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위 눈’ 되기

▲ 이용규,‘Dawn Eye-10’ Lenticular, 115×115㎝

봄이다. 이용규 작가의 화면엔 형형색색 꽃잎들이 넘실거린다. 꽃잎과 풀잎은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변한다. 신기하다. 작가는 2차원의 평면에 ‘렌티큘러(Lenticular)’를 이용했다. 하나의 화면에 여러 상像을 보이도록 한 것이다. 렌티큘러가 생소한 독자라면, 1980~1990년대 유행하던 3D 책받침을 떠올려보자. 정면에서 보면 웃는 얼굴인데 옆에서 보면 우는 얼굴이 보이는 책받침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자신의 작업에 렌티큘러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회화표현을 관람자들이 수면水面을 바라보듯 바라보기 원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우리 눈앞에 드넓게 펼쳐진 강가의 수면은 화가의 캔버스처럼 2차원 평면과 같다. 그것은 이브 클랭(Yves Klein)의 푸른빛 모노크롬 회화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깊이의 공간이 존재한다. 작가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세계를 이어주는 공간을 화면에 담고자 한 것이다.

“당신이 보는 것, 그것이 전부다”고 말한 프랭크 스텔라의 목소리가 친숙하게 느껴지는 필자에게 그것은 고개만 갸우뚱하게 할 뿐이다. 작가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사이’ 공간을 그가 산책길에 만나는 새벽에 비유해 설명한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새벽은 반투명한 몽환적인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은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서 유희가 춤추는 미적 경험의 공간이다. 새벽은 어둠과 밝음 사이에서 밤과 낮의 경계면으로서의 표면이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연결 

▲ 이용규,‘Dawn Eye-11’Lenticular, 115×115㎝

작품을 보자. 바람에 꽃잎•풀잎•나뭇잎이 바람에 너풀거리는 풍경 위로 주사위 하나가 던져져 있다. 주사위는 작은 돌이 수면에 만드는 파문을 풍경에 만들어낸다. 돌이 강에 던져진 순간 수면이라는 평면 아래 공간이 열린다. 풍경 위 주사위는 그 돌과 같다. 여기서 주사위의 ‘눈’은 바로 산책길에서 새벽이라는 시간에서의 사이 공간을 읽어내는 작가의 ‘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언어적 유희가 엿보인다. 그는 주사위의 눈을 “일상의 표면 너머 보이지 않는 안쪽에 있는 ‘시간의 여백’을 보는 눈이며, 복합적이고 다의적인 공간인 시적정원을 보는 은유적인 상상의 눈”이라고 정의한다.

이용규 작가의 작품세계는 어쩌면 표피적 감각에서 즐거움을 찾는 세대에게는 낯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장막으로 보이는 기차역의 붉은 벽돌 벽을 열고 마법학교로 가는 해리포터 일행을 상상해보자. 이해가 조금 쉬워질지 모른다.
이재은 미술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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