지 훔친 사람이나 강간범이나 형량이 비슷해서 어리둥절해진다. 그래서인지 ‘사법개혁’과 ‘검찰개혁’이 국가의 시급한 개혁과제로까지 올라온다. 그 연장선상에서 ‘검수완박’을 둘러싼 논란이 가라앉지 않는다.

법원 판결마저 이기면 정의로운 것이고, 지면 잘못된 것이란 평가를 받아야 할까.[사진=게티이미지뱅크]
법원 판결마저 이기면 정의로운 것이고, 지면 잘못된 것이란 평가를 받아야 할까.[사진=게티이미지뱅크]

‘5ㆍ18 재판’ ‘대통령 탄핵재판’은 대법원ㆍ헌법재판소의 판결까지 모두 종결됐지만 당사자들은 여전히 ‘뒤끝’ 작렬 중이다. 웬 ‘표창장 사건’도 법정 판결이 끝났지만 당사자는 여전히 억울해서 못살겠다고 책도 출판하고 영화까지 찍어 극장에 내건다. 자세한 내막이야 알 길 없는 국민은 멀미가 날 지경이다. 

법원의 판결이란 내가 이기면 정의로운 것이고 내가 지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이길 때까지 승복할 수 없다. 차라리 중세처럼 원수들끼리 잠실경기장에서 몽둥이라도 들고 결투를 벌여 판가름하는 게 속 시원할 듯하다.

줄리어스 시저가 ‘야만스러운’ 게르만족의 결투 관습에만은 고개를 끄덕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사법 결투’가 19세기까지 유럽에서 지속됐던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코모두스가 결투에서 막시무스의 칼에 숨을 거두며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결과를 겸허히 수용했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아닐 듯하다.

신의 손에 맡긴 재판도 믿을 수 없고, 인간의 손에 맡긴 재판도 믿을 수 없다면 이제 ‘AI 경찰’이 수사하고 ‘AI 검사’가 기소하며 ‘AI 판사’가 시시비비를 가려준다면 모두 승복할 수 있을까. 신도 못 믿고 신이 창조한 인간도 못 믿겠는데 하물며 인간이 창조한 AI인들 믿을 수 있을까.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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