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총론] 불황기 기업 생존 비책

 
불황이 깊어지면 모든 게 불확실해진다. 한치 앞을 보기조차 어렵다. 이런 때 소비자와 기업은 동상이몽同床異夢에 빠진다. 소비자는 지갑을 닫아야 산다. 기업은 닫힌 지갑을 열어야 생존한다. 언뜻 봐도 기업이 불리하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기업 스스로 시장에 독버섯처럼 퍼져 있는 ‘편견ㆍ고정관념ㆍ불문율’을 깨면 된다. Break 3 things! 불황기 기업의 생존비법이다.

Good Morning America(GMA). 미국 ABC 방송의 인기프로그램이다. 세 차례나 에미상을 받는 영예를 누렸다. GMA는 선망의 프로그램이다. 화끈하게 ‘뜬 자’가 아니면 명함조차 내밀기 어렵다. GMA의 숨은 불문율이다.  지난해 9월 13일 GMA는 한 동양인 가수의 노래를 소개했다. 그냥 알린 게 아니다. 미국 자본주의 심장부라는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댄서들이 이 노래에 맞춰 군무群舞를 췄다.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뉴욕커를 놀라게한 사건이었다.

이 동양인 가수는 싸이, 노래는 ‘강남스타일’이었다. 단 한번도 해외진출을 해본 적 없던 그였다. 영어로 노래를 부른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Made in Korea’ 였다. 대체 왜? 어떻게? 싸이가 미국을 휘어잡은 코드는 ‘위트’였다. 유머가 넘치는 뮤직비디오에 사람들이 열광했다. 누구나 웃음을 잃을 수밖에 없는 불황.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불황을 비웃기라도 하듯 ‘유머펀치’를 날렸고, 적중했다. 세상 어디서든 웃음꽃이 피는 호황이었다면? 미국은 물론 세계는 말춤을 보면서 콧방귀를 뀌었을지 모른다. 고요한 불황기에도 변화가 싹트게 마련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11월 3일.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은 미국 철도회사 ‘벌링턴 노던 산타페’의 주식을 매수했다. 매입금액은 440억 달러(약 46조5080억원)에 달했다. ‘투자의 귀재’라는 버핏이 생애 가장 많은 투자금을 쏟아붓는 순간, 장내가 술렁였다. 철도산업은 ‘죽음으로 가는 바다’에 진입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럴 법도 했다. 10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세계 불황, 철도산업은 부활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다. 아니, 확실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벌링턴 노던 산타페’는 2010년 매출 168억 달러, 순이익 24억6000만 달러를 달성했다. 주가는 상승곡선을 그렸다. 불황기를 맞아 유가가 급상승하자 항공이 아닌 화물운송량이 늘어난 게 이유였다. 버핏, 그의 선택은 적중했다. 불황엔 전세가 역전될 수 있다는 걸 버핏은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1929년 경제대공황. 과거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경제교과서에서 배웠던 뉴딜정책(경기부양책)을 세계 각 정부가 펼 줄도 몰랐다. 무서운 놈이 매섭게 덮쳤다. 불황이란 ‘놈’이다. 2008년 리먼 사태에서 출발한 ‘불황 DNA’가 전세계에 퍼지는 데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2010년에는 유로존 재정위기까지 터졌다. 세계경제를 온몸으로 지탱하던 중국경제가 흔들리면서 ‘불황의 늪’은 더 깊어졌다.

불황을 해소하는 만병통치약이라던 경제이론은 무참히 깨졌다. ‘불황엔 돈을 풀어라’고 주창하던 케인즈 경제학은 불황 앞에 무기력했다. 미국은 세번에 걸쳐 양적완화(QE)를 실시했지만 부활의 초석을 놓는데 실패했다. 경제예측연구소 HS덴트의 설립자 해리 덴트는 자신의 저서 「2013~2014 세계경제의 미래」에서 “케인즈 경제학이 불황을 극복하는 특효약이라는 맹신은 깨졌다”고 꼬집었다.

불황은 전세 역전의 시기

불황기에 깨진 건 경제이론만이 아니다. 시장을 지배하던 통념도 무너지고 있다. 불황이 깊어질수록 소비습관이 180도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풀어보자. 불황에는 소득이 줄어든다.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은 많은데, 살 게 없다. 아니, 살 수 있는 게 없다. 지출하거나 부채를 갚아야 할 돈도 부족한데 새 제품을 사는 ‘배짱 있는’ 소비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소비자는 불황일수록 ‘최소비용 최대효과’라는 경제원칙을 충실하게 따른다. 제품가격을 낮추거나 혁신적인 무언가를 담지 않는 기업은 소비자의 외면을 받게 마련이다. 김상현 영남대(경영학) 교수는 이렇게 분석했다. “평상시 시장은 일반적인 관념이나 패턴을 갖고 있다. 가령 ‘비싸면 무조건 팔린다’ ‘명품이면 다 된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이런 통념은 불황기에 통하지 않는다. 모든 게 불확실하기 때문에 통념 따위가 발붙일 틈이 없다.”

▲ SPA 브랜드는 싼 게 비지떡이라는 고정관념을 꾸준한 혁신으로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김 교수의 말은 불황기에 일어나는 변화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싼게 비지떡’이라는 통념이 무너지고 있다. 불황기에 접어들면서 급부상한 SPA 브랜드의 사례를 보자. SPA브랜드는 패스트패션(fast fashion)을 말한다. 패스트푸드처럼 ‘찍어내듯’ 옷을 만든다는 혹평을 받았다. 품질보단 유행을 쫓는 것을 비꼰 말이다. 고급스럽게 표현했지만 한국말로 ‘싸구려’였다.

하지만 최근 패션업계의 화두는 단연 SPA브랜드다. 이랜드•제일모직 같은 패션 대기업까지 미쏘(Mixxo)ㆍ에잇세컨즈(8seconds) 등 자체 SPA브랜드를 출시하고 있다. SPA 브랜드가 인기를 끌고 있는 건 ‘저가의류는 품질이 떨어진다’는 고정관념을 혁신으로 깨버렸기 때문이다. 품질은 유지하되 유통구조를 바꿔 가격을 낮춘 게 주효했다. 품질 좋고, 세련된, 게다가 가격까지 저렴한 SPA 브랜드에 소비자가 열광한 건 당연하다.
대형마트의 PB(Private brand자체브랜드)도 저가라는 ‘주홍글씨’를 말끔하게 지워버렸다. 해외업체와 직접 계약을 맺고 대량 매입해 고품질의 상품을 저렴하게 파는 전략이 성공했다. 특히 PB커피는 웬만한 대형 커피전문점과 비교했을 때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외 유명농장이나 업체와 직계약을 체결하고 고품질의 원두커피를 들여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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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어려운 상황에서 제값을 줘야 할 상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데, 소비자가 지갑을 열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최명동 경영혁신연구원 원장(건국대 경영대학 겸임교수)은 “불황기에 살아남기 위해선 끊임없이 경영혁신을 해야 한다”며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통해서 경영의 가치사슬을 재점검할 필요도 있다”고 조언했다.

‘시장지배자는 영원하다’는 통념도 불황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근 서울대(경제학) 교수가 자신의 저서 「기업간 추격 경제학」에서 “불황은 후발기업에 새로운 진입과 역전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주장한 것처럼 말이다.

 
대표적인 사례는 삼성전자의 눈부신 ‘애플 캐치업(catch-up)’이다. 시계추를 2007년으로 돌리자. 그해 IT세상엔 아이폰 열풍이 불었다. 사실 아이폰이 나오기 전에도 스마트폰은 있었다. 아이폰 열풍의 근원지는 개발자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앱스토어였다. 생전처음 본 ‘앱 세상’에 수많은 소비자가 열광했다. 피처폰 시대를 이끌던 노키아•림은 직격탄을 맞았고, 삼성의 신세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삼성은 2009년 아이폰 추격에 나섰다. 첫 스마트폰 ‘옴니아’로 승부를 걸었지만 처참한 실패. 2010년 삼성의 스마트폰 점유율은 아이폰(17%)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5%에 불과했다. IT전문가들은 ‘애플의 독주’를 예상했다. ‘삼성이 소니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삼성은 의지를 곱씹었다. 불황임에도 연구개발(R&D)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스마트폰 두께를 0.1㎜라도 줄이기 위해 수많은 연구원이 밤을 새웠다. 아이폰을 따라잡을 수 있는 기술이라면 모든지 장착하고 실험했다. 그렇게 갤럭시S가 나왔고, 갤럭시S2는 ‘아이폰에 비견되는 스마트폰’이라는 평을 받았다. 불황일수록 제품의 스펙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소비자가 꿈틀대기 시작한 거다.

시장지배보다 강력한 소비자 선택

삼성은 혁신의 고삐를 더욱 조였다. 갤럭시S 시리즈에 매년 신기술을 적용했다. 자체 앱 프로세서(AP)와 통신칩 기술은 물론 능동형유기발광다이오드(AMOLED) 디스플레이를 장착했다. 갤럭시S3에는 사용자의 얼굴•눈•음성•동작을 인식하는 사용자환경(UI)을 도입했다. 끊임없는 추격의 결과는 알찬 열매로 이어졌다. 삼성은 2011년 4분기 애플을 따돌리고 스마트폰 시장점유율 1위에 올랐다.

이정희 중앙대(산업경제학) 교수는 “불황일수록 남들에겐 없는 걸 갖고 있다는 자부심을 소비자에게 안겨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이 애플을 추격하는 데 성공한 건 소비자의 감성을 제대로 자극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추격자의 성공스토리는 국내 식품업계에서도 쓰이고 있다. 사실 식품업계만큼 ‘한번 빼앗긴 1위 자리를 탈환하기 힘든’ 곳은 없다. 한때 라면의 대명사로 불리던 삼양라면이 1985년 농심에 1위 자리를 뺏긴 뒤 지금까지 정상을 탈환하지 못하고 있는 건 대표적 사례다. 이런 불문율을 보란 듯이 무너뜨린 기업은 오비맥주다.

 
오비맥주는 하이트진로에 빼앗긴 정상자리를 무려 17년 만에 되찾았다. 주류업계와 한국주류산업협회의 자료를 보면 지난해 10월까지 오비맥주의 점유율은 55.8%로 하이트진로(44.2%)보다 11.6%포인트 많다. 공교롭게도 오비맥주가 세계불황이 시작된 직후 던진 승부수가 통했다. 오비를 버리고 카스를 내세운 게 하이트맥주를 따라잡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2010년 맥주업계의 관례를 깨고 ‘밀어내기’를 없앤 것도 오비의 부활을 이끌었다. 2010년 오비맥주에 합류한 장인수 사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현장을 방문하면서 ‘밀어내기를 하지 말자’고 했다. 도매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눈이었다. 월별 출고량을 맞추기 위해 밀어내기를 하는 게 맥주업계의 오랜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비가 살아나기 위해선 ‘맛’을 끌어올려야 했다. 밀어내기를 고집하면 ‘상큼함’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보관창고에 오래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밀어내기를 없애자는 제안을 경영진이 받아들이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밀어붙였다. 직책을 걸고 말이다.”

불황기에 혁신을 꾀하면 더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 불황일수록 많은 기업이 복지부동하기 때문이다. 최명동 원장은 “기업은 불황일수록 혁신적인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엔 가오花王라는 회사가 있다. 장기불황에 허덕이는 일본에서도 꾸준히 성장하는 기업 중 하나다. 원동력은 혁신에 있다. 이 회사는 다이어트 식용류•건강녹차 등 혁신제품을 꾸준히 시장에 출시했고, 그 노력을 인정받았다.”

장인수의 극단적 승부수 “통하다”

그렇다고 혁신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무언가를 살짝 바꾸는 것도 혁신이다. 이지평 수석연구위원은 일본 닛산의 ‘마치’라는 자동차에 빗대 혁신을 설명했다. “닛산은 아무런 연고가 없는 동남아에 진출했다. 자동차 구조를 살짝 바꿔 마치를 출시했는데, 의외의 성공을 거뒀다. 그 시장에선 ‘혁신’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동남아에서 성공한 마치는 일본시장에 다시 출시됐다.”

그렇다. 통념은 깨지라고 있는 거다. 어떤 변수가 나타나도 흔들리지 않는 철옹성 같은 통념은 없다. 혁신은 통념보다 강할지 모른다. 특히 불황기엔 말이다.
김미선•김건희 기자 story@thescoop.co.kr|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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