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날의 검 환율

MB정부의 고환율 정책은 실패작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기대했던 낙수효과는 없고 물가만 올라 양극화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민생안정을 최우선으로 꼽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고환율 정책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과연 환율이 하락하면 물가가 떨어지고 민생이 살아날까. 그렇지 않을 공산이 크다.

▲ MB정부의 고환율 정책은 물가상승ㆍ사회양극화의 원흉으로 꼽힌다.

2007년 대선을 앞둔 이명박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후보)은 7%의 경제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겠다는 ‘747정책’을 핵심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를 위해 MB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줄곧 고환율 정책을 추진했다. MB정부 출범 당시 947원이었던 환율은 1년여 만에 1276원으로 35%나 폭등했다.

고환율정책의 그림자

 
고환율은 수출주도형 국가에 유리하다. 환율이 오르면 수출품에 가격경쟁력이 생겨 수출이 늘어나고, 경상수지가 개선돼서다. 기업의 이익폭도 커진다. 2008년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고환율정책의 영향이 컸다. 수출주도형 국가인 한국의 수출비중은 국내총생산(GDP)의 50%가 넘는다.

특히 수출비중이 큰 일부 대기업은 고환율 정책의 효과를 톡톡히 봤다. 삼성전자는 2009년 9조6494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전년대비 75%나 늘어난 수치다. 이런 이익의 급증은 환율 효과를 제외하면 설명하기 어렵다. 환율이 35%가 오른 만큼 해외에서 수출해 거둬들인 달러를 원화로 바꿨을 때 얻는 금액도 35%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매출과 순이익간의 레버리지를 고려하면 환율이 오르지 않았을 경우 오히려 순이익이 큰 폭으로 감소했을 가능성이 크다.

환율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명암의 구분이 확실하다. 환율이 상승하면 수출기업에는 도움이 되지만 물가상승을 부추기고 내수가 침체된다. 당연히 서민의 생활고가 심해지고, 자영업자의 어깨도 무거워진다. 특히 곡물·기름 등 주요 서민 생필품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는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실제로 2008년 4월 4%를 넘어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7월 6%대로 치솟았다. 특히 ‘MB물가지수’라고 불리는 52개 특별관리 품목의 상승률은 5년간 60%에 달했다.

송기균 충남경제진흥원장의 저서 「고환율의 음모」에 따르면 2009년 환율 폭등으로 수출 기업은 77조원의 이득을 얻었지만 국민들은 63조원의 손실을 입었다. 일부 수출 대기업이 기록한 어마어마한 순이익은 해외에서 벌어들인 것이 아니라 국민의 지갑에서 빼앗은 것이라는 얘기다.

중소 수출기업도 피해를 봤다. 환헤지 파생상품의 일종인 키코(KIKO) 때문이다. 키코는 미리 정한 범위 내에서 환율이 움직이면 시장가격보다 높은 환율로 외화를 팔 수 있지만 범위를 넘어서면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는 구조다. 2008년 MB정부의 고환율 정책으로 환율이 급등하자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도산했고 살아남은 기업 중 상당수는 아직 피해를 복구하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고환율로 이득을 본 대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을 늘려 민간경제가 입은 손해를 상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5월 발표한 ‘환율변동의 소비 ·투자에 대한 대체효과와 소득효과’에 따르면 원 ·달러 환율과 민간소비의 상관계수는 -0.69, 환율과 국내투자의 상관계수는 -0.79로 계산됐다. 또 소비 ·투자를 합산한 ‘내수’와 환율의 상관계수는 -0.77이다. 환율 상승이 소비 ·투자 ·내수에 모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다. MB정부의 고환율 정책이 실패한 정책이라고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다.

 
환율이 하락하면 내수가 살아나고 물가가 안정될 수 있을까. 지난해부터 이어진 환율 하락세는 최근 더욱 가팔라졌다. 미국 ·유럽연합(EU)의 통화정책에 이어 아베 신조 일본 신임 총리까지 엔화가치에 대한 강경발언을 잇달아 내놓고 있어서다. 새해 외환시장 개장 첫날부터 원 ·달러환율은 7.10원 급락해 1070원 선이 무너졌고 11일에는 심리적 지지선인 1060선마저 깨졌다. 지난해 고점과 비교하면 126원이나 하락했다. 원 ·엔환율의 하락세는 더욱 심각하다. 최근 석달새 무려 220원 가까이 떨어졌다.

환율의 하락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고환율정책은 재벌대기업만 수혜를 보고 서민을 옥죄는 정책’이라는 인식이 눈덩이처럼 커진 지금 민생안정 ·내수부양을 공약으로 내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고환율정책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지 않아서다.

실제로 한은은 급격한 환율 하락에도 석달째 기준금리를 연 2.75%로 동결했다. 김중수 한은 총재는 앞서 스무딩 오퍼레이션(환율 미세조정), 외환건전성 조치 등 시장개입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이런 대응책으로는 속도조절 효과만 있을 뿐 방향을 바꾸기는 어렵다. 김 총재 역시 “환율 수준이 아니라 변동폭이 지나치게 큰 것을 조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환율 하락으로 수입가격이 낮아지자 생산자물가지수는 큰 폭으로 떨어졌다. 한국은행이 17일 발표한 ‘생산자물가지수’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생산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1.2% 하락했다. 이는 2009년 10월(-3.1%) 이후 가장 큰 낙폭이다.

그러나 정작 서민의 장바구니 물가는 크게 올랐다. 대선 이후 기다렸다는 듯이 먹을거리 가격이 줄줄이 인상됐다. 지난해 12월 21일 동아원이 밀가루 출고가를 평균 8.7% 올리자 CJ제일제당과 대한제분도 각각 8.8%, 8.6%씩 인상했다. 제분업계 빅3가 모두 가격을 올린 것이다.

분유값과 소주값도 올랐다. 매일유업은 프리미엄 분유와 일반분유 제품을 하나로 통합한 리뉴얼 제품을 출시하면서 가격을 8.4%인상했다. 하이트진로, 롯데주류 등은 소주제품의 출고가를 평균 8%가량 올렸다. 이외에도 식품업체들은 된장 ·고추장 ·두부 ·콩나물 ·김치 ·빵 ·과자 등 먹을거리 전반에 걸쳐 가격을 인상할 전망이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국제원맥가격이 40%나 상승해 가격인상이 불가피하다”며 “우리는 인상폭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해 말 고점 이후 국제원맥가격은 20%가량 하락했다. 환율이 크게 떨어져 수입원가가 하락한 것을 감안하면 이들의 답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내수기업, 환율 하락 모르쇠

환율 하락폭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은 정유업계도 마찬가지다. 소비자시민모임이 11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국제 휘발유 가격이 L당 40.16원 인하됐지만 국내 정유사는 오히려 L당 16.02원 인상했다. 환율이 떨어진 것을 감안하면 폭리를 취한 것이다. 이태복 국민석유회사 설립위원회 대표는 “국내 정유사들이 수입 원가를 공개하지 않은 채 담합으로 가격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생필품의 경우 가격탄력성이 낮아 가격을 인상해도 판매량의 변화가 작다. 가격인상분은 고스란히 기업의 이익으로 직결된다는 얘기다. 결국 환율이 오를 때나 내릴 때나 실속은 대기업이 차리고 서민의 살림살이는 팍팍하기만 하다. 경제민주화 바람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이유다.
심하용 기자 stone@thescoop.co.kr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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