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총론] 스페인을 반면교사로 삼아라

 스페인 경제는 ‘야누스의 얼굴’과 같다. 표면적으론 안정세를 찾고 있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 실업률은 치솟고, 소매판매율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나라 곳간이 탄탄하다’며 호기를 부리던 2007년 스페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스페인과 닮은꼴 행보를 보이는 국가가 있다. 한국이다. 성장동력도, 위기유형도 비슷하다. 스페인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때다.

 

딱딱한 이야기는 잠시 접고 축구 얘기를 해보자. 스페인 축구는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이 가장 뛰어나다. 스페인 국가대표는 2010년 월드컵과 유로2012에서 연달아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스페인 축구의 가장 큰 경쟁력은 ‘협동’이다. 이들은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움직인다. 선수들이 짧은 패스를 주고받는 모습은 스페인어로 ‘티키타카(Tiki-Taka)’로 표현된다. 이는 탁구공이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뜻한다.

 
국가대표만이 아니다. 스페인 축구리그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리그 시스템도 훌륭하다. 총 4부로 나누어져 있는 스페인 프로리그에는 450개가 넘는 클럽이 있다. 1부 리그에선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뛴다.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글로벌 축구전장戰場이다. 2~4부 리그는 자국선수 중심이다. 개방과 보호, 스페인 축구리그의 콘셉트다.

흥미롭게도 ‘개방 ·보호’라는 축구 콘셉트는 스페인의 경제전략과 닮았다. 스페인은 외국자본 유치와 자국산업 보호라는 두 바퀴를 제대로 굴려 성장을 거듭했다. 국민당이 14년 만에 정권을 잡은 1996년, 스페인의 실업률은 20%를 넘었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대에 불과했다. 국민당은 이런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두가지 전략을 썼다. 내수를 육성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풀었다. 자국산업 보호책이었다. 아울러 외국자본을 과감하게 유치해 신산업을 키웠다. 글로벌 경제시대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런 노력은 알찬 열매를 맺었고, 달콤한 고성장은 2007년까지 이어졌다. 한편에선 이탈리아 대신 스페인을 G7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스페인의 미래는 밝았다. 스페인 경제는 ‘세계 1등’을 자부하는 축구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었다.

그런 스페인이 하루아침에 위기를 맞았다. GDP성장률은 마이너스로 추락했다. 2007년 12월 8.8%에 불과하던 실업률은 2012년 11월 30일 26.6%까지 치솟았다. 유럽연합(EU) 25개국 중에서 최고치다. 경제운영도 여의치 않아 보인다. 스페인의 지난해 재정적자는 GDP의 7.3%를 기록했다. 2011년보다 1.7%포인트 감소했지만 스페인 정부가 목표로 삼은 6.3%보다는 1%포인트 높았다.

국제금융시장의 눈도 예년 같지 않다. 글로벌 3대 신용평가회사는 스페인의 국가신용등급을 투자적격 가운데 가장 아랫단에 배치했다. 한 단계만 더 떨어지면 투자부적격이다. 특히 무디스는 2010년 9월 30일~2012년 6월 13일 21개월 동안 총 5차례나 국가신용등급을 강등했다. 위기를 맞이하기 전까지 스페인은 3대 신용평가회사 모두에게 최고등급을 받았다.

지난해 6월에는 10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제공받았다. 물론 은행권에 한정된 구제금융이었지만 외부에 손을 빌린 네번째 국가라는 불명예는 피할 수 없었다. [※참고: EU 회원국 중 첫 번째로 구제금융을 받은 나라는 아일랜드다. 2010년 850억원을 받았다. 포르투갈은 2011년 780억원의 유로를 지원받았고, 그리스는 2010년, 2012년 총 24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받았다.]

꽁꽁 얼어붙은 실물경제

 
물론 스페인 경기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2012년 7월 24일 642bp(1bp=0.01%포인트)까지 치솟았던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올 2월 12일 273bp까지 떨어졌다. 10년 물 국채금리는 같은 기간 6.38%에서 3.69%로 하락했다. 스페인의 펀더멘털(기초경제여건)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1차 장기대출 프로그램(LTRO)의 1차 조기상환금 중 33%가 스페인 은행에서 마련됐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LTRO란 유럽중앙은행(ECB)이 신용경색을 겪는 유로존의 은행들에게 저리로 돈을 빌려준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유럽식 양적완화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취임한 직후인 2011년 12월과 2012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총 1조 유로가 지원됐다. 천문학적인 유동성이 은행권에 공급되면서 유로존 위기는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 대출금의 만기는 원래 3년이었지만 1년이 지난 올 1월말부터 조기상환 작업에 들어갔다. 유로존, 특히 스페인의 사정이 그만큼 좋아졌다는 얘기다.

하지만 스페인의 펀더멘털이 완전히 회복됐다고 보는 시각은 없다. 근본적인 문제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엇보다 스페인의 실물경기 침체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 스페인의 소매판매율은 2012년 12월말 -10.7%였다. 리먼사태가 세계경제를 위축시킨 2008년 12월말(-7.5%)보다도 낮다.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스페인 국민들도 가파르게 늘어났다.

스페인의 은행대출 연체비중은 2008년 12월 31일 3.37%에서 2012년 11월 30일 11.38%로 4배가량 치솟았다. 또 2월 이후에는 스페인의 국채만기가 집중돼 있어 시장의 우려를 더욱 키우고 있다. 스페인은 2월에 92억 유로, 3월에 122억 유로, 4월에 226억 유로(총 63조원)를 갚아 나가야 한다. 서울시 3년 예산과 맞먹는 금액이다.

▲ 스페인 시위대가 11월 14일(현지시간) 마드리드에서 총파업의 일환으로 노동조합 시위를 위해 모였다.
이다슬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스페인이 전면적 구제금융 없이도 일단 용케 버티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실업률, 소매판매, 연체대출 비중 등 서민의 삶과 직결되는 지표가 악화되고 있다는 것은 스페인의 험난한 여정이 이제부터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조익재 하이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스페인 경제의 펀더멘털 회복이 장기간에 걸쳐 진행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불안한 추세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스페인 노동조합 총파업 시위에 참가한 한 시위자가 그랑비아 도로에 앉아 있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에는 정치 스캔들까지 터졌다.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를 포함한 국민당 지도부가 1997~2008년 정기적으로 건설업체에게 공사 수주를 대가로 뇌물을 받은 사실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드러난 것이다. 스페인 일간지 엘 파이스에 따르면 라호이 총리가 지난 11년간 챙긴 뇌물은 32만3231유로(4억8000만원)에 달한다.

라호이 총리는 의혹이 제기된 지 이틀이 지난 2월 2일 “나는 절대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적이 없다”며 자신에게 쏟아진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자신의 소득과 재산을 모두 공개하겠다고 발표한 라호이 총리의 해명에도 성난 민심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국민에게는 국가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한다고 강요하면서 집권당은 뒤에서 뇌물을 챙겼기 때문이다.

마드리드 국민당 당사 앞에서는 시위가 이어졌고, 총리 조기 퇴진을 요구하는 온라인 청원에는 100만명 가까이 참여했다. 여론에 힘입은 야권은 라호이 총리의 즉각적인 퇴진과 조기총선실시를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이번 뇌물 수수 혐의로 라호이 총리의 리더십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다는 점이다. 부가가치세 인상, 공무원 임금 삭감 등 스페인의 긴축재정과 경제개혁을 이끌었던 라호이 총리가 실각할 경우 재정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까지 해온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다.

이창목 우리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이번 정치스캔들은 라호이 총리가 추진하던 개혁정책을 약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며 “스페인이 실물경제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선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한데, 향후 개혁추진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우영무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최악의 시나리오는 라호이 총리가 실각하는 것”이라며 “이 경우 스페인의 정치적 혼란은 경제적 위기로 발전하면서 전면적 구제금융 신청과 위험지표의 폭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스펙시트(spain+exit)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스페인과 그리스는 기본적으로 전 세계에 미치는 경제적 파급효과가 다르다. 유로존 GDP에서 그리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2%에 불과하다. 스페인은 11%에 달한다. 유로존의 네 번째 경제강국이다. 특히 스페인의 위기는 도미노처럼 이탈리아, 그리스 등 주변국으로 전염될 가능성이 크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지난해 스페인이 위기에 빠지면 세계경제가 충격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스페인은 경제규모가 그리스의 5배로 세계경제와 금융시장에 미치는 충격의 정도는 예상을 초월할 것”이라며 “스페인의 은행위기가 촉발되면 그 자체로 충격이 클 뿐만 아니라, 실물위기로 확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할 때 그 파급영향이 대단히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스페인이 세계의 골칫덩어리가 된 셈이다.

여기서 주목할 게 있다. 스페인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균형재정을 맞추고 있었다. 2007년 GDP 대비 정부부채는 36%에 불과했다. 수년간 ‘정부채무제로’ 행진을 이어가기도 했다. 1997~2007년 EU 회원국 중 가장 빠르게 성장한 국가는 스페인이었다. 그 기간 스페인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였다. 같은 기간 이탈리아의 성장률(1.6%)보다 두배 이상 높다.

G7 노리던 스페인 몰락

▲ 스페인은 세계 최고의 축구 리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스페인 경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유로2012에서 우승 직후 환호하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와 보조금 삭감에 항의하는 광부들.

하지만 성장동력이 문제였다. 스페인의 경제성장을 이끈 주역은 부동산이었다. 1999년 국민당이 유로화를 도입한 직후 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이자율이 4%까지 떨어졌다. 당연히 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유로화를 끌어들여 부동산에 투자했다.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구쳤다. 1997~2007년 10년간 주택가격의 상승률은 300%를 웃돌았다. 부동산 투자붐은 건설경기 호황을 불렀다. 2008년 기준으로 건설업 비중은 GDP의 13%, 고용의 12%에 달했다. 20%를 넘나들던 실업률이 꾸준히 감소한 것도 어쩌면 부동산 투자 붐에서 기인했다. 한편에서 ‘부동산 거품이 꺼지는 순간 스페인은 사망’이라고 경고했지만 스페인 정부는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이 경고는 맞아떨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자 스페인을 감싸고 있던 부동산 거품이 급격하게 빠졌다. 지난해 말 스페인의 부동산 가격은 2008년 고점대비 25%가 넘게 하락했다. 부동산 시장이 몰락하자 스페인의 경제여건 역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부동산 경기가 건설업체에 치명타를 안기면서 실업률이 치솟고, 소매판매율이 떨어졌다.

몸집 키우기에 혈안이 돼 주택담보대출과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늘리던 스페인의 저축은행들은 기업과 개인의 상환이 지체되자 붕괴직전까지 몰렸다. 부동산 거품 붕괴가 실물경제와 금융경제 모두 심각한 타격을 입힌 것이다.

분에 넘치는 복지도 문제였다.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전 총리와 마리아노 라호이 현 총리가 연금수령 연령을 높이고 긴축정책을 도입하기 전까지 스페인 사람들은 은퇴 전 15년 평균급여의 85%를 연금으로 받을 수 있었다. 학비, 의료비도 공짜였다. 전체 공공지출의 66%가 사회보장 관련 비용이다.

 
한국, 위기 전 스페인과 판박이

스페인의 몰락과정을 보면서 어느 나라가 떠오르는가. 한국이다. 한국의 자랑 중 하나는 정부부채가 적다는 거다. 사실이다. 세계 각국이 재정위기에 시달릴 때 한국은 ‘탄탄한 곳간’을 뽐냈다. 한국의 GDP 대비 정부부채는 31%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국의 아킬레스건은 스페인과 똑같다. 부동산 가격이 빠지면서 수많은 건설업체가 유동성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주택담보대출 역시 심각한 상황이다. 2012년 11월 기준 국내은행 주택담보대출의 연체율은 0.94%에 달했다. 2006년 10월(0.94%)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2010년 10월 말 0.44%이던 주택담보대출 연체율은 2년 만에 두 배 넘게 뛰었다.

 
부동산 가격이 하락세라는 점을 감안할 때 연체된 주택담보대출은 또 다른 위기의 ‘뇌관’이 될 수 있다. 주택담보대출이 가계부채 가운데 42.5%에 달하기 때문이다. 선대인경제연구소 관계자는 “가계부채가 양적으로 급증했을 뿐만 아니라 고이율 대출이 크게 늘어나는 등 최근으로 올수록 질적으로 크게 악화된 상태”라면서 “언제 그 뇌관이 터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폭발 직전 상태라고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저축은행이 몰락해가는 형태도 판박이다. 부동산 경기침체는 PF대출의 부실로 이어져 국내 저축은행업계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2011년 말 기준 은행권의 PF대출 중 부실채권 비율은 18.35%에 달한다. 공적자금을 쏟아부으며 인수합병으로 저축은행 부실을 봉합하려는 정부의 행태도 같다.

부동산 시장과 건설업계가 흔들리자 국가경제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한국의 GDP 대비 건설업 부가가치는 8.03%로 2위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5.53%보다 훨씬 높다. 공교롭게도 스페인은 9.40%로 1위다. GDP 대비 건설투자는 한국은 18.12%로 1위다. OECD 평균 11.74%보다 6%포인트 이상 높다. 2위는 15.92%의 스페인이다. 글로벌 불황을 가장 잘 이겨냈다는 한국도 스페인처럼 ‘급격하게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대책 마련 서둘러야 …

그럼에도 한국은 너무 낙관적이다. 정부는 리먼 사태 후 기초체력이 탄탄해졌다고 자랑하기에 바쁘다. 일부분은 사실이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올 1월 현재 3289억1000만 달러다. 사상 최고치다. 리먼 사태 직전인 2008년 8월 2432억 달러보다 857억 달러 늘었다. 단기외채 비중은 2008년 9월 79%에서 지난해 9월말 31.6%로 떨어졌다. 1999년 말 29.7%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그렇다고 약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국경제는 대외변수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최근엔 환율하락으로 수출경쟁력에 비상이 걸렸다. 수출의존도가 60%에 육박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치명적이다. 잊을 만하면 다시 불거지는 북한리스크도 걸림돌이다.

조금 괜찮다고 낙관론에 취했다간 스페인처럼 ‘쇼크’에 빠질 수 있다. 세계 각국에서 터지는 금융패닉에서 볼 수 있듯 ‘죽느냐 사느냐’는 찰나에 결정된다. 1997년 외환위기 때 우리도 그랬다. 국제금융시장에 평평한 고지나 중간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쇼크, 패닉, 다음은 붕괴다.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
심하용 기자 stone@thescoop.co.kr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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