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6개월 남은 박근혜 정부의 해결과제 | 중소기업 골치 썩이는 어음

▲ 어음은 중소기업을 괴롭히는 독한 가시 중 하나다.<사진: 더스쿠프 포토>
어음처럼 질기고 독한 가시도 없다. 1980년부터 폐지문제가 공론화됐음에도 여태껏 살아남아 중소기업을 괴롭힌다. 휴지조각으로 전락한 어음을 들고 곡哭소리를 토하는 중소기업 CEO도 수두룩하다. 중소기업은 언제까지 어음에 휘둘려야 하나. 이젠 끝낼 때도 됐다.

19세기 초. 미국에선 누구든지 은행을 설립할 수 있었다. 별다른 은행규제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은행권 발행이 자유로웠다. 통제 없는 자유는 남용을 불렀다.

은행은 “우리의 권리”라며 은행권을 마구 찍어댔다. ‘부도속출’이라는 후폭풍이 불었다. 저잣거리엔 휴지조각으로 전락한 은행권이 흩날렸다. 미 남북전쟁(1861~65년) 기간, 정부가 철퇴를 들었다. 국립은행법을 제정하고 은행권을 발행하는 주립은행에 세금을 물리겠다며 으름장을 놨다.

들고양이 은행 잡은 세금카드

약발은 금세 나타났다. 주립은행으로선 비싼 세금을 내야 하는 은행권을 발행할 이유가 없었다. 차라리 값싼 수표를 발행하는 게 나았다. 미 연방정부는 ‘들고양이 은행’의 은행권 발행을 반강제적으로 막았다. 그렇다고 수표제도가 빨리 정착된 건 아니다. 경제학자들은 “두 세대는 족히 걸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 19세기 중엽은 은행의 리스크를 고객이 판단하는 시대였다. 은행은 무차별적으로 은행권을 발행해 유통해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들고양이나 살 것 같은 곳에 은행을 설립한다’고 비꼬았다. ‘들고양이 은행’의 유래다.]

돈 관련 제도를 바꾸는 건 쉽지 않다. 들고양이 은행의 사례처럼 말이다. 우리는 어음을 띄엄띄엄 보는 경향이 있다. 메스만 대면 쉽게 바꿀 수 있을 것으로 여긴다. 그른 판단이다. 어음의 생명력은 길고 질기다. 국내 일간지에 실린 두 기사를 소개한다. 시기는 일단 블라인드 처리한다.

[article1] “중소기업들은 자신들 앞에 산적해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라고 있다. 중소기업 CEO들은 주로 장기어음 결제, 납품단가 인하 등 대기업의 불공정 하도급 거래를 지적한다.”

[article2] “중소기업의 자금난이 가중되고 있다. 금융긴축으로 자금을 구하기 어려운데다 어음할인까지 쉽지 않아서다. 대기업들이 자금부담을 납품업체에 전가하는 경향이 있어,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더 심해지고 있다.”


언뜻 비슷한 시기의 기사 같다. 아니다. [article1]은 지난해 1월 30일자 한겨레신문 기사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내뱉은 ‘손톱 밑 가시(손톱에 박힌 작은 가시가 큰 고통을 준다)’ 발언 이후 중소기업중앙회가 (중소기업 CEO의 애로사항을) 취합한 내용을 기사화했다. [article2]는 1983년 5월 7일자 매일경제 기사다. 30년 시차가 있지만 두 기사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어음 탓에 괴롭다’는 중소기업의 곡소리가 수십년째 울리고 있음에도 개선된 게 별로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상하다. 여야 정치인들은 때만 되면 ‘어음법 개정’을 운운한다. 중소기업의 파수꾼인양 선거철만 되면 ‘어음카드’를 꺼내든다. 예전엔 더 그랬다. 금배지들은 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시계추를 1998년으로 돌려보자. DJ정부 출범 직후 ‘어음제도를 폐하자’는 논의에 불씨가 댕겨졌다. 집권당이었던 새천년국민회의는 ‘창업한 지 1년 미만인 기업에겐 어음을 발행할 수 없는 제도를 만들겠다’며 별렀다. 어음발행 총액한도제도의 도입도 시사했다. 어음제도개선정책기획단(단장 정세균)까지 만들었으니, 어음제도 개혁은 떼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실제로 김원길 정책위의장(당시)은 “3년 안에 어음제도를 폐지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지원사격도 활발했다. 1998년 5월 8일 정일영(자민련) 의원(당시)을 비롯한 41명은 어음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내용은 이랬다. “… 기업간 결제를 할 때 어음거래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어음부도율도 높아지고 있다. 중소기업의 연쇄도산이 초래되고 있어 사회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중소기업의 자금융통성을 확보하고, 중소기업의 연쇄부도를 방지하기 위해 60일로 어음만기를 규제한다. 약속어음제도는 2001년 7월 31일 이후 폐지한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어음법 개정논의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소관상임위 조차 열리지 않았다. 이 개정안은 2000년 5월 29일 은근슬쩍 폐기됐다. 이런 사유에서였다. “임기만료로 인한 폐기.” 어음법 개정안만 내놓고 세월만 보낸 셈이다.

MB정부 초반에도 비슷한 논의가 있었다. 2008년 9월 26일 강운태(민주당) 의원(현 광주광역시장) 등 11인은 어음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 어음만기를 60일 이내로 정한다. 어음이 부도났을 때 발행인과 인수인은 민사책임과 더불어 형사책임까지 부담하도록 한다.…” 하지만 이 개정안도 2012년 5월 29일 폐기됐다. 사유는 이전과 똑같았다. “임기만료에 따른 폐기.”

어음법 개정시도 하세월 …

1962년 제정된 어음법은 2000년 이후 두차례 개정됐다. 한번은 전자어음의 발행근거를 만들기 위한 개정(2006)이었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원안가결됐고, 2007년 공포됐다. 다른 한번은 의미를 찾기 힘든 개정이었다. 2009년 MB정부는 어음법 개정안을 제출했는데, 이런 이유를 들었다.

“법문장은 일반국민이 쉽게 읽고 이해해서 잘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민의 올바른 언어생활을 위한 본보기도 돼야 한다. 우리의 법문장에는 용어 등이 어려워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 법문장의 표기를 한글화하고 어려운 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풀어쓰면 잘 이해할 수 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처럼 국민을 훈육하기 위해 어음법을 개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개정안은 2010년 3월 공포됐다. 어음 때문에 피멍이 드는 중소기업이 수두룩한데, 정부는 고작 문구수정에만 열을 올린 셈이다.

▲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손톱 밑 가시론을 설파했다. 중소기업은 장기어음 결제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사진 위).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의 CP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CP를 활용해 돈을 끌어모으고 부도를 내는 사건도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사진은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사진: 뉴시스>
한낱 유가증권에 불과한 어음을 두고 누구는 울분을 토해낸다. 누구는 어음법 개정안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어음의 폐해가 생각보다 간단치 않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연쇄부도 리스크가 크다. 독일ㆍ이탈리아와 달리 국내 어음법은 배서ㆍ양도를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음이 부도나도 하소연할 곳이 마땅치 않다. 다른 나라와 달리 국내 어음사건은 민사民事의 영역이다. 어음사기를 쳐도 부담이 적은 이유다. 돈 몇푼 돌려주면 끝이라서다. 사례를 보자.

작은 파이프 공급업체 사장 최택민(41)씨. 그는 요즘 날밤을 새우는 날이 잦다. 일이 많아서가 아니다. 부도어음 탓이다. 2008년 최씨는 사업가 A씨에게 1억5000만원을 빌려줬다. 담보로 액면가 2억원짜리 어음을 받았다. 위험부담이 있었지만 A씨를 믿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A씨는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어음은 부도처리된 지 오래였다.

할인(현금화) 기회를 놓친 그는 민사소송을 걸었고, 승소했다. 그러나 1억5000만원은 아직도 받지 못하고 있다. A씨가 ‘돈이 없다’며 완강하게 버티고 있어서다. 승소했음에도 돈을 받아낼 방도가 마땅치 않다. 그는 “형사처벌 규정이 있다면 철가면을 쓰고 버티진 못할 거다”며 “담보로 받은 어음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또 있다. 어음은 자금회전을 막는 장애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자료(2012년 4분기 제조업 기준)를 보면 물건을 납품한 뒤 43일이 지나야 어음을 받는다. 그로부터 75.7일이 흘러야 결제가 된다. 물건값 대신 어음을 받았을 때 118.7일(총회수기일)이 지나야 현금이 통장에 꽂힌다는 이야기다.

혹자는 ‘(총회수기일이) 많이 줄지 않았느냐’고 되묻는다. 그렇지 않다. 2009년 4분기 총회수기일은 119.9일이었다. 3년새 1.2일 줄었을 뿐이다. 물건값을 3개월 후 받으면 자금회전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다. 둘째 사례를 보자.

서울 성수동에서 조그만 부품제조업체를 운영하는 김민수(51)씨. 직원 20명을 거느리고 있는 그는 어엿한 사장이다. 월 매출은 1억원에 달한다. 인건비ㆍ임대료를 비롯한 고정경비로 월 8200만원을 지출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넉넉한 매출로 보인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다. 월 매출 8200만원 가운데 5000만원이 어음이다. 원청업체에 찾아가 통사정해서 어음을 간신히 털어내면 또 다시 어음결제가 들어온다. 어음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이다.

한번은 원청업체 관계자에게 ‘어음을 받지 않겠다’며 버틴 일도 있다. 하지만 부메랑처럼 날카롭게 돌아온 답변에 의지를 꺾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부품을 공급하겠다는 업체가 수없이 많다. 그들에겐 편하게 어음을 줄 수 있다. 어음이 싫다고? 그럼 거래하지 말자.”

혹자는 ‘그렇게 급하면 할인을 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어음을 할인하면 적어도 10~20%를 떼인다. 이러든 저러든 손해 보긴 마찬가지다. 기업어음(CP)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어음 당좌개설업체 1만570곳 가운데 신용등급 A 이상은 8.5%에 불과하다. 투기등급(BB+이하) 기업이 어음을 발행한 비중은 77.8%에 이른다.
 
이 자료는 2007년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이 작성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더 심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김동환 연구위원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투자부적격 등급기업의 CP 발행비율은 더 높아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음은 신용증서다. 수표와 달리 은행에 현금이 없어도 발행할 수 있다. 운영의 묘만 잘 살리면 효율적인 교환수단이 될 수 있다. 어음제도를 손보기 전 대-중소기업, 중소기업-영세업체 사이에 형성돼 있는 ‘갑을甲乙관계’를 끊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어음의 폐해는 대기업ㆍ중소기업ㆍ하위 납품업체의 서로 다른 ‘바기닝 파워(Bargaining powerㆍ협상력)’ 에서 기인한다.

어음의 폐해가 공론화된 것은 1980년대부터다. 벌써 30년이 훌쩍 지났다. 어음처럼 질기게 살아남아 중소기업을 괴롭히는 것도 드물다. 작지만 큰 고통을 주는 ‘손톱 밑 가시’ 중에서 가장 뾰족할지 모른다. 19세기 초 미국 주립은행의 은행권 남발을 규제한 것은 정부였다. 우리도 정부가 나서야 한다. 박근혜 정부의 몫이다. 시간은 꽤 많이 남아 있다. 4년6개월이나….
이윤찬 기자 chan4877@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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