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21회

선조가 하교하기를 “평양을 굳게 지키기로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너희들 평양 신민은 떠나지 말고 나라를 도와 적병을 물리치도록 하라”하였다. 그중에 나이 많은 백성들은 땅에 엎두려 통곡하며 “평양 자체가 최후 1인까지 다 죽어도 성상을 위하여 싸우리이다”는 결심을 주달하였다. 선조는 백성들의 하는 이 모양을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려 뿌렸다.

 
이렇게 조정에서 평양을 지킬까 버릴까 하는 의논이 정치 못하여 대관들은 은밀히 뒷구멍으로 피난할 계책을 세워 혹은 처자를 혹은 재물을 먼저 실어내어 지정한 피난처로 보냈다. 평양 백성들은 이 대관이란 무리가 믿을 수 없는 무리이니 우리도 같이 성을 지키기를 그만두자 하고 너도나도 다들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백성들이 도망하는 것을 보고 대관들은 크게 놀라 시급히 회의를 열고 백성들을 떠나지 말게 하고 기왕 떠나간 백성들은 도로 불러들일 계책을 협의했다. 그 결과로 대동관大同館 객사 앞에다가 성중 백성들을 모으고 세자 동궁이 선조를 대신하여 “평양을 굳게 지킬 터이니 다들 떠나지 말라” 하고 타일렀다.

그러나 그들 백성의 생각에는 선조의 좌우에 있는 신하라고는 모두 간신배의 기망1)하는 수단이리라 하여 과연 선조의 뜻인지 알 수 없다 하여 백성 하나가 나서며 “아뢰기 황송하오나 동궁전하의 말씀을 백성들이 믿지 아니하오니 상감께옵서 친히 효유하시면 어떨지…” 하고 말하였다.

대신 중에 우의정 유홍의 무리는 분연하여 “이 버러지 같은 상놈들이 동궁의 영지를 아니 믿는다니 군사를 풀어서 그 놈들을 무찌르시오!” 하고 떠들었다.

영부사 유성룡이 유홍의 말을 막으며 “지금이 어느 때요? 백성의 뜻을 거슬러서는 아니 되오” 하는 말이 시행되어 마침내 백성들의 청대로 선조가 친히 평양을 버리지 아니할 뜻을 백성에게 효유하기로 정하고 승지를 하여금 “내일에는 성상께오서 너희들 백성에게 전교가 계실 터이니 다들 이곳으로 모이라” 하는 명을 전하였다. 이튿날 대동관 객사 앞에는 선조의 말을 듣겠다고 평양성 백성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백성들이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을 보고 영의정 최흥원 이하 여러 대관들은 겁을 내어 “그 무지한 상놈들이 그렇게 모여들어 무슨 일을 저질러 낼지 모르는데 성상이 친림하시어 나서는 것은 위험하오” 하고 반대하는 걱정에 대하여 유성룡은 기가 막혀 “왕은 이민위천2)이라 나라가 백성을 힘입어 된 것이거늘 대감이 백성을 그렇게 낮추어 보아 쓰겠소? 또, 군왕의 말씀은 일월과 같으니 한번 하신 말씀을 거둘 수 없는 것이오” 하고 선조에게 어제 약속한대로 친히 백성들을 향해 맹세할 것을 청하였다.

선조는 유성룡을 쫓아 몸에 곤룡포袞龍袍, 머리에 익선관翼善冠을 갖추고 대동관 문턱까지 나갔다. 선조는 하교하기를 “평양을 굳게 지키기로 내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너희들 평양 신민은 떠나지 말고 나라를 도와 적병을 물리치도록 하라” 하였다. 그중에 나이 많은 백성들은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평양 자제가 최후 1인까지 다 죽어도 성상을 위하여 싸우리이다” 하는 결심을 주달하였다. 선조는 백성들의 하는 이 모양을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려 뿌렸다

선조가 이렇게 약속하였으니 싫더라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좌상 윤두수로 수성대장을 삼고 도원수 김명원, 이조판서 겸 평안도 도순찰사 이원익과 더불어 평양을 지키게 하였다. 이렇게 장수가 부족하여 남북촌 생원님네가 원수이니 대장이니 하는 판에 패랭이 쓰고 짚신감발3)에 거지 모양을 한 순찰사 이일이 평양에 들어왔다. 그는 충주의 패보를 서울에 올려서 선조로 하여금 서울을 떠나게 한 가장 큰 공신이 된 것이었다. 그래서 패군지장인 이일이 거지꼴을 하고 평양에 들어와 대죄하였다. 죄는 패전한 죄였다.

워낙 장수가 없던 판에 그 자격 없는 이일을 패전한 죄는 거론하는 이가 없고 도리어 환영하였다. 적병이 황해도를 지났다는 말을 듣고 인심이 더욱 흉흉하던 이때에 비록 패군지장이라 하더라도 이일 같은 명성이 높은 장수를 얻은 것이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일의 그처럼 초라한 꼴과 초췌한 얼굴을 보고 유성룡은 웃으며 “이곳 사람이 자네를 크게 믿는데 이처럼 초췌해서야 사람들의 마음을 위안할 수가 있겠나?” 하고 자기가 입던 남천익(남철릭) 전포 한 벌을 내어 입히니 다른 대관들도 혹은 전립을 주고 혹은 호수 은정자 패동개4)를 주어 갈아입고 나니 면목이 일신하였다. 그러나 신을 벗어 주는 이가 없어서 짚신을 신은 것을 보고 유성룡 등이 웃으며 “비단 군복에 짚신이 잘 아니 어울리는 걸?” 하고 웃으니 좌우에 모인 대관들은 다 크게 웃었다. 이렇게 나라를 근심하는 중에도 의외로 웃음판이 벌어졌을 때에 황해도 봉산 등지로 탐정갔던 벽동5) 토병 임욱경任旭景이 달려와 적병이 벌써 봉산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하였다.

적병을 우습게 보는 이일

▲ 유성룡은 백성의 뜻을 모아 선조에게 평양을 버리지 말 것을 청했다.
유성룡은 수성대장 윤두수를 보고 “적병이 봉산을 왔으면 그 척후는 벌써 강을 건너와 있을 것이오. 특별히 영귀루詠歸樓 아래가 강이 두 갈래로 갈려서 옅은 여울이 되어서 길만 알면 적병이 건널 수가 있을 것이니 만일에 적이 우리 사람을 향도로 해서 물길로 우리 모르게 건너와서 갑자기 엄습을 하면 성이 위태할 것이오. 마침 이일이 왔으니 곧 보내어 여울을 지키게 하여서 불의의 변을 막는 것이 어떠하오?” 하였다. 윤두수는 “대감의 지시가 옳소” 하고 곧 이일더러 “자네가 곧 가서 여울목을 지키도록 하게” 하였다.

이일은 “뭐 어느 새에 그놈들이 올라구요” 하고 적병을 우습게 보는 어조였다. 유성룡은 이일을 한번 흘겨보았다. 그는 이일이 상주에서 패한 것이나 신립이 충주에서 패한 것이나 다 척후대라는 것을 내놓아 적의 행동을 정찰할 줄을 모르는 때문인 줄을 아는 것이었다. 이일은 유성룡의 못마땅해하는 눈치를 보고 “소인을 가라시면 곧 영귀루인가 하는 데로 가겠습니다만 소인이 데리고 온 부하 군사라고는 단 열이 못되오니 군사를 주시오” 하였다. 유성룡은 윤두수와 협의하고 평안도 군사 3백명을 주어 거느리게 하였다.

이일이 위의를 갖추어 가지고 말에 높이 앉아 함구문含毬門으로 나갔다. 그는 자기가 데리고 온 군관과 평안도 군사 300명을 함구문 앞에 벌여놓고 의기당당하게 검열을 한 뒤에 술과 고기를 장만하고 평양기생까지 불러서 질탕하게 놀고 있었다.

유성룡은 이일이 이렇게 머뭇거릴 줄을 짐작하고 가만히 사람을 보내어 살피게 하였더니 과연 이일이 취안이 몽롱하게 되어 기생을 희롱하고 군사들은 그것을 구경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또 하나의 원균이로다.

유성룡은 곧 수성대장 윤두수를 보고 “이것 큰일 났소. 이일이 상주에서 하던 버릇을 또 하고 있는 모양이오. 시각이 급한 이때에 해가 지도록 함구문 밖에서 술을 먹고 기생 계집만 희롱하고 있다오” 하고 성화같이 재촉하기를 청하였다. 윤두수는 놀라서 종사관을 보내어 즉각 출발하라고 엄명하였다. 이일이 하릴없어 군사를 거느리고 함구문을 떠나 길을 나섰다. 군사들 중에는 영귀루가 어딘지 타지에서 온 사람이 되어서 아는 이가 없었던지 이일은 남쪽으로만 가자하고 취한 눈으로 평양의 수려한 경치를 바라보고 가더니 10여리나 가서 평양좌수 김내윤金乃胤이 성 밖에 일을 보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만났다. 이일은 좌수 김내윤을 불러들여 묻기를 “영귀루를 이 길로 가느냐?” 하고 물을 때에 김좌수는 기가 막혔다. “이리로 가면 보통강普通江이오 영귀루는 지금 오신 길로 도로 가야 하오” 할 때에 이일은 크게 노하여 “이놈 네가 진작 와서 길을 인도하지 아니하고 인제야 늦게 와서 그런 말을 한단 말이냐?” 하고 좌수 김내윤을 길바닥에 엎어놓고 볼기를 10여 대나 매를 때린 뒤에 “네 이놈 너 죄는 응당 만번 죽을 일이로되 특별히 목숨만은 살려주는 터이니 앞을 서서 길을 인도하라!”며 조폭한 호령이 추상에 열일처럼 엄하였다. 평양좌수와 상주판관이 이일에게 같은 일을 당했도다. 평양좌수 김내윤은 매 맞아 아픈 다리를 끌고 이일의 군을 인도하여 만경대萬景臺 밑에 다다르니 대동강 저쪽 언덕 위에 벌써 일본군이 수백명이나 늘어서서 강을 건너려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평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조정

▲ 이순신이 거제·고성·사천 등 연안에서 승전했으나 피난으로 경황이 없었던 조정은 수전의 승첩을 중히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을 본 이일은 취하였던 술이 번쩍 깨어서 곧 수하 무사를 불러 활을 쏘기를 명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무서워서 발을 내어놓으려 하지 아니하였다. 이일이 칼을 빼어 들고 베려 하니 그때야 군사들이 활을 쏘았다. 이때에 적병은 어떤 조선 사람 하나를 붙잡아 길잡이로 앞세우고 강을 거의 건너서 이쪽 언덕에 오르려 하였다가 이쪽 군사가 굳센 활로 쏘아 앞섰던 적병 6~7명을 맞혀 넘어뜨리니 그제야 물에 들어섰던 적병들이 달아나버렸다. 이일은 군사를 데리고 여울목을 지키기로 힘을 썼다. 군사들도 적병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비로소 기세를 얻어서 용감하게 격퇴하였다.

임진1592년 6월 1일에 명나라 요동도사사遼東都司使 임세록林世祿이 명 정부의 명령으로 일본군의 형세를 살피려 하여 평양에 왔다. 선조는 그를 대동관에서 불러 보고 적병의 흉포함과 조선의 흥망이 조석에 달렸으니 대명에서 곧 구원병을 보내어 주기를 간청하였다. 임세록은 가타부타 하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말하는 눈치로 본다면 조선정부의 말을 믿지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임세록의 이 태도는 선조와 대관들의 마음을 극도로 불안하게 하였다.

비록 평소에 유성룡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서인들이라도 이 일에 당해서는 그 재화와 문장을 미리 아는 바이기 때문에 반대할 자가 없었다. 유성룡은 임세록에게 말하되 조선 현상이 수백년으로 전쟁이란 없어서 백성들이 병사를 보지 못하다가 졸지에 천하의 막강한 적을 만나서 조총이란 군기를 사용하여 사람의 죽음이 말할 수 없이 되고 적이 승승장구하여 물밀듯 쳐들어오니 그 칼끝을 당하지 못한다는 말과 정발과 신립과 심우정과 신할 유극량 등 제장이 연이어 다 전사한 사정을 상세히 설명하여 그의 의심을 파하도록 힘을 썼다.

임세록은 답하되 “일본군이 부산에 건너왔다는 말을 들은 지 며칠이 안 되어서 국왕이 한성을 버리고, 또 며칠이 안 되어서 개성을 버리고, 또 몇날이 안 되어서 적병이 벌써 평양에 왔다고 하니 이럴 수야 있소? 또 조선에도 사람도 있고 군사도 있으려거든 이렇게 빨리 적병을 끌어들이는 수야 있소?” 하는 임세록의 말 속에는 조선이 일본군을 인도하여 명나라를 침범하려는 불측한 음모를 가졌다는 중국에서 떠돌아 있는 풍설을 그대로 표현하는 속뜻을 머금었다.

유성룡은 조선이 일본과 통한 사실이 없는 것을 변명하여 조선은 단군과 기자箕子의 감화를 받아 충의와 지성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지켜 왔기 때문에 간사하게 속이는 정책은 옛부터 배척하였다는 정세를 알아듣게 말하여 성심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이 벌써 대동강 저편에 와 있는 것이 사실이란 것을 실지로 보이기 위하여 유성룡은 임세록을 데리고 연광정練光亭에 올라 형세를 가리키며 설명하였다. 아아, 일국의 수상이던 50세가 넘은 사람이 일개 젊은 외국 군관에게 동정과 호감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눈물겨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마침 적병이 강 저쪽 수풀 속으로 보이더니 이윽고 2, 3인이 뒤를 이어 나와서 배회한다. 유성룡이 임세록을 보고 “저게 적병의 척후라는 것이오” 하였다.

日 공세에 선조 ‘좌불안석’

 
임세록은 믿지 아니하는 어조로 “적병이 어찌 그리 적소?” 하였다. 유성룡은 “일본군이 본래 간사하고 교활해서 대병이 뒤에 올 때에는 반드시 앞에 정탐을 보내는 것인데 정탐은 언제든지 3, 4인에 불과하다고 하오. 만일 몇 명이 안 된다고 마음을 놓았다가는 반드시 적의 계교에 빠지는 것이오” 하고 적정을 상세하게 설명하였으나 의심을 품은 임세록은 픽 웃으며 믿어지지 아니하는 듯 하였다. 선조와 및 여러 대관은 유성룡에게 “임세록이 의심이 풀어져 갔소?” 하고 물었다.

유성룡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 대한 의심이 매우 깊은 모양이오” 하였다. 선조 이하 여러 대관은 “그럴진대 평양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평양에 주저앉으려 한 것도 명나라의 구원을 믿은 것이요, 무슨 특별한 계책이 있는 것은 아니건마는 이제 만일 명나라가 우리 조선을 의심한다 하면 큰일 났소” 하고 내 힘으로 해낸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없었다. 대관들의 심산에는 명나라 구원을 믿을 수 없으니 피난가자 심산궁곡으로 들어가서 목숨을 부지하자 하는 것이 그들의 소원이었다. 차차로 꽁무니를 빼는 자가 생기고 선조의 마음도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이때까지에 다른 도를 다니며 전투하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거제 고성 사천 진해 창원 웅천 김해 연안에서 여러 번 승전하였다는 장계가 왔으나, 조정에서는 육전에서의 여러 번 참패로 하여 이 쫓기는 길을 떠난 심리에 하도 경황이 없었던지 그처럼 수전의 승첩을 중대시하는 생각을 아니하였다. 오직 유성룡 등 몇 재상은 수전의 승첩이 육전에도 관계가 큰 것을 누누이 설명하였다. 그러나 원견遠見이 없는 그들은 도무지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하루는 적병 한 부대가 대동강 저편으로 출동하여 이편 형세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이것을 보고 적군의 총공격이 미구에 있을 줄 알고 선조는 은밀히 예조참의 노직盧稷을 시켜 종묘사직의 위패와 궁인을 호위하여 칠성문6)으로 나가게 하였다.

이것을 본 평양성중 백성들은 손에 칼과 몽둥이를 들고 길을 막고 노직과 궁인 할 것 없이 막 두들겼다. 백성들은 노직의 무리 문관들을 가리키며 “이놈들! 평일에 국록을 절취하여 먹고 이제 와서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속이니 너희같이 죽일 놈들이 또 어디 있단 말이냐?” 하고 고함을 쳤다. 대동관 행궁 곁에도 백성들이 부녀와 어린아이들까지 데리고 모여들어서 모두 발을 구르고 “평양을 안 지키고 달아나겠거든 무슨 까닭에 피난 가 있던 우리들을 속여서 불러들였다가 적병의 손에 어육지참7)을 당하게 하고는 달아나느냐! 이 간신 놈들, 나서라, 우리만 죽을 줄 알았더냐?” 하고 아우성을 치고 소동을 하였다.

평양에서 백성이 소요 일으켜

여러 대관 삼정승 육판서는 모두들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하여 겁을 집어먹고 촌보도 바깥출입을 못하고 시위侍衛하는 의장병을 풀어 그들 백성을 무찌르려 하였으나 군사들이 대관들보다 이해성이 더 나았던지 도리어 백성에게 물리침을 당하여 퇴각한다. 즉 군사들 중에는 백성의 정곡을 십분 동정하여서 물러서는 모양이다.

영상 최흥원 우상 유홍 전좌상 정철 이하 대관들은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선조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유성룡을 불러라! 유성룡이 어디 있느냐?” 하고 초조히 애를 썼다. 이때에 유성룡은 연광정에서 윤두수 이원익 이하 여러 사람과 군사회의를 진행하다가 백성의 소요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행궁을 향하여 달려갔다. 길에서 백성들에게 봉변할 뻔하였더니 백성들 중에서 “유정승은 충신이다. 유정승은 평양을 지키자 하는 대신이다!” 하고 길을 열어준다.

유성룡이 대동관 행궁안에 들어서니 선조와 및 백관들은 인제는 살아난 듯이 유성룡을 보고 일제히 숨을 길게 쉬었다. 선조는 유성룡을 대하여 “이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니 이를 어찌하오?” 하고 물을 때에 유성룡의 대답은 “반란이 아니오라, 성상의 거가가 평양을 떠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는 유성룡의 말이 반란이 아니라는데 대하여 적이 안심이 되었다. 다른 대신들은 이것을 반란이라고 알렸던 것이었다. 유성룡이 곧 행궁 문밖에 나서서 많은 백성들 중에 수염 많이 나고 흰 노인을 가리켜서 불렀다. 그 노인은 매우 점잖았다. 유성룡의 앞으로 왔다. 유성룡은 그 노인더러 “너희 백성들이 성상의 거가가 평양을 떠나지 마시고 힘을 다하여 성을 지키기를 원하는 것은 지극히 충성된 마음이지마는 이렇게 소요를 일으켜서 성상을 놀라게 하니 백성된 도리에 이런 해괴한 일이 어디 있느냐? 또 조정에서도 이제 성상께 여쭈어서 평양을 굳게 지키기로 해서 성상이 허락하시었거든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이냐? 그대는 이 뜻으로 백성들을 타일러서 물러가게 하라” 하였다.

그 노인은 손을 들어 읍揖하고 하는 말이 “백성들이 상감께서 성을 버리려 한다는 말을 듣고 우매한 생각에 분함을 못 이겨서 그러한 것이오. 이제 대감의 말씀을 들으니 소인네들의 가슴이 터지는 것 같소. 평양 백성이 하나라도 살아있고는 적병이 한걸음도 평양성 안에 들어오지 못할 터이오니 다시는 백성을 속이고 평양을 떠난다는 의논이 나지 말게 하시오” 하고 그 노인은 백성들에게 유정승의 말을 전하고 해산하여 물러갔다.

이날 백성들이 유정승의 말을 전해 듣고 물러간 뒤에 조정 대신들은 감사 송언신宋言愼을 시켜 민란의 우두머리라고 할 사람 셋을 잡아 목을 베었다. 유성룡의 명성을 팔아서 소요를 진정한 뒤에 소위 대관들은 평양을 버린다는 것은 기정방침이 되고 말았다. 최흥원 정철 유홍 이하 제신들은 대부분이 함경도로 가기를 주장하였다. 그것은 자기네의 가족이 함경도에 피난한 때문이었다. 이때로 말하면 벌써 함경도는 가등청정의 손에 들어갔으나 조정에서는 모르고 있던 것이었다. 마침 동지8)이희득李希得이 일찍 영흥永興부사로 있을 때에 민심을 얻었다 하여 그로 함경도 순검사를 삼고 좌랑 김의원金義元으로 종사관을 삼아 내전마마와 궁빈을 부탁하여 밤중에 먼저 함경도로 향하여 떠나보냈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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