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파트5] 기업이 배워야 할 프라다의 통념 깨기

통념을 깨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소비자의 발상을 흔들지 않으면 통념은 절대 붕괴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통념이 영원불멸인 것은 아니다. 발상만 전환하면 의외로 쉽게 깨진다. 군용 나일론 가방으로 승부수를 던졌던 프라다가 이를 잘 보여준다. 국내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 프라다는 가죽 일색이던 명품 가방시장에 나일론으로 만든 가방을 출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업계마다 전문용어보다 쉽게 쓰는 말이 있다. 패션계엔 유독 그런 용어가 많은데 대표적인 게 ‘프라다(PRADA)천’이다. 프라다천의 원래 이름은 포코노(Pocono). 조직이 아주 가늘어 질기면서도 실크처럼 섬세한 나일론이다. 하지만 이제는 프라다 가방소재를 일컫는 ‘프라다천’이 굳어졌다.

프라다천은 구김이 없고 방수가 뛰어난 게 특징이다. 커피나 물을 엎질러도 쓱쓱 닦기만 하면 새것처럼 반지르르해진다. 군대의 천막이나 낙하산 등 군수용품에 주로 쓰인다. 1980년 프라다는 나일론 가방으로 세계 유명 브랜드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프라다가 처음부터 나일론을 사용한 건 아니다. 1914년 문을 연 프라다는 가방 소재로 고급 가죽만 고집했다. 가방은 모름지기 가죽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업계 통념 때문이다. 프라다는 고급 가죽으로 여행용 가방ㆍ가죽 액세서리ㆍ화장품 케이스를 판매했다. 이국적이고 고급스러운 디자인 덕분에 반응이 꽤 좋았다. 결혼이나 여행을 앞둔 밀라노 부유층이 많이 찾았다.

잘나가던 프라다는 1ㆍ2차 세계대전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고급 가죽은 물론 소재조차 구할 수 없었다. 경기가 꽁꽁 얼어붙은 탓에 소비재 산업이 폭삭 주저앉았다. 프라다는 이렇다 할 히트상품 없이 파산 위기에 처했다.

1978년 구원투수가 등장했다. 창업주의 외손녀 미우치아 프라다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았는데 패션 감각이 남달랐다. 모두가 신는 스타킹 대신 하얀 발목 양말로 멋을 내고,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옷을 입고 시위부대에 합류했다.

프라다를 이어받은 미우치아는 할아버지와 다른 판매전략을 세웠다. 디자인에 집착하기보다 색다른 소재를 찾는데 공을 들였다. 할아버지가 최고급 가죽으로 가방을 만들었다면 미우치아는 특이한 소재로 가방을 만들었다. 명품이라고 해서 꼭 가죽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죽제품은 관리하기가 까다로웠다.

독특한 원단을 구하던 중 우연히 할아버지의 트렁크에서 원단을 발견했다. 포코노였다. 할아버지가 트렁크가 비에 젖지 않도록 둘러싼 방수천이었다. “바로 이거야!” 미우치아는 쾌재를 불렀다.

 

1985년 프라다는 ‘클래식 프라다 핸드백’을 출시했다. ‘프라다 밀라노’ 로고를 삼각 금속장식에 새겼다. 시장 반응은 뜨거웠다. 군수용품에 쓰이던 나일론 방수천으로 가방을 만들었으니, 명품이라면 가죽이나 실크만 생각했던 소비자에겐 충격적인 발상이었다.

검은색 나일론 가방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세계시장에 진출한 1990년에만 3170만 달러(약 335억원)의 판매실적을 올렸다. 훗날 검은색 나일론 가방은 프라다의 대명사가 됐다. 프라다는 지금도 연간 2조원의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가죽 일색이었던 명품 가방시장에 합성섬유 소재 가방이 대거 등장했다. 프라다는 가죽이 아닌 독특한 군용 소재로 세계 브랜드 반열에 올랐다.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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