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반도체 동맹에 담긴 함의
미중 사이에 낀 한국 반도체
설계 인력 부재 고질병 심각

# 반쪽짜리 반도체 강국. 메모리반도체만 잘하는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불명예다. 이런 오명을 씻고 ‘반도체 초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시스템반도체를 키우는 게 윤석열 정부의 목표다.

# 하지만 소재도, 장비도, 설계도 약한 우리나라가 혼자만의 힘으로 이를 해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난 5월 미국과의 반도체 동맹을 선언한 건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다. 반도체 설계(팹리스ㆍFabless)에 강점이 있는 미국과 반도체 생산(파운드리ㆍFoundry)에 강점이 있는 우리나라가 손을 잡으면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거란 기대에서다. 

# 언뜻 우리나라 앞에 차려진 밥상은 훌륭해 보인다. 하지만 그 밑에 깔려 있는 변수들은 숱하고, 역효과가 만만치 않을 것이란 전망도 많다. 미국과 치열하게 패권 다툼 중인 중국이 우리나라를 탐탁잖게 여길 게 분명해서다. 혹여 중국이 몽니를 부리지 않더라도 대만과의 기술 경쟁, 설계 인력 양성, 반도체 생태계 개선 등 넘어야 할 장벽이 많다. 

# 반도체 패권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나라는 반도체 초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을까. 한국 반도체의 현주소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반도체 초강국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윤석열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반도체 초강국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취임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가장 먼저 살핀 건 반도체였다. ‘반도체 초강국’을 만들겠다고 강조해온 윤 대통령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행보였다. 지난 7일 주재한 국무회의에선 이례적인 반도체 특강을 열었고, 반도체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교육부를 향해 따끔한 호통을 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이 강하게 밀고 있는 ‘반도체 드라이브’에 발맞추기 위해 각 정부 부처가 진땀을 빼고 있다는 말도 들려온다.

그동안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에서 반도체 수출액 비중은 전체의 20%에 달한다. 2013년 이후 수출액 1위 자리는 줄곧 반도체의 차지였다.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경쟁국들과의 압도적인 격차를 유지하며 반도체 강국의 입지를 굳건하게 다져온 덕분이다. 

그럼 윤 대통령이 내세운 ‘반도체 초강국’은 뭐가 다를까. 메모리반도체를 넘어 비메모리반도체까지도 영역을 확장하자는 거다. 지난 4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반도체 초강국 공약의 실현을 위해 ▲시스템반도체 육성 ▲글로벌 공급망 협력 강화 등의 방안을 꺼내든 이유다. 문제는 윤 대통령의 플랜대로 ‘반도체 초강국’을 이룰 수 있느냐다.  

■변수❶ 한미 반도체 동맹의 명암 = 최근 세계 각국의 이목이 반도체를 향하고 있다.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반도체 공급난이 국가 안보 문제로까지 이어지고 있어서다. 그도 그럴 게 반도체는 자동차ㆍ모바일ㆍ가전ㆍ통신 등 주요 산업은 물론 인공지능(AI)ㆍ로봇ㆍ자율주행차를 비롯한 미래 산업을 여는 열쇠다.

반도체 공급망을 확보하지 못하면 미래로 가는 길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 반도체 패권을 차지하려는 글로벌 경쟁이 최근 부쩍 치열해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연히 반도체를 둘러싼 힘의 균형에도 균열이 생길 공산이 큰데, 이는 반도체 초강국을 꿈꾸는 우리에겐 기회이자 위기가 될 수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패권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설비투자 경쟁과 국가ㆍ기업 간 공조가 이어지고 있다”면서 “반도체 생산능력을 키우고 있는 우리나라가 이런 흐름을 기회로 삼으면 한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미국과 체결한 반도체 동맹을 두고 기대의 목소리가 쏟아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지난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에서 만나 반도체 동맹에 합의했다.[사진=뉴시스]
지난 5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에서 만나 반도체 동맹에 합의했다.[사진=뉴시스]

지난 5월 20일 방한해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를 찾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윤 대통령과 만나 양국 간 반도체 협력을 강화하는 데 합의했다. 미국으로선 반도체 공급망 확보와 중국 견제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고, 우리나라는 미국의 반도체 설계ㆍ장비 업체들과의 협업을 기대할 수 있는 합의였다.

실제로 세계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기업ㆍFabless) 시장은 미국 기업들이 꽉 잡고 있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ㆍFoundry) 시장 1위를 노리는 우리나라에 이번 합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미국과의 동맹이 우리나라에 이득만 가져다줄지는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대만과의 파운드리 경쟁에서 앞서나가는 데 얼마나 큰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대만 역시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다.

결국 한국과 대만의 ‘파운드리 패권경쟁’은 기술력에 달려있다는 건데, 우리나라엔 결코 유리한 국면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반도체 품귀현상의 주요 원인인 레거시(구식) 공정의 비중이 높지 않은 데다, 10나노(㎚ㆍ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 이하 첨단 미세공정에서도 대만과 규모 차이가 크다.

[※참고: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대만과 한국의 10나노 이하 미세공정 비중은 각각 92.0%, 8.0%로 차이가 컸다.]

더구나 당초 삼성전자는 올 상반기부터 3나노 공정을 도입해 TSMC와의 기술 경쟁에서 앞설 계획이었지만, 현재 4나노 공정 수율을 개선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원한 업계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삼성전자는 3나노 공정에 차세대 기술인 GAA(Gate-All-Around)를 적용할 계획인데, 팹리스 입장에선 설계가 달라질 수 있어 부담이 적지 않다. 그런 데다 수율 이슈까지 생기니 삼성전자를 떠나는 고객사들이 일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변수❷ 중국 배제 전략의 명암 = 우려는 또 있다. 앞서 말했듯 미국이 우리나라와 반도체 동맹을 맺은 이유 중 하나는 패권전쟁 중인 중국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이런 미국의 포석을 역으로 풀어보면,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계가 악화하고 무역거래가 힘들어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한미 반도체 동맹이 자칫 중국과의 무역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에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거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대중對中 반도체 수출액은 502억 달러(약 64조원)로 전체 반도체 수출액의 39.2%를 차지했다. 같은 기간 대미對美 반도체 수출액(91억 달러ㆍ7.1%)보다 5배 이상 많다. 

수출뿐만이 아니다.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중간재 중 상당수를 중국에서 들여온다는 점도 짚어봐야 한다. 지난해엔 대중 반도체 수입액 비중이 37.9%로, 다른 국가들보다 월등히 높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산화텅스텐ㆍ리튬ㆍ마그네슘 등도 중국 의존도가 높다는 걸 감안하면 대중 무역 거래가 악화했을 때 우리나라가 입을 손해는 상당할 가능성이 있다. 
 
중국 몽니 부리면 중소기업 타격

한발 더 나아가 삼성전자ㆍSK하이닉스 등 대기업에 비해 국내 중소 반도체 기업들이 더 큰 타격을 입을 거란 지적도 많다. 규모가 작은 반도체 장비업체나 중소 팹리스들은 대중 수출 비중이 상대적으로 더 높아서다. 그렇지 않아도 중소기업이 성장하기 힘든 국내 반도체 생태계가 더 열악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이종환 상명대(시스템반도체공학)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반도체 산업은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라고 할 만큼 얽히고설켜 있다. 소재ㆍ장비가 됐든, 설계기술이 됐든 우리나라는 미국ㆍ중국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당장 중국에서 반도체 공정에 쓰이는 재료를 안 보내면 생산라인이 멈춰 버린다. 일방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는 정책을 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변수❸ 갈길 먼 팹리스의 명암 = 또다른 우려는 초라한 국내 팹리스 경쟁력이다. 지난해 세계 팹리스 시장에서 국내 기업들이 차지한 시장점유율은 고작 1% 남짓이었다(IC인사이츠). 설계 분야에 취약한 국내 반도체 산업의 고질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설계 인력 부족과 열악한 반도체 생태계가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윤석열 정부는 반도체 분야 대학 정원을 늘려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계획을 내걸었지만 여기에도 아쉬운 점이 많다. 이종환 교수는 “설계 인력은 대학에서 단기간에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면서 말을 이었다.

“설계 인력을 절대적으로 늘려야 하지만 장기적인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대학뿐만 아니라 대학원에도 진학하고 기업에서도 실무 역량을 갖춰야 하는 등 산학연계가 긴밀하게 이뤄져야 한다. 아울러 좋은 대우도 보장돼야 하는데 중소 팹리스들은 이런 여건을 맞추기 어렵다.”

그나마 LX세미콘이 외형을 확대하며 팹리스 시장을 키우고 있는 건 반가운 일이다. LX세미콘은 최근 매그나칩 반도체 인수전에 뛰어들며 사업 경쟁력을 높이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 규모가 작아 사업을 오래 지속하기 어려웠던 국내 팹리스 업계에서 LX세미콘 출범은 중요한 신호탄”이라면서 “LX세미콘과 유사한 기업들이 많이 생겨야 하는데, 그러려면 대기업들의 투자가 활발해야 하고, 다른 기업들과 쉽게 협업할 수 있는 클러스터가 형성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반도체 초강국으로 가는 길은 아직 멀고 험난하다. 한미 반도체 동맹이 장밋빛 미래를 담보하는 ‘만능열쇠’인 것도 아니다. 혹자는 “새 정부가 ‘반도체 초강국’을 내걸었으니 긍정적인 결과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지만, 반도체에 힘을 쏟는 건 세계 각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과연 우린 반도체 초강국이란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을까. 경쟁은 어쩌면 지금부터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