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용남 한국레노버 대표

여기 온종일 발품을 파는 CEO가 있다. 매장을 돌아다니면서 소비자의 행동을 읽느라 여념이 없다. 사람들은 ‘PC 시대는 끝났다’며 핀잔을 준다. 하지만 그는 “PC의 부활 가능성은 충분하다”며 발품을 멈추지 않는다. IT업계에서 ‘한국의 빌게이츠’로 통하는 강용남 한국레노버 대표. 그가 신발끈을 조여매고 있다.

▲ 어린시절 전자오락실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해독했던 소년은 30년 후 한국레노버의 대표가 됐다.
1981년, 우연히 책 한권을 봤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분석한 전공서적이었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IN)’ ‘아웃(OUT)’ 등의 용어로 정리된 컴퓨터 언어가 매우 체계적이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싶다는 꿈을 꿨다.

당시 대부분의 중산층 가정이 그랬듯 소년의 집엔 컴퓨터가 없었다. 컴퓨터를 유일하게 접할 수 있는 곳은 동네 전자오락실뿐이었다. 소년이 살던 동네 오락실엔 동전을 넣는 아케이드 게임뿐만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오락기가 한 대 있었다.

소년은 오락기 앞에 앉아 게임 대신 프로그래밍 언어를 해독했다. 화면 위로 숫자와 기호는 소년에게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오락실 주인은 그저 ‘게임에 미친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그 소년이 글로벌 IT기업 레노버의 한국지사 CEO에 오를지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소프트웨어 연구에서 컨설팅까지

▲ IT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강용남 대표는 '모든 IT는 문화와 함께 간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
지난해 10월 15일 한국레노버 수장에 오른 강용남(46) 대표는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았다. 장치를 조립하거나 분석하는 걸 좋아했다. 낯선 환경에서 새롭게 도전하는 것도 즐겼다. 그의 성격은 15분기 연속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는 레노버에 안성맞춤이라는 평가가 많다.

그는 IT 분야에서 잔뼈가 굵다. 1994년 LG전자 컴퓨터사업부에 입사해 IT업계 첫발을 내디딘 그는 1998년 LG정보통신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소프트웨어를 연구했다. 1999년부터는 한국HP에서 연구개발(R&D)과 영업을 아우르는 업무를 담당했고, 2008년 이후엔 델코리아에서 컨설팅을 담당했다. 2011년 3월 한국HP 상무로 발탁된 그는 6개월 만에 한국레노버 대표로 영입됐다. IT업계의 한 종사자는 이렇게 평가한다. “IT는 워낙 기술의 변화가 빨라서 한 분야만 20년 넘게 근무해도 성공하기 힘들다. 강용남 대표는 보기 드문 인물이다.”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이력과 경험은 강 대표를 상징하는 ‘힘’이다. 일화 한 토막을 보자. 지난해 11월 서울에서 PR워크숍이 열렸다. 주최 측의 부탁으로 강 대표가 발언을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예정에 없던 일, 말 그대로 ‘돌발상황’이었다. 더구나 연회장엔 외국인이 대부분이었다. 한국레노버의 역사와 전략을 영어로 발표해야 하는데, 준비된 원고가 없었다. 한국레노버 홍보실 직원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강 대표는 개의치 않고 강단에 올랐다. 청중을 향해 빙긋이 미소까지 지으면서 말이다. 그의 입에선 유창한 영어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5분 전 한국레노버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지금 우리 직원 얼굴이 사색이 됐는데, 괜찮다. 나는 갑작스러운 이벤트를 좋아한다.” 좌중에 웃음이 터졌다.

강 대표는 부드럽고 힘찬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다들 PC시장이 위기라고 한다. 하지만 최근 출시된 스마트폰•태블릿PC•스마트TV를 보자. 형태는 제각각이지만 모두 PC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화면과 입력장치가 분리되고 합쳐지지만 결국 PC 형태를 벗어나지 않는다. PC는 PC로 존재한다. 우리가 PC사업을 중시하는 이유다.”

이 PR워크숍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강 대표가 소프트웨어•연구개발•컨설팅•영업 등 다양하게 근무를 해서인지 통찰력이 뛰어나다. 말도 조리 있게 잘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강 대표가 본사로부터 받은 미션은 두가지다. 첫째는 국내시장에서 한국레노버를 10대 기업으로 키우는 거다. 둘째는 매년 두배 이상의 성장을 이루는 거다. 언뜻 봐도 쉽지 않은 미션이다. 더구나 국내엔 글로벌 IT시장을 호령하는 쟁쟁한 토종기업들이 있다. 강 대표로선 전열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지휘봉을 잡은 강 대표는 한국레노버를 철저하게 분석했다. 그러던 중 2005~2008년 3년간의 성장 그래프가 들쭉날쭉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상했다. 2005년이면 한국시장에 진출한 첫해다. 더구나 IBM PC사업부를 인수해 성능 좋은 PC를 한국시장에서 팔 수 있었다. 환경 자체는 성장 그래프가 상승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강 대표는 이유를 찾았다. 예상한 대로 PC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비틀어진 조직문화에 문제가 있었다. 미국계 기업 IBM의 PC사업을 인수하면서 문화적으로 충돌한 게 실적부진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제품군이 다양하지 못한 것도 이유였다. IBM PC사업부로부터 인수한 씽크패드는 기업용 제품이었다. 일반 소비자의 입맛에 맞는 제품이 없었던 것이다. 고민하던 강 대표에게 해답을 준 것은 흥미롭게도 ‘레노버’였다. 사실 레노버는 흥미로운 기업이다. 동양 문화를 가진 사업부문과 서양의 DNA를 갖고 있는 사업 부문이 ‘한 지붕’ 아래서 공존하고 있어서다. 2005년 인수한 IBM PC사업부는 서양 문화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레노버의 PC사업부는 논리적이고 프로세스가 뛰어나다. 시스템도 체계적이다.

 

모든 IT는 문화와 함께 간다

반대로 모바일 사업부문은 중국 민영기업인 ‘레전드홀딩스’의 유전자가 남아 있다. 레전드홀딩스가 레노버의 전신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조직문화를 가진 사업부문은 문화적 충돌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시너지 효과가 나오지 않았다.

이때 양위안칭楊元慶 회장이 나섰다. 양위안칭 회장은 2009년 레노버의 강점을 ‘다양성’으로 삼았다. 미국•일본•브라질•독일 등 회사를 인수하면서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받아들였다. 임원진도 다양하게 구성했다. 이런 방식으로 서로 다른 사내 문화를 섞이게 만든 양 회장은 제품 라인에 변화를 줬다. 기업용 제품만 있던 씽크패드를 소비자와 기업용으로 나눠 론칭했다.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할 만한 톡톡 튀는 아이디어도 선보였다.

강 대표는 양 회장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방법을 택했다. 서로 다른 사업부문이 한곳을 바라볼 수 있도록 ‘목표’를 정확하게 제시한 것이다. 한국레노버에 출근한 첫날. 강 대표는 전 직원을 불러 모았다. “매주 월요일에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자.” 직원들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10년•5년 장기목표를 이루려면 한달•한주 단기목표부터 세워 실천해야 한다. 그래야 최종목표를 이룰 수 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

 
강 대표가 직원에게 목표설정을 강조한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상황을 만든다는 그의 철학 때문이다. 그는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상황을 불만족스럽게 생각한다. ‘물건을 많이 못 팔았다’ ‘승진을 못했다’ 등 이유도 많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모든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자신이다.” 강 대표의 철학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아울러 부실한 유통망도 가다듬고 있다. 사실 한국IBM은 유통망이 탄탄한 LG전자와 손을 잡고 PC를 팔았다. 하지만 이 유통망은 IBM이 레노버에 인수된 뒤 사라졌다. LG전자의 유통망이 한국레노버로 넘어오지 못한 것이다. 강 대표는 “그동안 쌓은 모든 인맥과 전략을 활용해 유통망을 확대하겠다”며 “전략적인 파트너십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전략적 파트너가 많아질수록 한국레노버의 성장은 빨라질 것”이라며 “국내 PC시장에서 반드시 1위를 차지하겠다”고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그의 목표는 물거품이 될 수 있다. PC시장은 현재 정체기다. 스마트폰•태블릿PC 등 PC를 대체할 수 있는 제품이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레노버가 제아무리 품질이 뛰어난 PC를 출시해봐야 ‘모바일’이라는 큰 산 앞에서 무릎을 꿇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강 대표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헛된 꿈이 아니라고 말한다. 실제로 그가 보는 IT 시장의 미래는 관점 자체가 다르다. 그는 PC의 인기가 완전히 사그라진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상에 앉아 머리로만 생각한 게 아니다. 그는 대표에 오른 직후부터 발품을 팔면서 거리를 누비고 있다. PC 소비자의 니즈(욕구)를 직접 느끼기 위해서다. 소비자가 제품을 어디서 구입하는지, 제품을 결정할 때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 여성 소비자는 어떤 제품을 무슨 이유로 사는지 등을 조사하는 게 그의 주요 일과다.

 

“고객 욕구 반영한 PC로 승부”

이 과정에서 강 대표는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고 말했다. ‘제품의 컬러보다 디자인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외근이 많고 문서작업을 많이 해야 하는 소비자는 모바일 기기보단 얇고 가벼운 PC를 선호했다. 이는 PC의 가치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강 대표의 말처럼 말이다. 강 대표는 “고객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얇고 가벼운 PC를 끊임없이 출시할 수 있다면 승산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한국레노버의 수장으로 조직을 이끈지 이제 150여일. 강 대표는 한국레노버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첫째는 PC의 변신, 둘째는 유통채널 확보다. 여기에 한국레노버의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작업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쇼셜광고다. 페이스북에 광고를 하고 소셜커머스를 통해 제품을 홍보하는 전략을 강화한 것이다.

강 대표의 첫 성적표는 오는 6월 나온다. 그때가 되면 강 대표의 혁신전략이 통했는지, 아니면 벽에 부닥쳤는지 결과를 알 수 있다. 그는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맞다. 그의 준비는 끝났다. 그는 출발선에 섰다. 한국레노버의 새 출발도 시작됐다.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 | @kkh4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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